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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대통령

이승만 이야기1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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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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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승만과 프란체스카(1933) 2. 한성감옥에 수감 중이었을 때 이승만(맨 왼쪽) 3. 김규식과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그를 긍정하는 사람은 긍정하나, 싫어하고 부정하는 사람은 아주 싫어하고 부정한다. 이 양극단 속에서도 분명한 사실은 그를 빼놓고 대한민국 역사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제헌국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제헌국회를 이끌며 대한민국 헌법제정을 주도했다. 제헌국회의 다수가 의원내각제를 선호했으나 그의 강력한 주장으로 대통령제를 채택했다. 헌법, 민주주의, 대통령제, 반소련, 반공산주의, 자유경제 등 대한민국의 골격과 방향이 그에 의해 결정되다시피 했다.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음력 2월 19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에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 늦둥이 5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양녕대군 후손이나 완전히 몰락한 상태였다.

아버지 이경선은 다시 집안을 일으켜 세운다며 풍수지리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여 어머니의 삯바느질과 친척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었다.

1877년 만 2살 때 서울로 이사와 남대문 주변염동, 낙동(1881), 도동(1994)에서 살았다. 한때 창신동에도 살았는데 제적부 주소가 창신동 ‘625’번지인 것을 보면서, 그의 생애의 가장 큰 도전이었던 6·25 전쟁을 떠올려 본다.

어려서부터 집중력이 뛰어났으며 친척이 하는 서당에 다녔다. 12살(1887) 때부터 19살(1894) 과거시험이 폐지될 때까지 매년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을 거듭했다. 과거길이 막히자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우며 정치적 자유주의 사상과 기독교를 접했다.

1898년 23살 때 독립협회의 연사로 만민공동회의 대중 앞에서 연설했다. 청년 개혁가 이승만은 절대군주의 꿈을 갖고 정국 주도권은 놓고 싶어 하지 않았던 광무(고종) 황제와 대치하며 42일 동안이나 철야시위를 이끈 끝에 황제를 굴복시키고 의회 설립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고종이 기피하는 박영효를 독립협회가 개혁정부 각료로 추천하자 고종은 독립협회와 갓 설립된 의회(중추원)를 폐쇄하고 이승만 등을 투옥했다. 이승만은 어설프게 탈옥을 시도하다 붙잡혀 사형의 위기를 넘기고 무기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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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미국 침공을 예측한 이승만의 저서 <일본 내막기(1941. 6)>
 

미국 선교사들은 유능한 목사의 완벽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 이승만을 위해 적극적으로 석방운동을 폈다. 그런 여러 도움 덕분에 감옥안에서도 도서실을 차리고 비교적 자유롭게 신문에 논설을 기고했으며, 집필과 독서, 영어에 능통하게 되었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40여명의 죄수와 심지어 옥리까지 개종시키며 평생의 동지들을 얻었다. 1904년 2월 이승만은 감옥 안에서 러일전쟁 발발 소식을 듣자 망국의 위기감을 느끼고 입헌정치를 주장하는 <독립정신>을 저술했다.

1904년 8월 9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도움으로 5년 7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는 잠시 YMCA에 관여하다 11월 4일 유학과 민영환 등의 밀사 임무를 띠고 미국으로 떠났다. 1905년 2월 이승만은 30세 나이에 미국 상원의원 딘스모어(Hugh A. Dinsmore), 국무장관 헤이(John Milton Hay), 8월 4일에는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면담함으로써 국내외에 전설이 되기 시작했다.

1905년 2월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여 2년 만에 학사학위, 그 후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1910년 3월)와 거의 동시에 프린스턴 대학의 박사학위(1910년 7월)를 받았다. 12년 걸릴 학위과정을 5년 반 만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 파송될 선교사 겸 교역자로 특별히 허락된 것이었다. 그는 졸업식에서 나중에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총장에게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19년 10월 귀국한 이승만은 1년 반 가량 YMCA에서 종교, 교육활동을 하다 1912년 3월 105인 사건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경성감옥 동지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정착했다. 그는 감리교 부속 한인 중앙학원장으로 재직하면서 한인기독교회를 창설하였으며 <태평양 잡지>를 창간했고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하여 숯 사업도 했다.

