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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전 때

전공을 세운

통신 비둘기들


글. 신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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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만큼 사람과 친근한 새가 또 있을까? 비둘기는 오랜 옛날부터 사람과 가까이 지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에 비둘기가 등장한다. 40일 동안 방주에 갇혀 있던 노아는 물이 줄면서 땅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비둘기를 날려 보낸다. 그때 비둘기는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돌아오는데, 노아는 그것을 보고 땅에 물이 빠졌음을 알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서양에서는 ‘평화를 사랑하는 정결한 새’라고 하여 비둘기에 대한 이미지가 정말 좋다. 악마가 변신 못하는 것이 비둘기와 어린양 두 가지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비둘기는 먼 거리를 날아갈 수 있고, 자기 집을 찾아오는 뛰어난 귀소 본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오랜 옛날부터 비둘기는 빠르고 정확한 통신 수단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비둘기 통신은 기원전 3000년경 이집트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고대 이집트 왕실에서는 사람들이 찾아가기 힘든 먼 곳까지 비둘기를 보내 소식을 전했다.

894년 이슬람의 튀니지에서도 비둘기 통신이 사용되었다. 아를라비데스 최고 실력자인 이브라힘은 튀니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정부군을 보내 이를 평정하게 했다. 정부군은 반군을 물리치자 이 기쁜 소식을 이브라힘에게 빨리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비둘기 통신으로 수도 알카 이라완에 있던 이브라힘에게 승전보를 전했다.

1150년부터는 바그다드의 슐탄 황제가 비둘기를 이용한 우편 제도를 시행했으며, 칭기즈칸의 유럽 대원정에도 비둘기를 자기네 나라 왕궁에 보내 승전보를 전하는 데 썼다. 그리고 유럽의 열강들이 해외 식민지를 얻으려고 다툴 때도 비둘기는 본국과의 통신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비둘기 통신이 위력을 발휘한 것은 제1・2차 세계 대전 당시였다. 미국・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벨기에 등 전쟁에 참여한 나라들은 모두 비둘기 부대를 두었다. 군대의 비둘기 훈련소에서 비둘기를 훈련시켜 전쟁에 투입했다. 이들 비둘기들은 태어난 지 28일이 되면 훈련을 받기 시작해 아군과 적군을 가려내어 메시지를 정확히 전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영국의 비둘기 부대장이었던 오스만 대령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즈음엔 “150개의 비둘기 부대가 있었다. 비둘기들은 둥지가 어디에 있든 어김없이 찾아왔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비둘기 부대에는 비둘기 집을 싣고 다니는 차나 비둘기 집을 등에 지고 다니는 통신병이 있었다. 군대의 진격과 후퇴 때 사용된 이동식 비둘기 둥지에는 비둘기를 위한 물과 먹이통, 쉴 수 있는 횃대와 목욕통까지 갖추고 있었다.

통신 비둘기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지원군을 보내 달라는 메시지를 정확히 전해 곤경에 빠진 미군의 한 소대를 구했는가 하면, 미군이 독일군을 무찌를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를 알려 주기도 했다. 이런 공로로 비둘기들은 미국・프랑스・영국 등이 주는 빅토리아 십자 훈장・레지옹 도뇌르 훈장 등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 조종사들은 독일로 출격할 때 비행기에 비둘기를 태웠다. 그리고 독일의 공격으로 비행기가 격추되었을 때 살아남은 조종사들은 현 위치를 적은 쪽지를 비둘기 다리에 매달아, 비둘기를 자기네 비행 기지로 날려 보냈다. 그들은 임무를 훌륭히 완수한 비둘기들 덕에 곧 구조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미국 해군은 바다에서 실종 선원들을 찾는 데도 비둘기를 이용했다. 비둘기들은 시력이 좋아 멀리 있는 오렌지색 구명보트를 사람들보다 쉽게 찾아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도 수백 마리의 비둘기들을 훈련시켰다. 그리하여 영국에 잠입한 스파이들에게 날려 보내 비밀문서를 전했다.

영국 첩보부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송골매 부대를 만들어 비둘기들을 공격했다. 특수 훈련을 받은 송골매들은 비둘기들을 격퇴했고, 산 채로 잡힌 비둘기들은 전쟁 포로로 대우했다. 이 작전으로 영국 첩보부는 영국에 침투한 독일 스파이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십자군 전쟁 때 이슬람군은 어떻게 비둘기 한 마리로
성을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나요?”


