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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
한 충실한 동역자의 초상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있었다면, 한국 혁명가 안창호에게는 이강(李剛)이라는 동지가 있었다. 두 사람은 1878년생으로 동갑이었다. 고향도 평양과 진남포가 있는 용강군으로 인접해 있어 동향이다. 고향에서는 안면이 있는 사이였으나 친숙한 사이는 아니었다. 이강의 호는 오산(吾山, 鰲山), 안창호의 호는 도산(島山) 호도 비슷했다. 두 사람 모두 1902년 학업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았던 두 사람은 미국에서 다시 만나면서부터 소위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고, 도산이 죽는 날까지 변함없이 충실한 혁명의 동역자가 되어 주었다. 그런 면에서 도산 안창호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이강은 1878년 4월 18일 평안남도 용강군 삼남면 의방리(義方里) 노룻매[黃山]에서 태어났다. 생일은 도산보다 6개월 빠르다. 본명은 정래(正來)이다. 부친은 광주 이씨, 병훈(秉勳), 모친은 박성심(朴誠心).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보통사람’ 가정이었다. 이강은 7살부터 17세가 될 때까지 고향에서 김창승(金昌昇)이라는 스승 밑에서 한학을 배우고 중국으로 유학을 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까지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그 후 예수교 감리회에 입교했다.

1902년 안창호가 미국 유학을 떠났던 그해 나이 24세 때 이강도 미주개발회사의 하와이 이민 모집에 응하여 1903년초 제물포항에서 차이나호를 타고 이민길에 올랐다. 4월 14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을 하면서 1년간 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이듬해인 1904년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이강은 학비를 벌기 위해 8개월 동안 아스파라가스, 포도, 맥주원료인 홉(hop)을 재배하는 농장을 전전하며 노동일을 하였다. 농장에서 100달러를 번 이강은 LA로 가서 거기서 안창호를 만났다. 도산은 학업을 미루고 미주 동포들의 생활개선을 지도하는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LA 감귤농장 지역에 노동소개소를 열어 오렌지농장과 철도공사장 등지에 한인들의 일거리를 주선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 의기투합했다. 이강도 도산과 같이 학업을 뒤로 미루고 동포들을 돕는 사업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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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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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 금각만 (2014)
 




1903년 9월 동포들을 돕기 위해 조직한 상항친목회를 1905년 4월 5일 공립협회로 확대 재조직하고 생활개선에 독립운동이라는 목적을 더하였다. 이강은 도산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자신은 <공립신문>을 맡아 발간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되면서 일제가 한국을 병합하려 한다는 소식이 미주에 전해졌다. 도산 안창호 지도 하에 한인친목회 회원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일에 자신들이 나서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도산은 지속적으로 동포들에게 가정과 일터 모든 곳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문명적 행동을 하여 존경받는 국민이 되도록 교육하는 것과 동시에, 높은 수준의 문명적 새나라, 국민이 주인 되는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 하에서 한인들은 돈벌이를 위한 단순한 이민노동자에서 독립과 건국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공립협회는 미주 동포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미국 서부 해안지역에 9개 지회가 설립되었으며 회원들은 수십 명에서 800여명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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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협회 지도자들
가운데 이강 맨오른쪽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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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종착지 블라디보스톡 역사(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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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톡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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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과 안창호가 내렸을 블라디보스톡 항구 모습
 




공립협회의 힘이 확보되자 독립전쟁을 위한 장기 계획 하에 본국에서 새나라 세우기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07년 1월 초순 LA 근처 리버사이드에서 안창호, 임준기, 신달윤, 박영순, 이재수 등과 함께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를 조직하고 1차로 1907년 2월 안창호가 귀국한 데 이어 2차로 이강이 8월 27일경 귀국하였다. 이강은 3개월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 정재관과 함께 신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회를 설립하고, 스찬에 공립협회 수청지방회를 조직하고 <공립신보> 지사도 설치하였다. 이강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지들과 함께 <해조신문(海潮新聞)> 편집·논설기자로 활동했고, <대동공보(大東共報)>로 제호를 고친 뒤에는 편집책임을 맡았다.

