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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테일러 부부와

딜쿠샤 이야기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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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Dilkhusha)는 서울 종로구 행촌동 1-88~89(사직로 2길 17) 사직터널 위 인왕산 자락에 있는 서양식 붉은 벽돌 2층집 이름이다. 1923년 이 집을 지어서 1942년 일본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20년간 산 앨버트 테일러는 한국 광산업의 개척자 중 하나인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George Alexander Taylor, 1829~1908)의 아들이다.

앨버트 테일러의 아버지 조지 A. 테일러는 채금(採金) 전문가로 1896년 11월 67세의 나이에 평안북도 운산금광의 채광권을 인수한 레이 헌트(Leigh S. J. Hunt)를 돕기 위해 한국에 왔다. 동양 최대의 금광이었던 운산금광은 1895년 제중원 의사로서 고종의 정치 고문이었던 미국인 호레이스 뉴턴 앨런(Horace Newton Allen)이 고종과의 친분을 이용해 채굴권을 따냈다. 앨런은 채굴권을 미국인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에게 넘겼으나 모스는 도로 등 인프라가 전혀 갖춰지지 않은 운산금광사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에 알렌은 저돌적인 시애틀의 사업가 레이 헌트(Leigh Smith Jame Hunt, 1855~1933)를 끌어들였다. 헌트는 아이오와 주립농대(1885, 후에 아이오와 주립대) 시애틀의 신문발행인(1886), 부동산 개발업자, 은행총재 등 다양한 사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한국의 운산금광에 손을 댄 것은 결과적으로 그에게 일생일대의 부를 안겨 주었다. 이 부를 바탕으로 그는 수단 면화무역, 라스베가스 최대 지주로서 토지개발사업을 하게 된다.

헌트는 3개월 동안 운산금광을 면밀히 조사했다. 이때 조지 A. 테일러가 전문가로서 초빙되었을 것이다. 헌트는 운산금광의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확인하고 모스로부터 단돈 3만 달러에 운산금광에 관련된 권리 일체를 인수했다. 그는 1897년 자본금 500만 달러의 ‘동양합동광업주식회사(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mpany, OCMC)’를 설립하고, 첨단 채굴 장비를 대거 투입해 운산금광 개발에 나섰다.

운산금광은 첫해부터 대박을 터뜨려 배당을 시작한 1903년부터 일본광업주식회사에 일체의 권리를 넘기기 전 마지막 1938년까지 36년간 매년 10% 이상의 고율 배당을 실시하여, 운산금광에서 ‘노다지’란 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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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테일러가 1919년 촬영한 고종 황제 장례 행렬.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조지 A. 테일러는 이 광산에 약 12년간 종사하면서 큰돈을 벌었는데, 1908년 12월 10일 79세로 한국에서 사망하여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 제1묘역에 묻혔다. 묘비에는 ‘한국 광산 개척자(Pioneer mining engineer to Korea)’라 적혀 있다.

앨버트 테일러의 풀 네임은 앨버트 와일더 ‘부르스’ 테일러(Albert Wilder ‘Bruce’ Taylor)이다. ‘Bruce’가 붙은 것은 그가 Taylor 대신 Bruce로 불러주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아들이 태어나자 이 이름을 주었다. 그는 1875년 3월 14일 미국 네바다주 라이온카운티 실버시에서 태어났다. 21살 때 아버지 따라 한국에 와서 운산에서 금광사업을 했으며, 충남 직산금광의 한국탐사회사(Korean Exploration Co.)의 총지배인(General manager)으로도 있었다. 1919년 1월 고종황제 국장이 발표되자 UPA(United Press Association, 1958년에 UPI로 바뀜) 통신사의 요청으로 한국 주재원을 겸하게 되었다.

아버지 사후 그는 상속받은 재산으로 동생 윌리암(William)과 서울 소공동에 ‘W. W 테일러무역회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미국의 제너럴모터스(G.M), 포드, 크라이슬러, 오버랜드(Overland) 회사의 자동차, 쉐퍼(Sheaffer)사의 만년필 등을 한국에 수입하여 판매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영화를 수입해 국내 극장에 배급하기도 했다.

1916년 앨버트 테일러 나이 41세 때 일본 요코하마 근처 해변에서 수영하다 익사할 뻔한 메리 린리(Mary Linley)를 구해 준 계기로 급속히 가까워졌다. 그녀는 화가이자 작가이며, 인도 동인도 회사와 연관이 많은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런던에서 연극배우가 되어 아시아 순회공연 중이었다. 10개월 후 앨버트는 메리를 만나러 인도 캘커타로 가서 1917년 6월 15일 인도 봄베이 성토마스 성당에서 결혼했다. 둘은 한국으로 돌아와 서대문에 보금자리를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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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와일더 테일러 (1910)
 


몇 년 후 어느 봄날 테일러 부부는 북악산에 올랐다가 인왕산 성곽을 따라 내려오던 중 행촌동 1-88~89, 지금의 사적터널 위쪽 언덕에 둘레가 6.8m, 높이가 23m나 되는 400년 된 거대한 은행나무(서울시 보호수)를 보고 반하여 “이곳에 집을 지어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그러던 중 그 땅이 매물로 나왔다. 그 터는 당시 영국인 소유였는데,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권율(權栗, 1537~1599)장군 집터라고 알려져 있었다. 앨버트는 아내가 좋아하는 은행나무 주변 1만 4000평 땅을 시세보다 넉넉히 값을 쳐서 10만 원(현 시가 5~6억 원)에 주고 샀다. 그 땅에 벽돌을 져 날라 저택을 지었다.