이슬람 세력에 빼앗긴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십자군을 결성한 것은 1096년이었다. 십자군은 1291년까지 200년 동안 모두 여덟 차례에 걸쳐 원정을 떠나 이슬람군과 전쟁을 벌였다.

1271년 8차 원정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십자군에게는 시리아 사막의 암산 꼭대기에 끄락 데 슈발리에 성이 있었다. 이 성은 십자군의 기사들이 튼튼하게 쌓은 성이었다. 150여 년 동안 이슬람군이 수없이 공격을 해 왔지만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성은 아무도 넘보지 못할 견고한 요새인데다, 포위를 당해도 2000여 명의 병사가 일 년 이상 버틸 수 있는 물과 식량을 갖춰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십자군을 물리친 이슬람군의 영웅 살라딘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군대를 철수했다고 한다.

1271년 이집트군 병사들을 지휘하는 바이바르스 왕이 끄락 데 슈발리에 성을 함락시키려고 군대를 이끌고 왔다. 그는 십자군이 차지한 땅과 성들을 잇달아 점령한 이슬람군의 명장이었다.

바이바르스 왕은 성안에 있는 십자군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그때는 십자군 전쟁의 마지막 시기로, 십자군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병력이 부족하여 용병을 쓰고 있었지만, 적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전력이 약했다. 적군의 대규모 공격을 당해도 지원군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바이바르스 왕은 성안의 사정을 꿰뚫어보고 가짜 편지 한 통을 썼다.

“지원군을 보낼 수 없으니 적군에게 항복하라.” 트리폴리의 호스피탈기 사단장의 이름으로 쓴 가짜 편지였다.

바이바르스 왕은 이 편지를 비둘기를 통해 성안으로 보냈다. 성안에 있는 십자군은 이 편지에 속아 이슬람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슬람군은 비둘기를 써서 가짜 편지를 보내 난공불락의 성을 쉽게 함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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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해 주인을 찾아온 개, 보비


보비는 스코치 콜리 종의 개다. 1924년 미국 인디애나 주에서 오리건 주까지 직선거리 3300킬로미터, 북아메리카 대륙의 4분의 3을 횡단해 주인을 찾아와서 유명해졌다. 직선거리 3300킬로미터이지만 우회 거리 4000킬로미터로 세계 최고의 귀가 기록을 세웠다.

보비는 오리건 주의 실버스톤 마을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프 레이저 부부가 기르던 개였다. 당시 2년 6개월 된 수컷으로 어릴 때부터 고집이 세고 장난이 심했다. 나무뿌리를 물어뜯다가 앞니 세 개가 빠지는가 하면, 말에게 덤벼들었다가 발에 차여 오른쪽 눈에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이 상처 자국 때문에 누구나 보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보비에게 주인과 헤어지는 불행이 닥친 것은 1923년 여름이었다. 프레이저 부부는 자동차에 보비를 태우고 여름휴가를 떠나 8월 16일 인디애나 주의 올코트에 이르렀다. 그런데 프레이 저가 차를 세워 길가로 뛰쳐나간 보비는 운 나쁘게도 그 동네 사나운 개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개들은 보비에게 덤벼들었고, 보비는 정신없이 도망치는 바람에 주인과 헤어지고 말았다.

보비를 사랑했던 프레이저 부부는 밤새도록 보비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보비를 찾지 못하자 다음 날 보비를 찾는 신문 광고까지 냈다. 그러나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비를 찾을 수 없었다.

이튿날 프레이저 부부는 보비 찾는 일을 그만두고 올코트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로부터 반년이 지난 1924년 2월 15일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깡마른 개가 실버스톤 마을로 나타났다. 이 개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프레이저 부부의 카페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프레이저 부부의 딸은 첫눈에 개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보비!”

프레이저 부부가 반년 전에 잃어버린 개가 북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해 주인을 찾아온 것이었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길도 모르는 개가 어떻게 그 먼 거리를 돌아올 수 있었지?” 이렇게 말하며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때 그 지역에 있는 ‘인도 협회’라는 사회단체에서 보비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인디애나 주에서 오리건 주까지 보비가 거쳐 왔을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 보비를 본 적이 있는지 수소문한 것이었다. 보비에게는 오른쪽 눈에 큰 상처 자국이 있다면서……. 그러자 보비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편지가 인도 협회로 날아들었다. 그 가운데는 보비를 집에 데려가 먹여 주고 치료해 주었다는 사연도 있었다.

