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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의 장소

태화관 재정리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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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점 명월관
1903년 9월 17일 대한제국 때 궁중의 음식·잔치 일을 맡아하였던 전선사(典膳司) 주사 출신 안순환(安淳煥)이 세종로 네거리 황토현의 동아일보사 자리에 요리점 명월관을 차렸다. 프랑스 혁명 후 해고된 궁정 요리사들이 프랑스 요리를 대중화시켰다 하듯이 우리의 경우 명월관이 그랬다. 명월관에서는 궁중의례에 따라 음식을 차려냈다. 그래서 요즘 식당처럼 한 상에 여럿이 먹는 겸상이 없었다. 손님 일인당 본상과 곁상으로 차려 내었고, 음식은 은그릇에 탕조치(장조치, 젓국조치. 조치는 찌개를 가리키는 궁중용어), 편육 등 12첩 상과 육회 등의 별찬을 냈다. 왕이 살아 있던 시절에 시중에서 궁중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되어 일자리를 잃은 기생들이 기생조합을 결성했는데, 명월관에서 부르면 일류 기생들을 보냈다. 명월관은 자연히 장안 명사갑부들의 사교장이 되었다. 서민들은 “땅을 팔아서라도 명월관 기생 노래를 들으며 취해봤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농담을 주고받곤 했다.

명월관은 번창했다. 1914년 여름에는 3층 양옥으로 증축했고, 1917년에는 인사동 194번지에 이완용 소유의 태화관을 빌려 명월관 지점을 열었다. 독립선언의 바로 그 장소이다.


명월관 지점 태화관
인사동 태화관은 원래 조선 24대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慶嬪 金氏, 1832~1907)가 헌종 사후에 나와 살았던 ‘순화궁’이었다. 창덕궁 낙선재는 헌종이 경빈 김씨를 사랑하여 지어준 건물이다. 1907년 8월 경빈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궁내부대신이었던 이윤용(李允用, 1854~1939)이 이곳을 차지하였고, 망국 직후인 1911년 초 동생인 이완용이 인수했다.

이완용은 서소문 밖 약현(藥峴, 지금의 중림동) 양부 낙천공(樂泉公) 집에 살았는데, 일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1907년 7월 20일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자 분노한 시민들이 습격하여 불태워버렸다. 그리하여 이완용은 통감부가 있는 남산의 왜성구락부(倭城俱樂部)에 숨어 살다가 겨울이 되자 장교(長橋, 3·1빌딩 부근)에 있는 형 이윤용 집에 일시 동거했다. 그 후 고종황제의 특별 배려로 남부 저동(苧洞, 을지로 2가)에 있는 남녕위궁(南寧尉宮)을 하사받았다. 1908년 11월 23일 저동(苧洞) 집으로 옮겨와 살면서 형 이윤용 소유의 인사동(당시는 里門洞) 순화궁을 1911년 3월 12일 매입하여 3월 17일 이사 들어왔다. 그러나 인사동 순화궁 집은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나라 팔아먹은 놈’이라고 욕설을 퍼붓는 통에 살 수가 없었다 한다. 1913년 4월 이완용은 옥인동(玉仁洞) 19번지에 집터를 마련하고 안채는 개량 한옥, 바깥채는 양식 2층 저택을 지어 12월 1일 이사를 가고 인사동 집은 비게 되었다. 이완용은 인사동 빈집을 임대하여 일시 여관이 되었다. 얼마 안 있어 명월관에서 이 집을 세를 얻어 태화관(太和館)으로 이름하여 명월관 지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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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관 본점인 명월관을 낸 안순환
 


민족대표 독립선언
1919년 2월 28일 밤이 오기 전까지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 장소는 탑골공원이었다. 그날 밤 각지의 민족대표들이 재동 170번지 손병희의 집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YMCA 총무로서 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을 만세시위에 참여시켜 독립운동을 일원화한 감리교의 박희도가 말했다.

“다중이 모인 자리에서 민족대표들이 체포되어 가게 되면 청년 학생들과 일본 군경이 충돌할 텐데 자칫 큰 불상사가 날 것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청년 학생들을 많이 접촉했었다. 그 자리에서 독립선언 장소를 탑골공원과 가까운 태화관으로 바꾸었다. 손병희는 태화관의 VIP 고객이었다. 숭인동 157번지 낙산 기슭에 손병희의 별장 상춘원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천도교 큰 행사나 교인을 위한 대연회를 베풀 때 태화관에 음식을 주문하였기 때문이었다.

3월 1일 아침이 오기 전 천도교계 민족대표이며 천도교 인쇄소 보성사 책임자 이종일은 독립선언서 인쇄를 무사히 마치고 전국에 배포를 거의 끝냈다. 보성사에서는 대중의 궐기를 촉구하기 위해 <조선독립신문>이란 이름의 쪽지 호외도 1만 매를 인쇄하여 배포했다. 이렇게 만세시위 대중화를 위한 준비를 끝냈다.