1919년 1월 18일부터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이승만, 민찬호 목사, 정한경을 파리에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여권을 얻을 수 없어서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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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맥아더 장군(1948. 8. 15정부수립기념식장에서),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취임식(가운데가 이승만,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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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이 일어나면서 각지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은 3월 21일 러시아령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고, 4월 11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혹은 집정관 총재)로, 4월 23일 경성의 한성 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었다. 4월 13~15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 자유대회에 참석하여 이승만은 “한국이 독립하면 기독교 국가 건설과 미국식 민주제를 시
행하겠다.”고 연설했다.

1919년 9월 각지의 임시정부가 통합되면서 이승만은 상해의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에 뽑혔지만 이승만은 미국에 머물며 1920년 6월까지 ‘대한공화국’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는 강연, 홍보 활동을 하고 다녔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의 부임을 여러 차례 촉구했다. 1920년 12월 이승만은 상해로 왔다. 이승만은 사회주의 계열의 이동휘·여운형 등과 대립했다.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외교와 실력양성에 기초를 두었다. 그는 한국이 일본과 전면적인 전쟁을 통해 승리할 수 있는 물리력과 실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으로 독립달성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실력을 갖출 때까지 준비를 하며, 미국과 일본 간 전쟁이 날 때를 기다려야 하며, 그전까지는 미국 정부와 의회에 대한 청원과 여론을 향한 선전외교에 치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무장독립전쟁과 의열투쟁에 부정적이었다.

이승만의 외교는 미국의 이해에 기초하여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도록 하는 데 두었다. 그리하여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은 정한경과 “연합국 측이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조건 하에” 한반도를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두고 일본으로부터 독립시켜 중립적 상업지역화하여 완충국으로 만들 것을 청원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3월 3일에 발송했다. 이 문서를 발송한 후 3월 9일경 미국에 3·1운동 소식이 전해졌다. 이승만과 정한경은 위임통치청원서를 언론에 공개했다. 3·1운동으로 독립의식이 크게 고조된 상황에서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은 상해의 신채호 등으로부터 극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위임통 치청원 문제는 미국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문제 등과 함께 1925년 3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탄핵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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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대 졸업 이승만(1910)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 이후, 이승만은 구미외교위원부 이름으로 활동했다. 임시정부는 구미외교위원부 폐지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무시하였으며, 임정으로 보내는 송금줄을 차단했다.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그러는 동안 임시정부 내에 이승만 비판세력도 떨어져 나갔다.

1932년 11월 10일,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했다. 그는 1933년 1월 26일 제네바에 도착하여 국제연맹에 대한독립청원서(大韓獨立請願書)를 제출하였다. 그가 제네바에 머물던 2월 21일 호텔 드뤼시 식당에서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를 만났다. 그녀는 비엔나대학 어학 박사로서 통역겸 준외교관으로 국제연맹에 근무하고 있었다. 이듬해 두 사람은 뉴욕에서 결혼하고 하와이에 정착하였다.

1941년 6월 이승만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이승만은 향후 미국은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될 것을 예견했다. 처음엔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 책은 발간 6개월 후인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국과 일본이 전쟁 상태에 돌입하자 이승만은 위임통치론을 접고, 임시정부 승인 운동에 주력했다. 그는 일본의 패배를 예견하고 소련이 장차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고 미국에 경고하며, 반소전선 구축과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했다. 1944년 6~7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VOA)’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였다. 경성방송국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을 통해 일제가 밀리고 있다는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퍼지게 되었다.

1942년 9월과 10월 이승만은 미국 육군전략 사무처(OSS, CIA의 전신)에 항일 게릴라 조직을 제의하여 12명의 한인이 선발돼 12월부터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이승만은 만약 미국정부가 임정을 승인하지 않으면, 전후 한반도에 친소련 공산정권이수립될 것임을 거듭 경고하였다. 미국무성은 임시정부의 승인을 강력히 반대하였고,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약속한 한국의 독립을 번복하고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스탈린과 한국의 신탁통치를 합의하였다.

일본이 항복하자 이승만은 즉시 귀국하려 하였으나 이승만을 기피인물로 여기는 미국 국무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아 2개월이나 발이 묶여 있었다. 이승만은 도쿄를 거쳐 미국 군용기를 이용하여 10월 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귀국 다음날인 1945년 10월 17일 오전 10시 존 하지의 안내로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저녁 8시 30분에는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첫 방송연설을 했다. 요지는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
지면 죽습니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