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 | GEULMARU

로그인 회원가입 즐겨찾기추가하기 시작페이지로
글마루 로고


 

최초의 여성교육기관
 
이화학당
 
01.jpg
이화학당 전경
 
 
이화학당은 1886년 개교한 한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이다. 설립자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날 제물포항에 도착한 세 개신교 선교사의 한 사람인 의사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이었다. 그녀는 아들이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코리아라는 나라 선교사업을 결심하자 자신도 미감리회 해외여선교회에 자원하여 선교사로서 아들 내외와 함께 왔다.
 
 
 
02.jpg
메리 스크랜튼 부인(1832-1909)
 
 
03.jpg
윌리암 B. 스크랜튼 선교사(1856-1922)
 
 
스크랜튼 가족과 함께 한국에 온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정동에 작은 집 한 칸을 구하여 ‘벧엘 예배당’을 열었다. 이것이 정동제일교회의 시작이었다. 그는 또한 그해 8월 남학교인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메리 스크랜튼 부인은 1885년 10월, 감리교 선교부가 소유하고 있는 언덕 위의 초가집 19채와 그 옆의 빈터를 사들여 초가집들을 고치고 여성교육을 위해 축대를 쌓고 한식 이화학당 건물을 지었다. 이화학당은 남학교인 배재학당과 같은 시기인 8월에 이미 개설했으나, 1년 가까이 학생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1886년 5월 31일 고관집 소실 김부인이라는 여인을 첫 학생으로 맞게 되었다. 수업은 학생 한 명을 두고 1:1 로 진행했다. 그 다음 달 열두 살 가량의 조별단이라는 가난한 소녀가 들어왔다. 그러나 며칠 되지 않아 어머니가 와서 소녀를 데리고 가려하였다.
 
서양인들이 아이를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스크랜튼 부인은 완강한 어머니를 여러 가지로 설득하고, 다음과 같은 서약서까지 썼다. “서약서: (전략) 나는 당신의 딸 복순이를 맡아 기르며 공부시키되 당신의 허락 없이는 서방은 물론 조선 안에서라도 단 10리라도 데리고 나가지 않기로 서약함. 스크랜튼.”
 
1887년 학생이 7명으로 늘어나자 명성황후는 스크랜튼 부인의 노고(勞苦)를 알고 친히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지어주며 격려했다. 이때부터 이화학당이 알려지기 시작하여 구경 오는 사람들도 생겼다. 1888년에 학생 수가 18명으로 늘었고, 1890년 고종의 부마(駙馬:사위) 박영효(朴泳孝)의 딸이 이화학당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상류층 자녀와 부인들도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1893년에는 30명으로 학생이 늘어났다.

스크랜튼 부인은 “우리의 목표는 여아(女兒)들을 외국인의 생활·의복 및 환경에 맞도록 변하게 하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단지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들고자 노력할 뿐이다. 우리는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통하여 완전무결한 한국을 만들고자 희망하는 바이다.”라고 교육이념을 밝혔다.
 
 
04.jpg
이화학당 보통과 1학년 산수 시간 수업 광경
 
    
설립 초기에는 학생들의 의복, 침식, 책, 기타 제반 경비를 학당에서 지급하였다. 그 후 점차 학생들이 증가하면서, 1899년부터 자기 집에서 통학하며 학비를 스스로 부담하는 학생들을 받게 되었다. 당시 입학금은 1원, 기숙사 식비는 1개월에 3원씩 매학기 식기 값으로 20전을 징수하였다.

1896년 이화학당이 10년이 되기까지 수시로 입학생을 받았다. 입학생은 8, 9세에 입학하여 10년 가량 공부했다. 이화학당은 1904년에 4년제 중학과를 설치하고, 이 과정을 마친 학생들은 일본 나가사키(長崎) 지방의 갓스이(活水)여학교나 히로시마의 감리교계 여학교에 유학을 가거나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와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거나 사회활동을 하였다. 나머지 대부분은 출가했다. 그렇기 때문에 졸업식이 따로 없이 결혼하는 날이 졸업식이 되었다.

교비생으로 학업을 마치면 수학기간의 절반 동안 의무봉사를 하여 학비를 상환하도록 했다. 따라서 초기 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면 이화에 남아서 직접 가르치거나 개인적으로 학교를 세워 이화학당 관리하에 그것을 운영했는데 이 학교를 ‘사립 이화학당 부속 보통여학교’라고 하였다. 상동교회의 공옥(攻玉)여학교 등과 같이 대개 교회 옆에 있었다. 1912년에는 서울에만 46개 부속학교가 있었다.

