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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한국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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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 속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기다리는 러시아군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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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1914년 6월 28일 발칸반도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 거리에서 울린 한 발의 총성이 세계를 뒤흔들었다. 그 총격으로 오스트리아군의 대연습을 참관하기 위해 사라예보를 방문하던 오스트리아-항가리제국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대공과 조피 대공비가 숨졌다. 범인은 이웃 세르비아의 참모본부 정보부장이 밀파한 저격수 7명 중 한 명인 19세의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였다. 그들은 ‘검은손’이라는 세르비아 민족주의 비밀 단원들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기회로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발칸에서의 영향력을 만회하고자 즉각 강경 대응방침을 정하고 독일의 지지를 구했다. 독일 카이젤 황제는 오스트리아에 대해 확고한 지지를 보냈다. 7월 22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대해 10개조의 조건을 내건 최후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는 10개 조건을 수용했다. 그러나 7월 28일 오스트리아는 이를 거부하고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였다. 오스트리아는 또한 발칸반도 슬
라브족의 후견 러시아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독일도 상호 동맹을 맺고 있는 러시아와 프랑스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8월 4일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하자 영국은 전통적인 대륙문제 불간섭주의를 깨고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리하여 영국·프랑스·러시아가 협상국으로, 독일·오스트리아·오스만터키가 동맹하여 거의 전 유럽과 중동지역이 전쟁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가게 되었다.

독일은 이전에 수립해 놓은 슐리펜계획에 따라 속전속결로 프랑스를 굴복시킨 후 러시아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벨기에의 저항이 완강했다. 게다가 러시아도 신속하게 총동원하여 독일은 동과 서 양방향에서 적을 맞게 되었고, 전선은 진격도 후퇴도 못하는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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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터키 지배하에 있던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영국군 (1917)
 

두 진영은 교착된 국면을 뚫기 위해 각종 신병기를 개발하고 동원하였다. 1915년 4월 독일은 영국군에게 최초로 독가스를 사용했다. 화학전의 시작이었다. 영국은 1916년 6월 솜(Somme) 전투에서 18대의 전차를 등장시켰다. 비행기와 잠수함이 등장한 것도 이 전쟁이었다. 전쟁은 막대한 물량을
쏟아 붓는 물량전, 전 국민과 경제력을 동원하는 총동원전이 되었다. 개전 초 1주일간의 마른 전투에서 탄약 1백만 발이 소모되었고, 약 5개월에 걸
친 솜 전투에서는 2천만 발이 소모되었다. 독일은 전쟁기간 중 6000만 인구 중 1100만 명이 동원되었고 이 중 177만 명이 사망하고, 422만 명이 부
상당했다.

독일은 식량과 원료를 수입에 의존하는 영국에 타격을 가하기 위하여 무제한 잠수함전을 선포하고 영국으로 향하는 군사 민간을 불문하고 모든 선박에 대해 공격을 가하였다. 이 잠수함전은 결국 1917년 4월 6일 불개입 정책을 선언했던 미국의 참전을 가져옴으로써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의 패망을 자초하게 되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상대진영을 와해시키기 위해 각종의 비밀 교섭과 약속이 이루어졌다. 영국은 터키 지배하에 있는 아랍족의 독립을 약속하였다(아크마움 선언). 이와 동시에 연합국내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하였다(발포어 선언).

상반되는 이 약속은 오늘날 중동분쟁의 씨앗이되었다. 영국은 인도에서 150만 명의 인력을 동원하면서 전후 자치를 약속하였다. 독일은 러시아령
의 핀족, 발트 3국의 제민족, 폴란드인, 우크라이 나인들에 대해 독립을 약속하였다.

협상국과 동맹국의 양대 진영은 중립국과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였다. 일본은 양대 진영으로부터 참전요청을 받았으나, 중국 요동반도의 독일 조차
지 칭다오(靑島)와 남태평양상의 독일령 군도를 차지하면서 영국과 프랑스 등의 협상국 측에 가담하였다.