인도 협회는 보비를 보았다는 목격담과 여러 사연을 모아 검토한 결과 보비가 어떻게 10만 리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 밝혀 낼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보비는 처음에 올코트에 있었다. 개들에게 쫓겨 길을 잃고 헤매다가 나흘 만에 주인의 자동차가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주인이 집으로 떠난 뒤였다.


보비는 주인을 만나지 못하자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일리노이 주・위스콘신 주를 지나 석 달 만에 아이오와 주 데모인까지 640킬로미터를 걸어왔다. 그때가 11월 중순으로, 그 뒤부터는 매우 빨라져 12월 초 데모인에서 960킬로미터 떨어진 콜로라도 주 덴버에 도착했다.

덴버에서 보비를 만나 집에 데려갔던 사람은 인도 협회에 보낸 편지에서 당시의 보비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12월 초의 어느 날 매우 지쳐 보이는 개를 집에 데리고 왔어요. 먹이도 주고 편히 쉬게 하려고요. 저는 개가 온순하여 마음에 들었거든요. 이왕이면 집에서 키우고 싶었어요.

그러나 개는 허겁지겁 식사를 마치자마자 절름절름 문 앞으로 가서 문틈으로 코끝을 내밀었어요. 개는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제가 문을 열어 주자 얼른 밖으로 나가 서쪽을 향해 걸어가더군요.

보비는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 들어갈 때는 미즈리 강을 헤엄쳐 800미터 거리를 건넜다. 강에 다리가 있었지만 초소의 경비원이 막아 다리를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비는 와이오밍 주에 와서는 양치는 목동과 잠시 살았다. 그리고 로키 산맥을 넘을 때는 늑대를 잡는 함정에 빠져 사냥꾼에게 붙잡혀 한동안 사냥꾼의 집에서 지냈다.

보비는 로키 산맥을 넘어 아이다호 주의 고원을 지난 뒤 오리건 주에 이르렀다. 거기서 서쪽으로 480킬로미터를 걸어 고향인 실버스톤 마을에서 110킬로미터쯤 떨어진 포틀랜드에 도착했다. 이때가 2월 초였다.

눈이 내리는 어느 날 밤, 포틀랜드에 사는 메리 부인은 거리에서 눈이 충혈된 굶주린 개를 발견했다. 발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메리 부인은 개가 불쌍하여 집에 데려다 빵을 먹이고 발을 치료해 주었다. 메리 부인이 전하기로 “개는 빵으로 배를 채운 뒤 죽은 듯 꼼짝 않고 6시간 동안 잠만 잤다”고 한다.

그렇게 메리 부인의 집에서 쉬며 기운을 차린 보비는 마지막 힘을 내어, 실버스톤 마을까지 부지런히 걸어갔다. 그리고 2주일 만에 마침내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보비의 귀환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자 미국 국민들은 모두가 감동하고 열광했다. 보비를 보고싶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전국 순회를 했는데, 미국 대통령 선거 유세 때보다 더 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포틀랜드 집회 때는 단상에 있던 보비가 갑자기 뛰어내려 군중 속으로 달려갔다. 보비는 메리부인을 알아보고 그 품에 안겼다. 너무도 기쁘고 감격스러웠는지 꼬리를 흔들며 코 울음을 울었다. 보비는 자기를 먹여 주고 치료해 주었던 할머니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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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때도 이탈리아 밀라노로
주인을 찾아온 개가 있었다면서요?”


1812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원정에 나섰을 때의 일이다. 나폴레옹 군에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온 병사가 있었다. 그는 ‘모피노’라는 이름의 푸들 종 개를 데리고 전쟁터로 떠났다.

병사는 러시아로 진격하다가 민스크 동쪽 70킬로미터에 있는 베레시나 강에서 모피노와 헤어지고 말았다. 강을 건너다가 얼음이 갈라져 서로 다른 곳으로 간 것이다.

전쟁은 나폴레옹 군의 패배로 끝났지만, 병사는 운 좋게도 살아남아 고향인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이 흐른 뒤,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모피노가 나타났다. 주인은 처음에 개를 알아보지 못해 쫓으려고 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모피노였다.

“모피노!”

주인이 큰 소리로 부르자. 모피노는 너무 반가워 주인에게 뛰어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기운이 없어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모피노는 러시아에서 이탈리아 밀라노까지 2200킬로미터를 걸어왔다. 러시아에서 독일 뮌헨을 거쳐 유럽의 반 이상을 걸어 주인을 찾아온 것이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는 주인을 찾아온 개 모피노의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