학교 측은 기숙사와 복도를 오가며 종을 흔들어 기상시간이나 수업시간을 알렸다. 아침 7시에 기상 종소리를 듣고 일어나 8시 종소리가 울리면 식당에서 아침밥을 먹고, 수업은 8시 20분에 시작되어 오후 4시까지 계속됐다. 오후 5시에는 저녁 식사를 했고, 7시에 기도회를 열었으며, 저녁 9시에는 등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자리에 누우면 교사들이 자리옷을 입고 누웠는지 점검했다.

한옥 시대에는 기숙사에 5~6명을 수용하는 방이 5~6개 있었고, 본관이 낙성된 이후에는 방이 15개 있었는데, 각 방에는 8명씩 사용했으며, ‘큰아이
라’ 불리는 실장이 어린 학생들을 돌보아주었다. 식사는 식당에서 했으나, 설거지는 학생들이 조를 짜서 교대로 했다. 학생들은 각자의 밥그릇과 숟
가락, 젓가락을 가지고 낮은 식탁 주위에 둘러앉아 교사의 인도로 기도를 마친 뒤 상을 차렸다. 각 테이블마다 학생 한 명이 상차림을 맡았으며, 상차림 당번은 일주일씩 돌아가며 했다.
 
 
05.jpg
이화학당 교정에서 널뛰기 하는 모습
 
 
식당 부엌에는 큰 밥솥 가마 하나와 국이나 찌개를 끓이는 다른 가마솥이 하나 있어 장작으로 불을 때 음식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식당 바닥은 뜨끈뜨끈했고, 아랫목은 절절 끓었다. 당번은 밥통에 밥을 담아 큰 그릇에 담긴 김치와 함께 식탁으로 갖고 온다. 밥을 풀 때 당번도 아닌 어떤 학생들은 식모에게 팥밥을 달라했으며 그러면 시커먼 삼베 앞치마를 두른 식모가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솥 밑밥을 푹 퍼서 그 학생 밥그릇에 담아 주고, 흰밥을 달라고 하는 학생이 있으면 솥 위에 팥 물만 든 흰밥을 주걱으로 퍼주기도 하였다. 고깃국은 일주일에 한 번 나오는데, 푸짐한 곰국 같은 것은 구경할 수 없고, 반찬은 언제나 소금에 절인 소금김치 또는 깍두기 한 가지였다. 겨울 방학이 되어 학생들이 집에 다녀오면 고춧가루와 깨소금을 갖고 와 그것으로 양념간장을 만들어 돌려가며 먹은 것이 고작 호사스런 반찬이었다.

토요일은 한 주일에 한 조씩 교실과 예배실, 강당과 계단, 화장실 청소를 했으며, 개인적으로 정동 교회의 주일 예배에 참석할 준비, 기숙사 대청소, 빨래와 다듬이질, 머리감기, 다음 주 수업준비 등으로 할 일이 많았다. 학생들은 토요일마다 머리에 쓰개치마를 쓰고 오는 방물장사 아주머니에게서 풀이며, 물감들을 사서 옷감을 물들이고, 풀 먹여 식당 한쪽 마루에 놓여 있는 다듬이돌에 다듬이 방망이로 두드려 다듬어서 새 옷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
 
 
06.jpg
이화학당 1918년 졸업사진으로 추정 (뒷줄 오른쪽 끝이 유관순)
 
 
일요일이 되면 색색의 옷으로 단정히 차려입고 긴 머리를 묶은 붉은 댕기를 바람에 나부끼며 교정의 샛문을 통해 바로 옆 정동교회로 갔다. 교사들은 혹시 학생들 가운데 얼굴에 분을 바른 학생이 있지 않나 하여 일일이 얼굴을 조사해 분 바른 학생들은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했고, 벌로 일주일 간 밥을 짓게 했다.

일요일 오후에는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기도 하고, 편지를 쓰고, 소곤소곤 잡담을 하기도 한다. 일요일 저녁밥을 식당에서 먹고 교회에서 저녁예배를 보면 일요일의 일과가 끝난다. 일요일에는 롤 케이크, 수요일에는 감자 요리 간식이 나왔다.
 