1917년 3월 15일(러시아력 2월) 장기전·총력전이 전개되면서 러시아 민중의 고통과 불만이 누적되어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차르체제가 붕괴하고, 이어 11월 7일(러시아력 10월) 볼세비키파에 의해 소비에트(소련) 정권이 수립되었다. 소련은 평화를 표방하며 서방의 비밀외교를 폭로하고, 독
일과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에 맞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1918년 1월 8일 14개조의 평화원칙을 발표하여 연합국 측의 동요를 억제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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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의 독일군 포로들 (1917 프랑스 포로수용소)
 

동부전선의 부담에서 벗어난 독일은 서부전선에 총력을 집중하였으나 1918년 7월 18일부터 미군의 증원을 얻은 연합국이 총반격에 나섰다. 동맹국은 점차 붕괴되어 9월 30일 동맹국에 가담했던 불가리아가, 10월 27일 오스트리아, 30일 오스만터키가 각각 항복하였다. 10월 28일 독일 수병들이 폭동을 일으켜 11월 9일 카이젤 황제 체제가 붕괴되고, 11월 10일 독일공화국이 수립되어 11월 11일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항구적인 세계평화를 위해 국제연맹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허약한 체제, 경제공황, 유럽 민족주의의 부활, 독일 국민들의 과중한 전쟁배상부담과 굴욕감이 나치의 등장을 가져오게 하여 30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의 요인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1914년은 러일전쟁 10주년의 해여서 러시아는 이전부터 일본에 설욕전을 벼루고 있었다. 연해주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의 반일감정을 등에 업고 ‘노령 이주 50주년 기념의 해’를 표방하고는 일본에 대한 일대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최재형, 이상설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광복군정부를 선포했다. 연해주와 만주의 동포들이 일치단결하여 조국을 해방하기 위해 노령에 제1군구, 북간도에 제2군구, 서간도에 제3군구를 설치하였다. 연해주에서 2만 9365명, 포수와 일부 해산군인으로 이루어진 백두산 북쪽의 무송(撫松)지역에 5300명, 왕청지역 1만 9507명의 독립군을 조직했으며, 통화·회인·집안현 25세 이상 30세 미만 39만여 명이 동원 준비를 했고, 미주지역 855명의 학생과 교관이 군사훈련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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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군
 

바로 그런 준비가 진행되던 중에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유럽 동부전선에서 독일과 대적하게 된 러시아로서는 시베리아지역에서 제2의 전선이 형성되는 것을 극력 피하고자 일본과 타협했다. 러시아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탄압했다. 대한광복군 정부는 해체되고 지도적 인물들은 투옥 혹은 원격지로 추방되었다. 한인들의 조직인 권업회는 해산되었으며, 기관지 <권업신문>도 폐간되었다. 항일 독립운동
의 만주지역 역시 중국 당국의 탄압을 받았다.

연해주와 만주의 한인 독립운동이 큰 타격을 받은 데 반해 일본의 국력과 국제적 위상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0년간 강고하게 자리 잡았
으며, 세계대전의 전쟁특수경기로 말미암아 모든 공장들이 밤을 새워 돌아가 일본은 만성 적자국에서 일약 흑자국으로 도약했다.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 되어 국제적 위상 또한 훨씬 강화되었다. 우리 독립운동의 입장에서 가장 불행한 시기였다.

다른 한편, 총력전을 위하여 각국이 자국 국민들에게 전쟁의 명분을 미화 선전하면서 전쟁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자유민주국가대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터키 등의 전제적 군국주의 국가의 대결로 선전되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연합국 측 전제군주국이 붕괴되고 소련은 독일과 협상하여 중립으로 돌아서며 피압박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주장하였다. 또한 대전 기간 중 상대진영의 와해를 위해 약소·피압박국들의 독립이 약속되었고, 이는 전후 세계에 해방과 독립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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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축하하는 뉴욕시민들
 

1919년 1월 18일부터 1920년 1월 21일까지 약 1년의 기간 동안 27개국 52명의 대표들이 모여 파리 베르사이유궁에서 전후 처리를 위해 강화회의를 열었다. 강화회의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4대국이 주도했다. 모두 1647차례 회의를 통해 독일과의 베르사이유 조약 등 패전국들과의 강화
조약, 전쟁포로문제, 해저전선, 국제 항공교통, 전쟁책임 등의 문제가 논의되었다. 남여평등, 소수자 권리, 약소국 독립 등 수많은 문제들이 강화회의에 제기되었다. 일본은 인종평등문제를 조항에 포함시키고자 하였으나 유색인종의 이민을 금지하고 있었던 오스트레일리아와, 영국의 반대로 실
패했다. 이로 말미암아 연합국 측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상해, 미국, 러시아 연해주 한인들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자 했고, 신한청년단(단장 여운형)에서 파견한 김규식이 파리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의제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중국이외에 전승국의 일원인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 독립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나라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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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문학박사·前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 연구위원·現 (사)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