1909년 10월 대동공보사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토의 처단 계획을 수립했을 때 이강도 그 자리에 있었다.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토 포살의 특공대로 자원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 갔을 때 이강은 안중근과 대동공보사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안중근 의사가 거사 성공 후 체포되자, 이강은 러시아인 변호사를 세우고, 영국인 변호사 한 명을 더 세우는 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북경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 의거가 터지면서 안창호를 비롯한 이갑, 신채호 등 본국의 동지들이 각지 헌병대에 붙잡혀 취조를 받는 바람에 연락조차 어렵게 되었다. 이때 안창호는 자신이 다시는 독립운동을 할 수 없도록 죽을 때까지 구금해 두려는 것을 알고 유치장 안에서 자결을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이강은 3개월 후 풀려나 중국으로 망명한 안창호를 신채호 등 동지들과 칭다오에서 만났다. 국망 이후의 독립운동 방향을 의논했다. 청도회담이었다. 러시아와 중국 국경지대에 이종호가 자금을 대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청도회담을 마친 이강과 안창호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때는 1910년 8월 24일 경이었다. 재러 한인 거류민회 함경도 세력이 견제했다. 공화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국민회는 러시아 관헌들의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구왕조체제를 옹호하는 의병계 인사들이나 기호세력과도 노선 차이로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런 속에서 이종호는 의병계와 귀화한 함북출신 한인들 쪽으로 기울어 도산과 이강의 계획에서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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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타 러시아 정교회 성당 Chita_Mosque
 


대의를 위해 젊은 시절 의기투합한 도산과 이강은 온갖 고난 속에서도 변함없이 서로에게 충실한 동지가 되어 준 아름다운 관계였다.


이강은 러시아정교로 개종했다. 미국 세력의 침투라는 러시아당국의 경계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의 종교도 던진 것이다. 이강은 종교신문을 표방한 <대한인정교보(大韓人正敎報)>를 발행했다. 일본의 압력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1910년 8월 29일 이후 도산이 심혈을 기울였던 국내의 신민회는 12월 안악사건(安岳事件)과 양기탁 등 보안법위반사건, 이듬해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음모사건 등을 날조, 탄압하는 바람에 와해되었다. 1914년 8월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하여 대대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한인들은 러일의 결속으로 블라고웨스 첸스크 지회가 해체되고, 계엄령으로 결사 및 집회가 일절 금지되었다. 1914년 11월 23일에 치타 한인학교에서 열린 시베리아 지방총회의 모임이 러시아 관헌의 습격을 받았다. 이강과 회원들이 구속되었다. 결국 여러 노력으로 검찰의 기소중지로 100루불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으나 <대한인정교보>는 발행 금지되고 이후 폐간되었다.

1917년 러시아 2월혁명으로 한인사회는 기회를 맞았다. 한국 독립운동을 탄압한 차르체제가 붕괴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강은 혁명과 내전의 와중에서 미주 대한인국민회와의 연락 관계가 단절되었다. 6월 4일에 니콜리스크, 우수리스크 등 각지 대표 96명이 참가한 가운데 귀화자들 중심의 전국한족대표자회가 개최되었을 때 이강은 치타 시베리아지방총회 대표원으로 대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이강은 귀화한 지 1년 밖에 안 되었고, 대회에서 항일적 주장을 할 우려가 있다고 대회참여를 거부당하였다. 1918년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공하자 치타에서 니콜리스크로 이주하고 전로한족회에 적극 참여했다. 항일전에 필요한 무기와 군자금을 조달하는 데 적극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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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이 도산과 헤어졌을 당시의 치타역의 모습(1910) Ch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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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났다.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이 경질되고 1919년 9월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齋騰實) 총독이 남대문역에서 나오는 순간 강우규(姜宇奎) 의사가 폭탄세례를 가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강은 그 연루자로 지목되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의 파견경찰에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50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0년 8월 경 연해주와 만주 한인 60여 명이 무장독립군 단체인 신민단(新民團)을 조직하였을 때(단장 김규면, 金奎冕) 이강은 기독교청년회 총무이자 부단장이었다. 그러나 소련 혁명정부는 러시아영내에 공산주의 전파 외에 일체의 독립운동을 금지했다.

이강은 러시아에서의 활동을 포기했다.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45세 되던 1923년 이강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上海)로 와서 십여 년 만에 도산을 만나 서로가 충실한 동지로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이강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24년 11월 15일에 흥사단원동임시위원부에 입단하였다. 1928년 이강은 흥사단의 임무를 띠고 이상촌기지를 돌아보고자 남중국 방면을 여행 중 하문(廈文)에서 강연을 하다가 일제경찰에 납치되어 징역 3년형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0년 9월2일 만기 출옥한 선생은 기회를 타서 다시 탈출하여 중국으로 망명했다. 1932년 이후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거가 일어나자 상하이에서 도산은 일경에 붙잡혀 가고 이강은 중국 남중부의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자 충칭(重慶) 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1947년 3월 28일까지 타이완에 있는 한국 동포들의 무사귀환을 위한 선무단(宣撫團) 단장으로 임무를 완수하고 귀국하였다. 1964년 10월 13일 86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요동을 치고 있다. 각자의 이해득실 때문에 정당과 사람들이 이합집산하고 있다. 대의를 위해 젊은 시절 의기투합한 도산과 이강은 온갖 고난 속에서도 변함없이 서로에게 충실한 동지가 되어 준 아름다운 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