한 주일에 한 번씩 고기를 주었고, 한 달에 한 번은 국수를 먹었다. 기숙사 시설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시설로 수세식 화장실, 냉온수가 항상 나오는 목욕탕, 스팀 난방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사감인 하란사 선생은 학생들에게 항상 흰 손수건을 왼쪽 소매 안에 넣어 다니게 가르쳤다.

머리는 길러서 땋아 허리까지 늘어뜨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조회시간이나 체조할 때 불편해 흰 리본이나 빨간 리본으로 머리를 매게 했다. 댕기도 점차 짧아졌고, 갑사댕기보다 검정색 토막 댕기가 유행했다. 대학부 학생들의 머리모양은 커트 머리에서 맨 머리로 다시 펌프도아(챙머리, 히사시가미)로 변하였는데, 펌프도아는 1907년 최활란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오면서 짧은 통치마에 양말과 구두를 신고 펌프도아 모습을 한 것이 유행의 시초였다. 신발은 처음에는 짚신, 미투리를 신고 비 올 때는 나막신을 신었는데, 이후 일부 학생들은 징 박은 가죽신을 신었고, 다시 더 간편한 경제화(운동화)를 신게 되었다.
 
 
07.jpg
이화학당 학생들의 모습
 
 
1915년경 이화학당은 유치원을 포함해 보통과(4년), 고등과(4년), 중학과(4년), 대학과(5년)의 과정이 있는 학생수 600명의 종합학원이었다. 대학과는 1910년에 설치되었다. 대학교육을 원하는 중등과 졸업생들이 생기고, 외국에서 교육시키는 데 따르는 많은 비용을 절감하며, 여성들에게 고등교
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1918년 보통과는 4년제 이화보통학교로, 고등과는 3년제 이화고등 보통학교로 되었다. 학년은 4월 1일에 시작해 3월 31일에 끝나는 일본 학제를 따랐고, 한 학년은 3학 기제였다. 여름방학은 6월 16일부터 석 달간, 겨울방학은 12월 25일부터 1월 5일까지 12일, 봄방학은 3월 21일부터 31일까지 11일간이었다.

학년이 끝나기 전 5월 31일이면 축제가 열렸다. 이화개교 기념 축제였다. 5월의 여왕이라고 하여 메이퀸을 선발하고 5월의 기둥, 메이폴을 세워 여러
꽃으로 장식하였다. 이 메이폴 주위를 돌며 춤을 추고, 다과와 즐거운 오락을 즐겼다. 이날 전교생은 배꽃을 상징하는 흰 옷에 머리에는 붉은 댕기를 드리고, 신은 하얀 미투리(麻鞋)를 신었다. 행사는 각종 운동경기, 음악 프로그램, 때로는 오페라의 몇 장면, 연극이 공연되기도 하였다. 오월의 여왕은 모범생에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리더십이 훌륭한 대학부 졸업반 학생이 선발되었다. 구경꾼들이 학교 담 너머까지 빽빽하게 들어차서 대혼잡을 이루었다. 10월 말에는 1주일간 김장방학이 있었다. 학생들은 교사들을 도와 겨울 동안의 먹거리를 준비하는 것을 도왔다. 이화학당 학생들은 맘껏 뛰놀고 공부한 자기들의 학교를 ‘이화동산’이라 불렀다.
 
 
08.jpg
이화학당 Recitation 홀
 
 
 
그러나 학생들은 기숙사 사감 하란사 선생이 퍼붓는 욕바가지에 항상 긴장해야 했다. 하란사 선생 눈에 무엇이 지적될지 예측할 수 없었고, 학생들이 규칙이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경우 하란사 선생은 욕바가지를 퍼붓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하란사 선생의 욕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일본의 식민지 교육정책을 기독교 학교인 이화학당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일본의 개국일인 2월 11일, 천왕의 생일인 천장절, 메이지 천왕의 생일인 11월 3일과 새해 첫날 즉 ‘4대 명절’에는 전교 학생이 모인 가운데 교장이 천왕이 내린 ‘교육에 관한 칙어’를 엄숙히 읽는 의식을 해야 했고, 이따금 학생들은 불시에 교육칙어를 외우고 있는지 시험받았다. 1914년부터 일본정서를 주입하기 위해 보통학교 수업에 일본 창가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일본인 교사들은 제복에 칼을 차고 수업을 진행했다. 한국인들의 기를 죽이고 열등한 국민으로 만들려는 식민지 노예교육이 학생들에게 가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