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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그날의 탑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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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다공원
 




3월 1일 오후 2시, 날씨는 맑고 이른 봄치고는 따스한 햇살이 빛나고 있었다. 오후 2시 그 시각이 다가오자 새까만 교복을 입은 전문학생, 중학생들이 파고다공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예정된 오후 2시가 되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공원 안을 가득 채웠다. 학생과 시민들은 공원의 한가운데 있는 팔각정 계단 위로 민족대표가 나타나 독립선언을 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숨을 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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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기독교청년회 회관이 있는 종로거리(현 종로 2가)
 




1919년 3월 1일의 독립선언식은 서울 종로 2가 탑골공원에서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다. 1897년 영국인 총세무사 제이 엠 브라운(J. M. Brown)의 건의로 한국 최초의 공원으로 꾸며진 이곳은 서울 중심에 있어 시민들이 쉽게 집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전날 밤 가회동 170번지 손병희 집에서 민족대표들이 모였을 때 감리교계 민족대표 박희도(朴熙道)가 말했다.

“청년학생들이 운집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이 거행될 경우 일본 경찰이 이를 제지할 테고, 이것을 그 자리에 모인 많은 청년학생들이 보게 되면 일본 경찰과 충돌이 일어날 것이 불 보듯 합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사상자가 생기고 선언식 자체가 불발로 끝나는 불상사가 생길 것입니다.”

박희도는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회원부 간사로서 학생들을 많이 접하고 있었다. 그는 1919년 1월 각 전문학교 대표들을 중국요리점 대관원(大觀園)에서 만나 독립운동을 위한 회합을 했었다. 그 후 학생들은 2월 20일 인사동의 승동예배당에 모여 김형기(경성의학전문학교), 김문진(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김대우(경성공업전문학교), 강기덕(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김원벽(연희전문학교)을 독립운동 1선에, 이면에서 활동할 2선의 책임자로서 이용설(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한위건(경성의학전문학교), 윤자영(경성전수학교), 한창환(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을 정하는 등 독립운동 준비를 본격화했다.

박희도는 민족대표와 학생단으로 독립운동이 이원화되는 것을 우려했다. 그는 학생단 대표들에게 민족대표들의 계획을 알려주며 일원화를 촉구했다. 이에 학생들은 3월 1일 탑골공원에 집결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설 것과 3월 5일 제2차 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희도의 요구로 독립선언 장소가 바로 전날 밤 태화관 요리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변경 사실은 그 자리에 모인 민족대표들만
알았고, 학생과 시민 일반에게는 알릴 시간도, 방법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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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탑골공원 입구 모습
 



   

3월 1일 오후 2시를 앞두고 학생 시민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파고다공원으로 몰려들었다. 연희전문학교 2학년생 정석해(鄭錫海)는 친구 이경화와 함께 예정시간보다 일찍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파고다공원으로 갔다.

날씨는 맑고 이른 봄치고는 따스한 햇살이 빛나고 있었다. 오후 2시 그 시각이 다가오자 새까만 교복을 입은 전문학생, 중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석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새까만 학생들이 수없이 몰려들어 왔다. 어느새 공원 안은 입추의 여지없이 학생으로 꽉 차 있었다. 일이 일어나는구나 생각하니 나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며 긴장으로 가슴이 조여들었다. 예정된 오후 2시가 되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공원 안을 가득 채웠다. 학생과 시민들은 공원의 한가운데 있는 팔각정 계단 위로 민족대표가 나타나 독립선언을 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숨을 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되었는데도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정석해는 계속 그날 상황을 이야기한다.

“공원을 메운 군중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긴장한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그들 앞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럴 만한 사람도 통 나타나지 않으니 마음이 초조하기는 모두 마찬가지였다. 나도 두리번거리며 학생대표 김원벽 군을 찾았으나 그도 눈에 띄지 않았다. 내 짐작으로는 군중들이 다 모이면 우선 민족대표들이 나와 독립을 선언하고 시위행진을 하든지 다른 중대한 행동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도무지 그런 낌새가 없으니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다가는 모처럼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여 어린 마음에도 걱정이 되었다.”

이 때 학생 대표 하나가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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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다 공원 앞에서 경계령을 펴는 일본군
 




“여러분, 민족대표 분들이 독립선언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해 지금 거기 모여 계시답니다. 저희가 달려가서 이리로 모셔 오겠습니다.”

그들은 멀지 않은 태화관으로 달려갔다.

“선생님들, 이곳에서 뭘 하고 계십니까. 파고다공원에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선생님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생님. 지금 선생님들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소를 변경하시다니요. 안 됩니다.”

“이미 수 천 명이 모여 있습니다. 선생님, 그리로 가십시다. 가셔야 합니다.”

이때 정석해와 친구 이경화도 태화관으로 달려갔다.

“나는 이경화와 함께 태화관으로 달려갔다. 태화관에 민족대표들이 모여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왜 대중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일까. 그들이 회의를 하고 있는 줄 알았지만 이처럼 길어지리라고는 예상치 못하였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태화관에 이르고 보니 형사들이 태화관 입구를 에워싸고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파고다공원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우리 학생들끼리라도 거사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공원 뒷문 안에 들어서니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선언서 낭독을 끝마친 참이었다. 학생복을 입지 않은것을 보니 학생대표는 아닌 모양이었다. 낭독이 끝나자 누구의 선창인지 ‘조선독립 만세’ 소리가 군중들 속에서 일어났다. 연달아 ‘만세’, ‘만세’ 외치는 군중들의 소리는 포효로 변하였다. 공원은 일시에 흥분의 도가니로 화했다.”

