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 | GEULMARU

로그인 회원가입 즐겨찾기추가하기 시작페이지로
글마루 로고


 

사람보다 먼저

우주를 비행한 개들


글. 신현배


01.jpg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우주로 쏘아 올렸다. 무게 83.6킬로그램, 지름 58센티미터인 이 작은 인공위성은 시속 2만 8800킬로미터로 96.2분마다 지구 주위를 한 바퀴씩 돌았다.

우주 시대를 활짝 연 소련의 인류 최초 인공위성 발사 성공은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미국은 소련을 자기 나라보다 몇 백 년은 뒤진 후진국으로 생각했다. 그런 소련이 인공위성 발사로 미국의 자만심을 무너뜨렸으니 ‘스푸트니크 충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소련은 한 달도 못 되어 또 한 번 미국을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이번에는 스푸트니크 1호보다 훨씬 큰 무게 508.4킬로그램인 스푸트니크 2호를 우주로 쏘아 올린 것이다. 1957년 11월 3일의 일이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이 인공위성 안에 ‘라이카’라는 이름의 개가 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라이카’는 러시아 말로 ‘짖는 개’라는 뜻이다. 라이카는 사상 최초로 우주를 비행한 생명체로 역사에 남았다.

그러나 라이카는 끝내 지구로 돌아오지 못했다. 스푸트니크 2호가 우주 공간에서 불에 타 없어졌기 때문이다. 45년 뒤인 2002년에 밝혀졌지만, 라이카는 인공위성이 발사된 지 몇 시간 만에 가속도와 고온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 하지만 라이카는 이 실험을 통해 생명체가 우주에서 무중력 상태로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물론 장차 사람이 우주여행을 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소련은 이 실험을 위해 라이카・스트렐카・벨카 등 아홉 마리의 암컷 개를 우주견 후보로 뽑았다.

이들도 사람처럼 우주복에 산소 흡입 마스크를 쓰고 일 년 동안 우주 비행사 훈련을 받았다. 라이카가 첫 번째 우주견으로 선발되어 인공위성을 타고 우주로 나간 것이다.

그런데 이 개들은 주인에게 버림받아 모스크바 시내를 헤매며 쓰레기통이나 뒤지던 유기견이었다.

인간세상의 밑바닥을 전전하던 개들이 인공위성을 타고 우주를 비행한 것이다.

1960년 8월 19일 발사된 스푸트니크 5호에는 라이카의 훈련 동기인 스트렐카와 벨카를 함께 태웠다. 이 개들은 지구 주위를 17바퀴나 돌고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이 인공위성에는 이 두 마리의 개뿐만 아니라 토끼 2마리, 어른 쥐 2마리, 새끼 쥐 40마리 등도 타고 있었다. 이 동물들도 대부분 살아 돌아왔다.

우주 동물 실험은 소련의 유인 우주선 개발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1961년 4월 12일 소련은 마침내 세계 최초의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우주로 쏘아 올렸다. 그리하여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02.jpg
 



“미국 최초로 우주여행을 한 동물은 침팬지였다면서요?”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우주로 쏘아 올리자, 미국도 서둘러 우주 개발에 나섰다. 1958년 미국 항공 우주국(NASA)을 만들고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 발사에 성공했다.

미국 최초로 우주여행을 한 영장류 동물은 ‘햄’이라는 침팬지였다. 1961년 1월 13일 햄은 머큐리 레드스톤 로켓을 타고 253킬로미터 상공까지 올라갔다. 6.6분간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고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미국 최초로 완전한 우주 비행을 한 동물은 ‘에노스’라는 침팬지였다. 에노스는 1961년 11월 29일 머큐리 아틀라스 로켓을 타고 지구 주위를 2바퀴 돌고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에노스의 시험 비행 덕분에 우주 비행사 존 글렌은 1962년 2월 20일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 프리덤 7호를 타고 미국 최초의 우주 비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03.jpg
 


중국인들을 괴롭힌 메뚜기 떼의 습격

1942년 중국 허난 성에는 대기근이 일어났다. 가뭄이 닥쳐 오랫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주민들은 양식이 떨어지자 풀뿌리를 캐먹으며 버티었다. 그러나 먹을 것은 더 이상 없었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갔다. 그해에 굶어 죽은 사람이 무려 300만 명에 이르렀다. 이 무서운 대기근을 피해 주민 수백만 명이 다른 성으로 피난을 떠났다.