의암 손병희는 천도교의 최린과 권동진과 오세창과 함께 한아삼(韓阿三)이라는 대만 출신의 운전기사가 모는 짙은 자주색 포드 자가용을 타고 태화관으로 향했다. 태화관 후원 언덕 위에는 ‘별유천지’라는 별실이 있었다. 그곳에 오후 2시까지 길선주·유여대·김병조·정춘수 4명을 제외한 29명이 모였다. 남감리회 정춘수는 원산에서, 북장로회 길선주는 평양에서 늦게 도착하였다. 장로교 유여대 목사는 의주에서 직접 시위운동을 주도하였고, 김병조 목사는 비밀조직 책임을 맡아 참석하지 못했다. 민족대표들이 모임을 갖는 별실 옆방 6호실에는 기독교의 이규갑, 천도교의 이병헌 등 청년 6명을 비밀리에 잠복시켜 기록과 파고다공원과의 연락책임을 맡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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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공주 출신 강윤이 설계한 태화기독교 복지관
(이 건물이 독립선언한 태화관 건물로 잘못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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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독립선언 장소였던 태화관 자리에 현재 태화빌딩이 들어서 있다.
 


2시 정각, 선언서 약 백매를 각자 볼 수 있도록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손병희는 이종일에게 말했다.

“독립선언서를 직접 인쇄, 배포했으니 크게 낭독하시오.”

이종일이 오자를 고치고 낭독하였다. 그러나 ‘각자 열람만 하고 낭독은 생략하였다’는 자료도 있어 낭독에 대해서는 엇갈린다.

이때 갑자기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안순환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선생님들, 젊은 학생들이 선생님들을 만나자고 합니다.”

안순환의 말에 권동진과 최린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갔다. 학생 대표 강기덕과 한태국, 김문진 세 사람이 흥분하여 말했다.

“지금 파고다공원에는 수천의 학생들이 모여 선생님들께서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민족대표들은 요정에 앉아 계십니까? 나가서 민중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정중히 거행합시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면, 군중들이 격분할 것입니다.”

최린이 흥분한 이들에게 장소를 바꾼 사정을 설명하고 미리 연락을 취하지 못한 것을 사과했다. 그러면서 설득했다.

“학생들의 요구가 결코 무리한 것은 아니나, 일제의 간악한 계교에 빠져들지 않고 거사를 순조롭게 치르기 위해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거사를 추진하라.”

얼마 후 요리상이 운반되었다. 일동이 축배를 들려고 할 때 한용운이 일어나 일장 연설을 했다. 일동은 일어나 두 손을 높이 쳐들며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삼창했다. 이와 거의 동시에 탑골공원에서는 군중들의 “조선독립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듯 들려왔다. 의암 선생은 최린에게 말했다.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독립선언 사실을 통고하세요.”

총독부에는 김윤진을 보내어 <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서>를 제출하게 했다. 종로경찰서에는 인력거꾼을 시켜 문서를 전달했다. 이필주 목사의 부탁으로 배재학당 교사 김진호(金鎭浩)는 배재학당 학생대표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각국 영사관으로 독립선언서를 전달할 것을 지시했으나 그중 장용하(張龍河)만 3월 1일 정오에 중국 영사관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한 10분쯤 흘렀을 때 일본 경찰 70~80명이 달려와 식장을 포위하였다. 민족대표들은 경시총감부로 차례로 연행되어 갔다. 이종일·이승훈·나용환이 한 차에 태워져 실려 갈 때에는 군중들이 200~300장씩의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태화관 바깥과 시내의 군중들은 차를 에워싸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따라 외쳤다. 마지막으로 한용운과 최린이 실려 갈 때는 목이 쉬어 군중들이 소리를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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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토현(세종로 네거리 동아일보 자리) 명월관
 


그 후의 태화관
광화문 네거리 황토현 명월관 본점은 3·1운동이 나고 2달여 지난 5월 23일 오전 6시 원인 모를 화재가 나서 전소되었다. 인사동 태화관은 명월관의 본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완용은 자기가 소유한 태화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 체면이 말이 아니어서 집을 내 놓았다. 태화관은 대지가 8910㎡(2700여 평)에 달하는 큰 집이어서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미국 남감리교 여선교부(Woman's Missionary Council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선교사 마이어즈(Mamie D. Myers, 마여수)가 매입에 나섰다. 1919년 9월부터 1년을 끌어 1920년 9월 20일 20만 원으로 계약이 체결되고, 그해 12월 11일에 감리교회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태화여자관은 1921년 4월 1일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이때까지는 순화궁 한옥건물이 그대로 유지되다 1937년 여름, 새로운 태화여자관 신축 계획에 따라 철거되었다. 새 태화여자관은 공주 만세시위 참여자 강윤(姜沇)이 설계하여 1939년 11월 4일 건평 718평의 한식과 양식 절충의 3층 건물로 완공되었다. 흔히 독립선언 장소로 알려진 사진이 이 건물 사진이다.

최근 한 인기 강사가 대중매체에서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에 대해 “탑골공원 오다가 갑자기 발길을 돌려” “룸싸롱” “만취” “마담” 등 낯 뜨겁게 묘사한 강연이 문제가 되었다. 그 당시 민족대표들은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