이날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반 반장이었던 신봉조는 12시 30분에 수업을 마치고 동료 학생들에게 파고다공원으로 갈 것을 선도한 후, 오후 1시에 공원에 도착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오후 1시경에 파고다공원에 갔었다. 그러나 사람은 별로 없어 공원 안을 한 바퀴 돌고 얼마 뒤 또 한 번 돌아보았을 때도 사람은 얼마 안 됐다. 그래서 나는 누가 연설을 하려면 단상에서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팔각정 앞에 서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문득 단상을 보니 어떤 사람이 나타나 내가 서 있는 근처로 다가와서 섰다. 그러한 순간 나는 왼쪽으로 몇 걸음 가서 바로 그 앞에 섰다. 그 사람은 두 손으로 종이를 들고 떨면서 우렁한 소리로 읽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독립선언문 낭독이었다. 낭독이 끝난 후 군중은 일제히 감격에 넘친 흥분된 목소리로 두 손을 들
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문득 남쪽 문을 보니 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며 시가로 나갔다. 나도 그 대열에 끼어 만세를 부르다가 그날 오후 체포되었다.”

이때 선언서를 낭독한 사람은 정재용(鄭在鎔). 그는 서울 경신학교 출신으로 고향 해주 의창(懿昌) 여학교 교감으로 있었다. 3·1운동 직전 민족대표
의 한 사람인 같은 해주 출신 박희도의 연락을 받고 서울에 와서 3월 1일 학생 동원을 책임졌다.

정재용은 일경들의 감시를 피해가며 동분서주하다 3월 1일 아침, 박희도로부터 선언서 발표 장소가 변경됐다는 말을 들었다. 전날 33인 중 한 사람
인 중앙예배당의 김창준(金昌俊) 목사로부터 원산 감리교회 목사 곽명리(郭明理)에게 선언서 1백매를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곽 목사는 그날 오후 열차편으로 서울에서 원산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정재용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선언서 백매를 손에 둘둘 말아 쥐고 휘적휘적 남대문역(현 서울역)으로 나가던 중, 한 장을 뽑아 자기 호주머니에 간직했다.

그는 정오 때부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세라 염려하며 파고다공원 안을 배회했다. 오후 1시경부터 파고다공원 북쪽 문을 통해 학생들이 차츰 모
여들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공원 앞뒷문으로 수천 명의 군중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모두들 원각사탑 또는 팔각정을 바라보고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팔각정 층계 위에서 한 발자국 내려섰던 정재용은 이때가 천재일우의 기회라 생각하고 다시 팔각정 계단 위로 올라
가 호주머니에서 선언서를 꺼냈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정재용은 큰 소리로 읽어내려 갔다. 독립선언서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인 최남선이 집필한 것으로 어려운 한자말이 많은 매우 장중하고 철학적이며 잘 짜인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약 3장까지 낭독을 마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학생들 모두 두손을 높이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탑골공원의 독립선언식 장면은 이미륵이 독일에서 독일어로 쓴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에도 나온다. 이 소설은 독일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처음으로 나온 소설로 한국의 평화롭고 정겨운 삶이 일제 침략으로 파괴되어 가고,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관헌의 체포를 피해 독일로 망명하는 자전적인 이야기로서 독일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다.

작가 이미륵(본명 이의경)은 경성의학전문학교학생으로서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3월 1일 파고다공원의 경험을 이렇게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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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3월 1일 종로의 탑골공원과 낙원동 일대
 





“내가 공원에 갔을 때 이미 공원은 경관들로 포위를 당하고 있었다. 담장 내부는 단 열 발자국도 걷지 못하게 사람이 꽉 차있었다.… 갑자기 깊은 정적이 왔고 나는 누군가가 조용한 가운데 연단에서 독립선언서를 읽는 것을 보았다.… 잠깐 동안 침묵이 계속되더니 다음에는 그칠 줄 모르는 만세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좁은공원에서는 모두 전율하였고, 마치 폭발하려는 것처럼 공중에는 각양각색의 삐라가 휘날렸고 전 군중은 공원에서 나와 시가행진을 하였다. 우레와 같은 만세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삐라를 날리며 행진하였다.”

1919년 3월 1일의 역사적인 독립선언은 이렇게하여 민족대표들이 설정했던 ‘일원화’의 틀을 스스로 깨고 태화관과 탑골공원에서 ‘이원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바람에 탑골공원의 독립선언서 낭독자는 영웅이 되기는커녕 누구인지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도 못했다. 일정한 대표성을 띠지 않았던 인사가 그 자리에 있다가 민족대표가 나타나지 않아 당혹스런 상황에서 스스로 낭독자 역할을 떠맡아 하였고, 그런 사실을 입 밖에 낼 수 없는 일제 치하 시대상황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1919년 3·1독립만세 시위운동은 영웅 없는 역사가 되었다. 20세기 비슷한 시기의 러시아나 중국혁명에 레닌이나 마오쩌둥이 있었던 것과 대조되는 현상이었다. 3·1운동은 영웅이 없는 대신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이심전심의 공감대, 지역의 여건과 대중의 창조적인 아이디어에의해 전국으로 퍼져가게 되었다. 모두가 영웅이된 특이한 혁명운동이었다. 어쩌면 개개인의 자율과 자발적 연대, 창조성이 중요시 되는 21세기 IT시대 문화가 그때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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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문학박사·前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
구위원·現 (사)대한민국역사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