테일러 부부는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에 폭이 14m나 되는 1층 거실, 침실, 서재, 드레스룸, 욕실, 부엌, 창고, 식품저장실, 실내 화장실은 물론 하인들의 방까지 방이 10개가 넘는 붉은 벽돌 저택을 완공했다.

대리석 추춧돌에는 ‘DILKUSHA(딜쿠샤) 1923’이라고 집 이름과 건축 연도, 성경 시편 127장 1절을 표시한 ‘PSALM CXXVII-I’을 새겨 넣었다. ‘딜쿠샤’는 힌두어로 ‘마음의 기쁨(Heart's Delight)’이라는 뜻이다. 앨버트와 메리가 인도 여행 중 방문한 러크나우(Lucknow) 지역에 있는 영국인 저택 딜쿠샤 고티(Dilkusha Kothi)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딜쿠샤 저택에서 거실 창문을 열어젖히면 서울 시내 전경이 펼쳐졌다. 가을이면 노란 낙엽이 잔디밭에 카펫처럼 깔렸다. 그들은 종종 조선에 와 있는 서양인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열곤 했다.

1919년 2월 28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아들 브루스 테일러(Bruce Tickell Taylor)가 태어났다. 이튿날이 3월 1일이었다. 저녁 무렵 아기를 보기 위해 병원을 방문한 앨버트는 침대에 누인 아기를 안아 올리다가 ‘독립선언서’를 발견했다. 그때의 광경을 부인 메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간호사는 그 서류를 내 침대보 속에 감췄다. 바깥 거리에서는 모든 게 난리였다. 간혹 들리는 비명소리, 총소리 그리고 찬송가를 느리게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끝없이 반복되는 커다란 외침이 들렸다. 만세! 만세! 그 소리는 맹수의 포효처럼 들렸다.

내가 앨버트 때문에 다시 깨어났을 때 방은 거의 어두웠다. 그는 허리를 구부려 내게 키스를 했고, 익숙하지 않은 솜씨로 아기를 안아 올렸다. 그 바람에 감춰져 있던 종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앨버트는 당장 아기를 내려놓고 불빛이 있는 창가로 그 종이들을 가져갔다. “독립선언서잖아!” 그는 놀라서 소리쳤다.

장담컨대 그는 신문사의 새 통신원으로서 독립선언서를 발견한 것이 자신의 상속자이자 친아들을 만난 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날 밤 동생 빌(윌리엄)이 신발 뒤축에 독립선언서를 넣어 도쿄로 떠났다.”

3·1운동 발발 소식은 이렇게 하여 독립선언서와 함께 동생의 신발 뒤축에 감추어 UPA도쿄지국에 전달되어 전세계에 타전되었다. 앨버트는 3월 3일 광무황제 국장 광경도 취재하여 보도했으며, 이후 4월 15일에는 일본군이 제암리에서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처참한 만행의 현장을 취재하고 사진을 찍었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미국 부영사 커티스는 앨버트의 사진을 들고 하세가와 총독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다음날 신문에 총독의 사과기사가 실렸고, 학살만행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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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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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산 금광의 광산업주와 노동자들(연대미상)
 

1941년 수백 명의 외국인들은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다. 그해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고, 출국을 거부하는 외국인들을 억류했다. 딜쿠샤가 있는 한국을 떠나려 하지 않으려다 앨버트는 6개월간 서대문감옥에 투옥되고, 아내 메리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결국 이들은 일제의 억류자가 되어 일본을 거쳐 중립지대인 동아프리카 포르투갈령 항구도시 루랑코 마르케스(Lourenco Marques, 오늘날 모잠비크 수도 마푸토)로 보내져 거기서 미국으로 송환되었다.

앨버트는 결국 딜쿠샤로 돌아오지 못하고 1948년 6월 29일 캘리포니아 LA 카운티의 글렌데일(Glendale)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부인 메리는 생전에 한국에 묻히길 원했던 남편의 뜻에 따라 화장한 재를 가지고 와서 양화진 외국인묘 시아버지 조지 A. 테일러의 무덤 곁에 묻었다.

아내 메리는 93세까지 살다 1982년에 캘리포니아 맨도시노(Mendocino)에서 사망했다. 딜쿠샤는 해방 후 국가 소유가 되었으나, 12세대 23명이 쪽방촌 형태로 무단 거주하며 오랜 세월 건물을 돌보지 않아 내외부가 심하게 훼손됐다. 동네 주민들은 “귀신 나오는 집”이라 불렀으며, 정부 당국이나 시민들도 이 집의 유래나 소유주를 알지 못했다.

2006년 3·1운동 전날 한국에서 태어난 아들 브루스가 한국을 방문해 딜쿠샤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테일러 부부 관련 자료들을 서울시에 기증했다. 또한 1992년 어머니 메리의 10주기 때 영국에서 출판한 어머니의 자서전 <호박목걸이(CHAIN OF AMBER)>도 소개했다. 호박목걸이는 앨버트가 메리를 처음 만났을 때 준 선물이었다. 이 책은 2014년 3월 한국에서 번역되어 나왔다.

테일러 부부의 사연이 알려지자 서울시는 부르스 테일러 씨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또 3·1 운동 100주년을 맞는 2019년까지 딜쿠샤의 원형을 복원하여 전시관으로 꾸며 시민들에게 개방하기로 했다. 근대 건축사의 한 작품이며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테일러 부부가 살았던 딜쿠샤의 개방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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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
문학박사·
前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
現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