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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한 마리가

전쟁을 일으켰다?


글. 신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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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 북서부 오리건 지역은 미국과 영국의 오랜 분쟁지역이었다. 1818년 두 나라의 공동 영토로 인정되었지만,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가 열려 개척민들이 늘어나면서 영유권에 대한 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은 1846년 6월 15일 ‘오리건 조약’을 맺었다. 북위 49도선을 미국과 영국령 캐나다의 국경으로 삼기로 합의한 것이다. 49도선은 벤쿠버 섬을 가로지르지만, 이 섬은 영국령에 두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는 미국의 워싱턴 주와 영국령 벤쿠버 섬 사이에 있는 산 후안 군도의 산 후안 섬이었다. 이 섬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 결정하지 않고 협상을 마무리했다.

이 섬이 문제가 된 것은 오리건 조약을 맺은 지 13년이 지난 1859년 6월이었다. 돼지 한 마리 때문에 미국과 영국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산 후안 섬에는 미국인 농부 라이먼 커틀러를 비롯한 개척민들이 이주하여 농사를 짓고 있었다. 6월 15일 라이먼 커틀러는 자기 밭에 들렀다가 분통을 터뜨렸다. 돼지들이 몰려와서 감자를 파먹어 밭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놈의 돼지들이….”

라이먼 커틀러는 갖고 있던 총으로 돼지 한 마리를 쏘아 죽였다. 돼지들은 총소리에 놀라 농장 쪽으로 달아났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자기가 쏘아 죽인 돼지는 영국계 회사 허드슨 베이의 농장 소유였다. 이 농장에서는 수천 마리의 양과 돼지를 기르고 있었다. 그런데 돼지들은 틈만 나면 미국 개척민들의 밭으로 내려와 농작물을 먹어치웠다. 라이먼 커틀러는 이런 일이 반복되자 화가 치밀어 돼지를 쏘아 죽였던 것이다.

그는 농장을 찾아가서 사과하고 돼지 값을 배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돼지 값은 10달러를 드리면 되겠죠?”

농장 직원 찰스 그리핀은 무슨 소리냐는 듯 눈꼬리가 올라갔다.

“10달러라니? 우리 농장 돼지가 싸구려인 줄 아시오? 100달러는 내놓으셔야지.”

“뭐라고? 돼지 한 마리 값이 100달러라고? 말도 안 돼!”

“돼지 값을 물어주지 않으면 감옥에 처넣어야겠군.”

찰스 그리핀이 이렇게 위협하자 라이먼 커틀리는 미국 개척민들과 의논하여, 미국 워싱턴 주정부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이에 주 정부 당국은 1개 중대 병력인 병사 66명을 보내 주었다. 무장한 미군 병사들이 산 후안 섬으로 진주해 오자, 영국령 벤쿠버 섬의 총독도 가만있지 않았다. 영국 군함 세 척을 산 후안 섬으로 파견한 것이다. 이리하여 돼지 한 마리 때문에 두 나라 군대가 주둔하여 전쟁 직전까지 가는 긴박한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은 영국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영국도 같은 뜻이라서 두 나라는 특사를 보내 긴급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섬에는 서로 최소 병력만 남기고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두 나라 병사들이 작은 섬에서 대치하는 ‘돼지 전쟁’은 12년 동안 이어졌다. 그러다가 독일 황제 빌헬름 1세의 중재로 두 나라 병사들이 철수하고, 섬을 미국령으로 인정함으로써 ‘돼지 전쟁’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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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와 불가리아는 개 한 마리 때문에 전쟁을 했다면서요?”



1925년 10월 19일 그리스와 불가리아의 국경 지대인 데미카프에서 두 나라 국경 경비대 병사들끼리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의 시작은 개 한 마리 때문이었다. 그리스군 병사 하나가 잃어버린 개를 찾아 국경을 넘었는데, 불가리아 군 병사들이 이 그리스군 병사를 사살한 것이다. 분노한 그리스군 병사들이 불가리아군 병사들을 공격해 50여 명을 쏘아 죽였다.

불가리아군 병사들은 복수를 다짐하며 그리스군 부대를 습격했다. 그리하여 국경 경비대 끼리의 전투는 대규모 전투로 확대되었다.

10월 22일 국제연맹이 중재에 나섰다. 긴급 이사회가 열려 “두 나라 군대는 전투를 중단하고 철수하라”고 결의했다. 그리스와 불가리아 정부가 이 결의를 받아들여 바로 전쟁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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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보이들의 소떼 몰이


카우보이는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에 말을 타고 다니며 소떼를 관리하던 사람이다. 소를 다룰 때에 막대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카우펀처’ 또는 ‘카우포크’라고도 불렀다.

