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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

그 일그러진 시간들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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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 1일 헤이그 주재 일본공사가 일본 외무성 앞으로 긴급 전문을 보냈다.

“한국 황제의 밀사를 자처하는 한국인 3명이 헤이그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을 요구하면서 ‘1905년에 일본과 맺은 보호조약은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니며 따라서 무효’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즉각 각료회의를 소집하고 두 가지 방안을 결정했다. 하나는 이 기회에 한국 황제의 내치 정무를 통감에게 위임시키거나 통감의 동의를 얻어 시행하게 하는 방안, 다른 하나는 아예 황제의 위를 황태자에게 양위시킬 것. 둘 중의 하나를 밀어붙이라고 통감에게 지령했다.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밀사사건이 고종의 칙명으로 된 것이라면 징세권·군사권·재판권을 우리가 장악할 호기회”라고 도쿄에 답신을 보냈다.

일본 정부는 이토에게 전권을 맡겼다.

이토는 우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책임추궁을 했다.

“내각에서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소.”

이완용은 극구 변명하며 선처를 빌었다.

“나 역시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본국 정부의 조치를 기다리는 몸이요. 그런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소.”

이토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7월 3일 오후 이토는 일본 해군 연습함대 장교들을 거느리고 입궐하여 밀서의 사본을 고종황제에게 제시하면서 위압적으로 말했다.

“이와 같은 음흉한 방법으로 일본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려는 것은 차라리 일본에 대해 당당히 선전포고를 하는 것만 못한 것이외다! 그와 같은 공공연한 적대행위는 협약 위반이며, 책임은 전적으로 폐하가 져야 하며 일본이 조선에 대해 전쟁을 선포할 수도 있소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완용에게 고종 양위에 앞장서도록 지시했다. 이완용은 7월 6일 내각회의를 소집했다.

“황제께서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대신들은 헤이그 밀사사건 책임을 고종에게 추궁한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곧바로 입궁하여 어전회의를 열었다.

송병준이 말했다.

“폐하, 도쿄에 가서 일본 천황 폐하에게 사죄하십시오. 그렇게 못한다면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항복한 후 하세가와 대장에게 비는 수밖에 없소이다”라고 협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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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이 학부대신 시절 문을 연 법어(프랑스어)학교. 맨 왼쪽이 프랑스인 교사 마르텔이다.
 




항복한 후 하세가와 대장에게 비는 수밖에 없소이다”라고 협박하였다.

자기 나라 황제에게 물러날 것을 강박하는 송병준은 족보 없는 복잡한 인간이었다. 함경남도 장진군의 어느 집 첩으로 들어간 기생의 아들, 8살 때 서울 수표교 근처 기생집에서 잔심부름하는 조방꾸니, 그후 민영환(閔泳煥) 집안 식객(食客)이 되고 무과를 거쳐 무관이 되었다. 호위관으로서 병자수호조약 체결장에 나갔다가 인본 재계 유력인사를 물어 부산에 최초의 한일합작 상관(商館)을 설립하고 일본인 앞잡이 노릇을 하다 부산사람들이 그 상관을 부수어 버렸고, 서울 집이 두 번이나 노한 군중들에 의해 불탔던 사람, 김옥균(金玉均)의 암살자로 일본에 밀파되었다가 김옥균에 감화되어 동지가 된 사람. 이 때문에 고종황제의 요주의 인물이 되자 철저히 친일파로 변신했던 사람. 김옥균 암살 소식을 듣자 노다 헤이치로(野田平治郞)라는 이름으로 일본인 행세를 하며 일본에 숨어 지낸 사람. 10년 후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통역관이 되어 일본군을 따라 귀국하여 친일파의 우두머리가 되고, 일제의 지시를 받아 이용구(李容九) 등과 함께 일진회를 조직하고, ‘한일합방’을 앞장서서 주장하며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확실하게 한 사람. 가츠라 일본 수상에게 “1억 엔이면 한국을 팔아넘기겠다”고도 했던 사람이 그였다.

고종황제는 친일 대신들에 둘러싸여 철저히 고립되었다. 송병준은 고종이 물러날 것을 주장하면서 수백 명의 일진회원을 동원하여 궁궐을 에워싸고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일본이 강제로 합병하기 전에 스스로 물러나 사죄하십시오.”

송병준은 한국의 살 길이 이것뿐이라고 악을 썼다.

고종은 견디기 어려웠다. 수년 전 만민공동회의 의회설립 운동으로 어렵게 성사된 중추원 의회원을 불과 한 달여 만에 자신이 폐쇄시킨 결과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맞고 있는 것이다. 고종 주변 대신들은 고종의 황위가 위험해지고 대한제국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이때, 누구 하나 나서서 황제의 힘이 되어 주는 자가 없었다.

일본 외상 하야시(林董)가 한국에 파견된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완용은 일본 외상 도착 전에 제위를 황태자에게 넘기는 일을 완수하고자 고종을 압박했다. 고종은 과단성 있는 박영효(朴泳孝)를 궁내부대신에 임명하여 이토의 영향력 하에 있는 내각의 압력을 막으려 했다.

