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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꾼 귀뚜라미와
인어의 전설

글. 신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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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귀뚜라미 싸움


중국 청나라 초기의 문인 포송령의 <요재지이>에 나오는 이야기다.

명나라 5대 황제 선덕제 때 황궁에서 귀뚜라미 싸움이 유행하여, 황제는 각 지방 장관에게 명하여 해마다 귀뚜라미를 바치도록 했다. 그리하여 전국에서 모인 싸움 잘하는 귀뚜라미들이 서로 대결을 펼쳐 챔피언을 가려냈다.

섬서성 화음현의 어느 현령이 바쳤던 귀뚜라미가 유독 싸움을 잘하자, 이 고을에서 해마다 귀뚜라미를 바
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러자 현령은 이정들에게 이 일을 맡겨 빨리 귀뚜라미를 바치라고 독촉했다.

이정 가운데 ‘성명’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귀뚜라미를 사서 바칠 돈이 없어 직접 귀뚜라미를 찾아 나섰
다. 그러던 중 용하다는 무당의 도움을 받아 몸집이 큰 귀뚜라미 한 마리를 잡았다.

성명은 매우 기뻐하며 귀뚜라미를 조롱에 넣어 집에 가져왔다. 그런데 성명의 아홉 살짜리 아들이 아버지 
몰래 귀뚜라미가 담긴 화분의 덮개를 열었다. 그 순간, 귀뚜라미가 펄쩍 뛰어 달아났고, 아들은 귀뚜라미를 손바닥으로 덮쳐잡았다. 하지만 너무 힘을 주어 귀뚜라미는 다리가 부러지고 내장이 터져 죽고 말았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야단맞을 것이 두려워 우물 속에 몸을 던졌다. 다행히 아들은 죽지 않고 살아났는데,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일 년이나 몸져눕는 신세가 되었다.

절망에 젖어 있던 성명은 어느 날 자기 집에서 귀뚜라미 한 마리를 잡았다. 이 귀뚜라미는 덩치가 작았지
만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화음현 대표로 황궁으로 들어가, 전국에서 모인 귀뚜라미들을 모조리 물리쳤다.

성명은 뛰어난 귀뚜라미를 바친 공으로 섬서성의 장관에게 큰 상을 받았다.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 1
만 지기가 넘는 땅과 대궐 같은 집을 지닌 부자가 되었다.

아들은 일 년 만에 정신이 들었는데, 놀라운 증언을 했다. 자신이 귀뚜라미로 변해 싸움을 잘하다가 이제
야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에 나와 있듯이 옛날 중국에서는 황궁에서 귀뚜라미 싸움을 벌였다. 명나라 5대 황제 선덕제는 
귀뚜라미 싸움을 좋아하여, 전국 각 지방 장관들에게 싸움 잘하는 귀뚜라미를 바치도록 했다. 그래서 이 귀뚜라미들을 화려한 칠보그릇에 넣어 기르다가, 귀뚜라미들끼리 싸움을 붙였다. 이 때 황제 자신은 물론 신하들에게까지 돈을 걸게 했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귀뚜라미 싸움을 좋아하여 옛날부터 전문 투기장에서 돈을 걸고 귀뚜라미끼리 싸움을 시
켰다. 큰 함지만한 양은 통이 전문 투기장인데, 통 한가운데를 판자로 막았다. 그리고 양쪽 공간에 귀뚜라미를 한 마리씩 넣었다. 싸움을 붙이려면 귀뚜라미의 몸을 건드려 약을 올려야 한다. 주인들은 말꼬리 붓이나 풀잎 또는 고양이 수염으로 귀뚜라미의 몸을 자극했다. 뒷다리, 몸통, 턱 순으로 간질이면 귀뚜라미는 흥분하여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 싸울 준비가 되었다고 여겨 심판이 “문을 열어라!” 하고 외쳤다. 그때 사람들이 통 한가운데를 막은 판자를 빼면 귀뚜라미들은 싸움을 시작했다.

귀뚜라미들의 싸움은 격렬하고 치열했다. 상대방의 머리를 물어뜯으며 공격하는데, 쫓고 쫓기는 싸움이 
5분여 동안 펼쳐졌다. 경기는 심판 판정으로 끝났는데, 판돈이 큰 경우에는 집 한 채 값을 날려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도 있었다.

귀뚜라미 싸움은 권투처럼 체급을 나누어 벌이기도 했다. 무적을 자랑하는 용맹스러운 귀뚜라미는 위대
한 전사로 추앙을 받았다. 죽었을 때는 은관이나 금관에 담아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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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귀뚜라미 싸움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중국 사람들은 옛날부터 동물 싸움을 좋아했다. 닭싸움인 투계, 개싸움인 투견, 양싸움인 투양, 소싸움인 투우 등을 일찍이 시작했다. 심지어 돈을 걸고 바퀴벌레끼리 싸움을 붙였으며, 위나라 황제인 문제는 호랑이 싸움인 투호를 즐겨 보았다고 한다.

귀뚜라미 싸움은 궁궐 여인들이 처음 시작했다. 궁궐 여인들은 우수를 불러일으키는 울음소리가 좋아 귀
뚜라미를 상자나 우리에 넣어 길렀다. 귀뚜라미가 담긴 상자나 우리를 베갯머리에 두고 밤마다 울음소리를 들었다.

궁궐 여인들은 귀뚜라미들이 성격이 거칠고 싸움을 잘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심심풀이로 귀뚜라
미끼리 싸움을 붙여 보았다. 이런 궁궐 여인들의 놀이가 궁궐 전체에 퍼져 누구나 즐기는 오락이 된 것이었다. 더욱이 귀뚜라미 싸움에 돈을 걸게 되어 이 싸움은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유행했다.