카우보이는 말을 잘 타고 올가미 던지기를 잘했다. 그들은 말안장에 반드시 밧줄을 갖고 다녔는데, 카우보이라면 달리는 동물의 발·목·머리에 올가미 밧줄을 정확하게 던질 줄 알아야 했다.

카우보이에게는 카우보이 복장이 따로 있었다. 그들은 ‘카우보이 모자’로 불리는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카우보이 부츠’로 불리는 뒷굽 높은 가죽 부츠를 신었다. 셔츠와 가죽조끼, 바지를 입었다. 진 바지는 착용감이 좋고 실용적이어서 세계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의 평상복으로 크게 유행했다.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 텍사스의 초원지대에는 ‘롱혼’이라는 긴뿔소가 500만 마리나 있었다. 이 소들은 에스파냐 사람들이 18세기에 들여왔는데, 그 가운데 4분의 1이 야생으로 자라고 있었다. 소떼를 돌보던 텍사스의 젊은이들이 남북전쟁으로 전쟁터로 나간 사이, 소들은 자연 번식하며 무리를 지어 살아가고 있었다.

그 무렵 북부나 동부에서는 소 한 마리 값이 50~80달러인 데 비해 텍사스에서는 3~4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목축업자들은 텍사스의 소떼를 몰아 북부나 동부로 데려간다면 큰돈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우보이들을 동원하여 철도가 있는 북부까지 소떼를 몰고 가는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북부에서는 소들을 도살하여 그 고기를 기차에 실어 동부로 가져갔다.


카우보이들은 한 번에 보통 1000~3000마리의 소를 기차역이 있는 북부까지 몰고 갔다.

10~20명의 카우보이들은 줄지어 가는 소떼를 따라가며 중간 중간에서 소들을 통제했다. 텍사스에서 출발하여 1200킬로미터를 가는 그 여정은 한 달쯤 걸렸다. 하루에 30~40킬로미터 쯤 이동했다.

서부 영화에는 카우보이들의 생활이 낭만적으로 그려져 있지만, 실제로 그 여정은 고달프고 힘들었다. 한 달 내내 담요를 깔고 한뎃잠을 자야 했으며, 야생 동물이나 인디언의 습격을 막아내야 했다. 소떼에게 먹일 풀과 물을 찾아 황무지를 며칠씩 헤매는가 하면, 좋은 초지를 놓고 다른 소떼 무리의 카우보이들과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때로는 소떼가 천둥소리에 놀라 다투어 달아날 때는, 카우보이들이 소 발굽에 밟혀 죽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소떼를 진정시키려고 소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1860년대에 소떼 몰이에 나선 카우보이들은 3만 5000천 명쯤 되었다. 그 가운데 3분의 1이 흑인과 멕시코 인이었으며 인디언들도 상당수 있었다.

카우보이들의 소떼 몰이는 1887년까지 20여 년 동안 이루어졌다. 1890년에 이르러서는 목장에 울타리가 생겨, 북부의 초원지대에서도 소들을 키웠기 때문에 소떼 몰이가 필요 없게 되었다.

그 뒤부터 카우보이들은 목장에 정착하여 목장 일만 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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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보이들에게도 총은 필수품이었다면서요?”


카우보이들은 소떼 몰이를 하기 때문에 인디언이나 맹수로부터 소떼를 지키고 신변 보호를 위해 총이 꼭 필요했다. 그래서 늘 총을 차고 다녔다.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총은 6연발 콜트 권총이나 윈체스터 장총이었다.

소떼 몰이 종착지인 캔자스의 에버린, 엘스워스, 뉴톤, 다지 시 등은 ‘카우 타운(소의 거리)’이라고 불리었다. 그런데 카우보이들이 이곳에 도착하면 해방감에 젖어 술을 마시기 때문에 총격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사람들끼리 시비가 붙어 다투다 보면 결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카우 타운에는 ‘장화가 쌓인 언덕’이란 뜻인 ‘부츠 힐’이란 공동묘지가 있었다. 결투를 하다 죽으면 장화를 신은 채 이 묘지에 묻혔는데, 그런 사람이 하도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서부 개척시대인 1866년부터 1900년까지 총격 사고로 죽은 사람이 2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 수치만 보더라도 그 시대가 얼마나 무법 천지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