지독한 가뭄과 함께 찾아온 것은 메뚜기 떼였다. 메뚜기 떼는 보통 가뭄과 더불어 찾아오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어디든지 메뚜기 떼가 지나가면 모든 것을 먹어치워 논밭이 황폐하게 변했다.

허난 성에도 예외가 없었다. 그해 가을에 하늘이 메뚜기 떼로 뒤덮여 마치 거대한 먹구름처럼 보였다. 해를 가려 금방 캄캄해졌고, 하늘에서 ‘쏴아!’ 소리가 나더니 메뚜기들이 논밭으로 날아들었다. 논밭은 순식간에 메뚜기 떼로 뒤덮였다. 메뚜기들은 벼・옥수수・수수・조 등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주위에 울려 퍼지는 것은 메뚜기들이 농작물을 갉아먹는 소리였다.

농부들은 메뚜기 떼의 습격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빗자루・몽둥이 등을 들고 논밭으로 뛰어들어 인정사정없이 메뚜기들을 내리쳤다. 그래도 메뚜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농작물을 갉아먹으며 자기들의 배를 채우기에 바빴다.

메뚜기들은 논밭의 곡식을 깡그리 먹어치우면 다른 논밭으로 옮겨갔다. 메뚜기들이 지나간 곳에는 농작물의 줄기만 앙상하게 남았다.

메뚜기 떼는 논밭만 휩쓸고 지나가지 않았다. 마을까지 찾아들어 집집마다 메뚜기들이 점령했다. 방은 물론 부엌까지 날아들었고, 불을 피운 아궁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메뚜기들은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며 침대・가구 등의 가재도구뿐만 아니라 집에서 모신 조상의 위패, 조왕신 족자까지 갉아먹었다.

메뚜기 떼의 습격은 중국에서 자주 겪는 재해였다. 송나라부터 청나라까지 1200년 동안 280차례 이상 일어났으니, 4~5년에 한 번꼴로 발생한 셈이었다.

가뭄과 메뚜기 떼의 재해가 일어나면 굶어 죽는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서기 550년 후경의 난 때 강회 지방에 대기근이 일어났는데, 가뭄과 메뚜기 떼의 피해로 굶어 죽은 사람들이 땅을 덮을 정도였다. 천 리를 가도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백골이 쌓여 언덕을 이루었다고 한다.

서기 194년에는 메뚜기 떼 피해가 얼마나 컸던지, 100여 일 동안 맞서 싸웠던 조조와 여포가 전쟁을 중단할 정도였다.


“메뚜기들은 왜 떼 지어 다니는 걸까요?”

메뚜기는 보통 자기 몸무게만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1㎢에 4~8천만 마리쯤 모이는 메뚜기 떼라면 하루에 250톤 되는 양을 먹어치울 수 있다. 그 정도라면 8만 명이 일정 기간 먹을 수 있는 양이라니, 메뚜기 떼가 지나가면 그 피해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메뚜기는 왜 떼 지어 다니는 걸까?

집단생활을 하는 군집성 메뚜기는 전 세계에 7종이 있다. 이들은 개별 생활을 하는 메뚜기보다 사납고 공격적이다. 먹이가 풍부하여 살기 좋은 철에는 흩어져 사는 메뚜기가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하지만 먹이가 부족하여 살기 어려운 철에는 메뚜기들이 호르몬 때문에 떼를 지어 모여 산다. 메뚜기들이 먹이가 모자라거나 비좁은 곳에 있으면 몸에서 신경 호르몬인 세로토닌이 많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결국 호르몬의 영향으로 메뚜기들은 저희들끼리 모여 먹이를 찾아다니며 집단생활을 하는 것이다.



06.jpg
신현배
시인, 역사 칼럼니스트
조선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창주문학상, 소천문학상 등 수상
지은 책으로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
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등과 시집 <매미가 벗어
놓은 여름>, <햇빛 잘잘 끓는 날>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