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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진자료 통해 입증한다
 
고가도로 공사로 자리 뺏긴 ‘독립문’
역사의식 부재와 무지가 낳은 상처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국내외 관광객, 혹은 시민들이 독립공원(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을 찾아 하늘 위로 늠름하게 뻗어 있는 독립문(獨立門)을 관람하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는다.

외형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이 독립문(사적 제32호)이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원래의 위치에서 무악재를 바라보며 중국 사신을 맞이해 ‘사대(事大)’ 외교로부터 벗어나 조선의 독립을 알리기 위해 건립된 건축물이, 성산대로 고가 공사에 떠밀려 지금의 위치로 옮겨져 서대문형무소를 향해 바라보는 형국이 됐다.

문화재(유형)는 그 안에 내재된 의미와 함께 할 때 건축물로서 가치가 있다. 허나 그 의미가 원래대로의 의미를 상실해버렸다면 그 문화재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단순한 건축물에 불과한 사상누각이나 다름이 없게 된다.
 
그럼 독립문에 담긴 원래의 의미는 무엇이고, 현재 어떤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 알아보자.
 
글 김현진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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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문 무악재를 넘어오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고자 사대외교의 상징으로 건립한 영은문의 모습
 
 
 
조선시대 중국은 우리가 섬기는 ‘사대’(事大)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사대외교의 상징으로 건립한 것이 영은문(迎恩門)이다. 이는 중국황제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를 담은 사대주의 정치의 표상이었다. 영은문은 무악재를 향해 바라보고 건립됐다. 이는 중국이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 가는 유일한 육로가 무악재였기 때문에 중국사신을 성대히 맞이하고자 세운 것이다.

이를 일제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의주로 향하는 시작 관문(당시 전신주가 의주까지 뻗어 있었음)이었던 영은문을 헐었다. 이후 50m 정도 앞쪽에 서재필의 주도로 독립문이 건립된다. 중국(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기 위해 영은문 앞쪽에 1896년 준공, 1897년에 완공된다. 그래서 중국에서 사신이 들어올 때는 한자로 써 있는 독립문을 보게 되며, 반대로 나갈 때는 한글로 된 독립문 글자를 보도록 했다. 아울러 영은문을 받치고 있던 주춧돌인 두 개의 돌기둥도 지나가게 함으로써 중국은 더 이상 우리가 상국(上國)으로 섬길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도록 했다.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 지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인터넷 백과사전(두산)이나 독립문 현장 안내판에는 영은문을 없앤 터(영은문 안내판)에 또는 영은문 자리(독립문 안내판)에 독립문을 세웠다고 표기돼 있다. 독립문은 영은문이 있던 터의 50m 가량 떨어진 앞쪽에 지었던 것이지,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웠다는 표현은 맞지 않는 것이다. 정성길 명예박물관장으로부터 단독 입수한 옛 독립문 사진을 봐도 명백히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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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관장 역시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는 표현을 지적했다. 그는 “사진이 명백하게 증명해 준다. 사대사상에 깃든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고 말하는 게 무슨 자랑이라고 이같이 잘못된 표현을 쓰는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악재 바라보던 독립문 본래 의미 퇴색돼

독립문의 본격적인 오류는 1979년 성산대로 고가 공사로 인해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면서부터 시작됐다. 독립문은 반청(反淸)의 상징이다. 아치문이 무악재를 바라보도록 지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곧 청나라가 한양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육로인 무악재를 넘어와야 했기에 무악재를 바라보고 지은 것이 독립문에 내포된 의미였다. 하지만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면서 독립문은 더 이상 무악재가 아닌 서대문형무소를 바라보고 있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식민지의 상징 건물이다. 반일(反日)과는 아주 연관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본래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이에 대해 정성길 관장은 “신중하지 못한 채 함부로 문화재를 옮기고 말았다. 그리고 옮겨도 이상하게 옮겨 놨다. 옮긴 것도 잘못이지만 방향도 아무 의미도 모른 채 옮기고 말았다.
 
이는 무식한 행정 처리”라고 분통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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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정 관장은 “그간 수십 년 전부터 문화재청이나 서대문구청 관계자에게 수차례 이 문제를 얘기했으나, 그들은 그게 무슨 큰 문제가 되겠냐는 반응만 되풀이했다”고 말하며 공무원들의 역사인식 부재에 안타까워했다.

문화재는 선조들이 혼을 갖고 세운 목적과 의미가 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옮기지 않는 게 도리다. 일제는 과거에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을 국립민속박물관 자리로 옮기며 우리나라를 우롱한 바 있다. 광화문의 세 개의 문 중 한가운데 문은 임금만이 드나들 수가 있는 곳이었고, 나머지는 문관과 무관의 신하들이 드나들 수 있었다. 그만큼 위엄이 있는 정문을 일제는 왜곡시키려 했다. 광화문이 현재의 위치로 복원이 되지 않고 그 자리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광화문은 아무런 역사적 가치도 없는 사상누각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 위치로 되돌아오면서 광화문의 본연의 기능과 의미를 이어갈 수 있게 됐다. 독립문도 이와 같은 이치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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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남긴 강화 초지진과 극명한 대조

정성길 관장이 7년여 전 미국에서 입수한 독립문의 새로운 자료사진을 최초 공개했다. 이 사진에는 6·25전쟁 이후 독립문이 이전하기 전 모습이 담겼다. 특히 영은문 돌기둥과 독립문에 총탄 자국이 여러 곳 보인다. 이 흔적은 현재 찾아볼 수 없다. 이유는 보수하면서 시멘트로 다 메웠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결과는 전쟁의 상흔을 그대로 남긴 인천 강화군 초지진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초지진은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운양호 사건(1875년)의 격전장으로 성곽 앞에 있는 노송 두 그루(우측 사진)와 성곽벽(우측 밑 사진)은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이다.

강화군청 문화관광과의 배흥규 관광기획팀장은 “세월이 변해도 포탄을 맞은 자연물이 그 당시를 대변해 주는 역사적 현장이 되고 있다. 이는 후손들에게 대대로 생생하게 전해질 것이며 현장을 방문하는 이들은 당시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은 우리 군인, 전쟁의 상흔을 직접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 말했다.

이에 “강화군에서는 계속 보존하기 위한 노력과 동시에 관광 상품화를 해나갈 것”이라면서 “국내뿐 아니라 여기서 전쟁을 치른 미국, 프랑스, 일본인 관광객 유치를 통해 우리 역사와 문화를 알리도록 할 것”이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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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서대문구청 문화체육과 관계자는 “독립문이 국가보존문화재로 등록돼 있어 구청은 관리만 하고 있는 입장”이라며 “독립문의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할 때 총탄흔적을 보존하는 게 의미가 있었는지, 또는 의미가 상당하다면 기술적으로 다시 되돌려 놓는 게 가능한지를 따져봐야 할 것 같다. 다만 구에서는 아직 이에 대해 고민하고 있지 않다”고 강화군과는 대조적 입장을 보였다.

정성길 관장은 “독립문과 영은문 기둥에 있던 총탄 흔적을 그대로 뒀다면 독립문을 통해서도 6.25전쟁의 상흔까지 느낄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무식한 행정처리로 인해 독립문은 이제 역사의식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상누각에 불과해졌다”고 탄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