송병준의 협박과 폭언으로 고종이 자리를 뜨자 내각은 황위를 황태자에게 넘기도록 할 것을 결의하였다. 군부대신 이병무 등이 황제를 알현하고 퇴위를 강요하였다. 고종이 허락하지 않자 이병무는 칼을 뽑아 자기 목을 찌르려 하면서 말했다.

“폐하는 지금이 어떤 세상인 줄 아십니까?”

고종은 대신들의 위협을 이기지 못하고 7월 19일 ‘군국(君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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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고종)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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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구와 송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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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환 대장

 




‘대리’란 말은 양위할 뜻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다시 집권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은 말이었다. 그러나 이토와 내각은 이를 양위(讓位)로 굳혀 버렸다. 이완용은 조칙이 내려진 19일 곧바로 황제 대리 의식을 거행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의식을 집행해야 할 궁내부 대신 박영효가 반발해 병을 핑계로 대궐에 나타나지 않았다. 식을 치룰 수가 없었다. 이완용은 자신이 스스로 궁내부대신 임시서리가 되어 7월 20일 황제 대리 의식을 강행했다. 양위식은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가 직접 하지 않고 두 명의 내관들이 대신하였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는 동안 7월 17일 서울 등 여러 곳에서 반일 격문이 나붙었다. 다음날 오후 11시 종로에서는 상인, 학생 등 시민 수백 명이 결사회를 조직하여 광무황제의 양위를 반대하며 대한문 앞에서 일본 헌병, 순사와 충돌하였다.

7월 19일 양위조칙이 발표되자 오후 4시 한국 군인,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시내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일본인 3명이 피살되었다. 상인들은 일제히 가게를 닫고 항의를 표시했다. 다음날 오후 4시 서울 주둔 시위대 제1연대 제3중대 병사 수십 명이 부대를 이탈하여 경무기관을 습격하고,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서울 시민 결사회 600명이 서소문 밖 석교 경무지서를 습격했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었다. 분노한 군중들이 남대문 밖 중림동의 이완용 집에 불을 질렀다. 집은 조상 신주까지 완전히 타버렸다. 이완용의 가족들은 성난 군중을 피하여 남산 왜성구락부에서 일본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두 달이나 있다가 9월에야 장교(長橋)에 있는 그의 형 이윤용의 집으로 들어가 살았다.

양위식을 끝낸 이토는 서울에 온 외상 하야시와 대한제국을 압박할 ‘신협약안’을 준비하여 1907년 7월 24일 한국정부에 제출했다. 이른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다. 시정 개선, 법령 제정과 행정상 처분은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1, 2조), 고등 관리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받을 것(4조),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할 것(5조)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친일내각은 다음날 바로 의결하여 순종의 재가를 받았다. 이제 대한제국은 일본 식민지에 다름 아니게 되었다. 이에 찬성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군부대신 이병무,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부대신 조중응, 학부대신 이재곤, 내부대신 임선준이 정미 7적으로 국민들의 지탄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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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을 강요하러 방한한 이토 히로부미
 


일본군 대장 하세가와(長谷川好道)는 군대 해산에 착수했다.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 장병들은 도수교련을 한다며 일본 교관 인솔 아래 비무장으로 동대문 근처 훈련원에 모이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들이 갔을 때 기관단총으로 중무장한 일본군이 이중 삼중으로 포위했다. 해산하는 군인들에게는 하사 80원, 1년 이상 복무 병졸들에게는 50원, 1년 미만 병졸에게는 25원의 하사금이 지급되었다. 당시 쌀 한 섬이 3원이었을 때로서 거금이었다.

8월 1일 군대 해산이 있던 날, 서울의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은 “군인으로서 능히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능히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 없다(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했다. 이 소식이 퍼져나갔다. 제2연대 1대대 중대장 오의선 정위 등도 자결하였다. 이에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1대대 장병들이 무장하고 해산을 거부하며 일본군과 총격전으로 맞섰다. 일본군의 공격을 여러 차례 막아냈으나, 화력의 열세로 병영을 빼앗겼다. 이들은 병영을 빠져나와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카지와라(梶原) 대위를 비롯한 40여 명의 사상자가 났고, 한국군은 장교 13명을 포함한 57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성내외 민가 수백 호가 불에 탔으며, 해산군인을 지휘하던 남상덕도 장렬히 전사하였다.

군인들의 전투가 벌어지자 시내 병원의 간호사들이 탄환을 뚫고 쓰러진 한국군 병사들을 돌보았다. 연동여학교(蓮洞女學校, 정신여학교 전신) 학생들은 제중원(濟衆院)으로 달려가 부상한 장졸들을 간호하였다. 살아남은 군인들은 서울을 빠져 나가 의병대열에 합류하였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 1907년 7월, 그 한 달은 우리 역사에서 참 일그러진 달이었고, 일그러진 군상들이 활개 쳐 나라의 운명을 재촉했던 씁쓸한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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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
문학박사·
前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
現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