중국 궁궐에서 신하들은 이미 8세기경부터 귀뚜라미를 황금 우리에 넣어 길렀다고 한다. 귀뚜라미 싸움
은 15세기에 명나라 선덕제가 전국에 퍼뜨렸다. 그때는 궁궐에 전문 사육사가 있어 귀뚜라미들을 정성껏 돌보았다.



옛날에 인어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인어는 윗몸이 사람이고 아랫몸이 물고기인 반인반어다. 키는 1.3미터에서 1.6미터이고, 긴 머리칼은 녹색 또는 황색이다. 유럽에서는 안데르센의 동화 주인공 ‘인어공주’처럼 인어는 미인으로 알려져 있다. 달 밝은 밤에 강가나 바닷가에 나타나 한 손에는 거울, 다른 한 손에 빗을 든 채 머리를 빗는다.

음악을 좋아하여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잘 부르는데, 노래 소리에 이끌려 가까이 다가가면 노래 소
리가 바람 소리로 변해 버린다. 인어에게 매혹된 사람이 물속으로 끌려들어가거나 배가 침몰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인어가 실제로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인어에 관한 신화와 전설은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는 아름다운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하여 죽이는 인어 세이런이 나오는가 하면,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로 수컷 인어인 트리톤이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중국 신화에는 사람 얼굴에 물고기 몸을 지닌 능어, 교인 등의 인어가 나온다. 능어는 여자 무당이 타고 다녔는데, 몸집이 커서 배 한 척을 삼킬 수 있었다. 그리고 교인은 바다 속에 살면서 베틀에 앉아 옷감을 짰으며, 울기만 하면 그 눈물이 진주로 변했다고 한다.

인어가 상상의 동물이긴 하지만, 옛날에 인어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로마 함대 사령관 플리니우스
는 <박물지>라는 책에 에스파냐 남쪽 바닷가에서 인어가 목욕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고 적었다. 또한 그는 갈리아 지방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사관이 바닷가 해변에 밀려와 죽어 있는 많은 인어들을 보았다고 기록했다.

15세기경부터는 세계 곳곳에서 인어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수없이 나왔다. 1403년 네덜란드에서는 인어
가 붙잡혀 15년 동안 갇혀 살았는데, 양털을 잣거나 무릎 꿇고 기도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말은 하지 않았고, 여러 번 탈출했다가 붙잡히기도 했다.

사람들이 인어가 실제로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19세기까지도 가짜 인어를 만들어 파는 사기꾼들이 있었
다. 이들은 원숭이 윗몸을 물고기 아랫몸에 꿰매어 인어를 만들었다. 특히 일본 어민들이 가짜 인어를 만들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가짜 인어는 유럽으로 팔려가 박람회나 서커스단 등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현재 영국의 대영 박물관이나 
왕립 스코틀랜드 박물관에 인어 표본이 전시되어 있다. 일본 바닷가에서 잡은 인어 표본이라고 하지만, 과학자들은 원숭이 윗몸을 물고기 아랫몸에 꿰매어 만든 가짜 인어로 보고 있다.
인어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포유동물인 듀공이나 매너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바다소의 일종인 이들은 머리가 사람처럼 생기고 새끼를 안고 젖을 먹여 인어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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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는 왜 인어 상이 많을까요?”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는 인어를 상징물로 삼아 인어 상을 세워 놓은 도시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바르샤바에는 현재 바르샤바를 대표하는 두 개의 인어 상이 있다. 비스와 강가에 있는 은빛 인어 상과 구
시가지 광장에 있는 시레나 인어 상이다. 바르샤바에서는 그 밖에도 옛 건물이나 버스, 전차 등에서 인어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3세기에 바르샤바가 도시로 건설되고, 14세기부터 여러 제후 령의 중심 도시가 되면서 이곳에 인어 상이 세워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1596년 크루쿠프의 큰 화재로 인해 폴란드의 수도가 바르샤바로 바뀌면서는 더 많은 인어 상이 만들어졌다.

바르샤바에 이처럼 인어 상이 많은 것은 인어가 바르샤바의 상징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어는 바르샤바의 유래와 관련된 신화에 빠짐없이 나온다.

그 신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바르나바 사제와 두 어부가 인어를 사로잡은 이야기다. 이 신화에서 헛간에 갇힌 인어는 목동 스타쉑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 뒤 비스와 강물 속으로 뛰어들기 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이렇게 예언한다.

“먼 훗날, 당신들한테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 찾아오리라. (중략) 그 고난과 역경의 시절에 비스와 강은 당신들의 후손들에게 희망과 승리를 북돋우는 노래를 불러 주리라.”

이 예언대로 수백 년 뒤 그 마을에 큰 도시(바르샤바)가 생긴 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 찾아왔다. 1795년에는 폴란드가 프로이센에게 넘어가 1918년 공화국으로 독립할 때까지 유럽 지도에서 사라지는가 하면, 1939년 독일군의 포위를 받아 시가지가 파괴되기 시작하여 1944년 시내 건물의 80퍼센트 이상이 파괴되는 참변을 겪었다. 하지만 이런 고난과 역경의 시절에도 바르샤바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1945년부터 도시 재건을 시작하여 1988년 마침내 폐허가 되기 전의 모습으로 바르샤바를 복원시켰다.

인어에 얽힌 두 번째 신화는 비스와 강에서 어부 노릇을 하는 바르와 샤바 부부 이야기다. 어느 날 바르는 강에서 고기를 잡다가 샤바라는 인어를 낚는다. 샤바의 아름다움에 반한 바르는 샤바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다. 하지만 고향을 잊지 못한 샤바는 결국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강물 속으로 떠나 버린다. 이렇게 해서 두 부부가 살던 마을은 남편과 아내의 이름을 따서 ‘바르샤바’로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