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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정과 경주 김씨가의
공인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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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영사정의 안마당 모습(대자보, 2014. 9. 3 김영조 사진)
 
 
2014년 9월 2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958번지, 낡아 허물어질 지경에 있던 옛 건물 영사정(永思亭)이 복원 준공되었다. 영사정은 300여년 된 경주김씨 의정공파(議政公派) 종중의 재사(齋舍)이다. 재사는 재실(齋室)보다 좀 더 격이 높은 건물을 말하는데, 영사정은 제사를 지내는 사당의 기능과 후손이 거주하는 주거공간을 겸한 독특한 구조이며 조선 중기의 건축적 특성을 잘 보존하고 있어 2010년 3월 24일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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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신과 인원왕후가 보호하고 왕위에 오르게 도운 영조대왕 초상화
 
 
 
우리는 영사정을 지은 김주신(金柱臣)의 처신과 공인으로서의 정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조선 제19대 숙종의 제2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 김
씨의 친정아버지로서 국구(國舅), 즉 국왕 숙종의 장인이었다. 숙종은 19세에 죽은 정비(正妃)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 1661–1680), 제1계비 인 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1701) 사이에 왕자를 얻지 못하자, 장희빈으로 유명한 소의(昭儀) 장씨를 총애하여 제20대 경종이 되는 왕자 윤(昀)을 얻고는 인현왕후를 서인으로 폐하여 궁에서 쫓아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한 처사를 후회하여 인현왕후를 5년 만에 다시 복위시켰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오래 살지 못하고 복위 7년 후인 1701년 34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소용돌이의 핵심이었던 희빈 장씨도 그 해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 사이에서 정국이 노론에서 남인으로, 남인에서 다시 노론으로 바뀌었고, 송시열이 사약을 받아 생을 마감하는 등 격변이 있었다. 이듬해인 1702년 다시 숙종의 제2계비 간택이 있게 되었다. 이때 3간택 과정을 거쳐 왕비가 된 것이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로서 영사정을 세운 김주신의 둘째딸이다.

김주신이 어떤 인물이었는가는 죽은 다음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卒記)가 잘 요약하고 있다.

“공은 청아하고 간결하며 거동에 법도가 옥처럼 깨끗하여 한 번 그를 보고도 단정하고 정직한 선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말을 할 때에는 온화하고 순수하며, 일을 처리할 때에는 치밀하며, 몸이 옷을 이기지 못하듯 행동을 조심하였고, 곧은 절개는 뺏을 수 없는 지조를 가졌으며,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태석인을 섬김에 공경이 지극하였고, 목소리는 온화하고 안색은 항상 부드러워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김주신의 처신과 공인정신
 
인원왕후는 앞의 두 왕비들이 단명했던 데 비하여 15세에 왕비가 되어 70세까지 장수했다. 인원왕후는 왕비로서 19년, 경종이 숙종에 이어 즉위하자
34세에 왕대비가 되어 4년, 경종이 일찍 죽자 이복동생 영조의 즉위를 도와 대왕대비로서 33년간, 그리하여 1757년 사망할 때까지 도합 55년간 왕실
을 지켰다. 그러므로 왕후 또는 왕실의 어른으로서 인원왕후의 지위는 오래도록 확고했다. 더구나 친정 부친 김주신과 함께 영조의 즉위에 절대적인
공을 세웠다. 그러므로 왕비의 아버지 김주신은 외척으로서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고, 청탁이 밀려들 수 있는 막강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런 위치에 있는 만큼 김주신은 극도로 행동에 조심했다. 그는 대궐에 들어서면 숨을 죽이고, 고개 숙이고 걸으면서 조금도 주위를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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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영사정. 우측면에서 본 모습 (대자보, 2014. 9. 3 김영조 사진)
 
 
인원왕후 김씨가 아버지에 대해 쓴 <선군유사>에 다음과 같은 부친의 일화가 나온다.

“선군(先君, 아버님)이 매양 금중(禁中, 대궐)에 출입하시매 소심(小心, 조심)하고 근신(謹愼)하사 다만 굽어 목화(木靴, 나막신) 부리만 보시고 눈을 굴려 곁으로 보시는 일이 없는 고로, 궐 중 당호(堂號) 현판과 출입하시는 길을 기식(記識, 기억하여 앎)치 못하시고, 전도(前導, 길 안내)하는 나인(內人, 왕과 왕비를 모시는여인)을 십년이 되었으되 그 얼굴을 분변치 못하시거 늘, 내 웃으며 묻자와 가로되, “몇 해를 거의 날마다 보는 사람을 능히 알지 못하심 은 어떤 까닭이니까?”

선군이 대답하시되 “신(臣)이 비록 마지못하여 명(命)을 받자와 금중에 출입하오나, 또 어찌 가히 눈을 들어 둘러보오리까? 또한 마음이 황송한 고로 눈 가운데 스스로 보이는 바가 없나이다.” 하시더라.[인원왕후 김씨, <선군유사>(정하영 교수 현대역)]“심지어 일찍이 자전(慈殿, 따님)의 병환을 살펴보러 들어갈 때 나이 어린 궁녀가 전각의 대청에 서서 피하지 않았다. 궁녀 동료들이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부원군은 사람을 쳐다본 적이 없으니, 내가 서있더라도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는 것이 궁중의 미담이 되었다. 김주신은 궁중출입을 하면서 그렇게 소심(小心)으로 근신하기를 20년이 되도록 하루같이 하였다. 5년간 교자를 타지 않다가 병환이 난 뒤로 교자를 탔으나 수행하는 사람이 매우 적었고, 다닐 때에 잡인을 물리치지 않았다.

김주신은 청빈했다. 딸이 왕비가 되어 신분이 귀하게 된 후에도 김주신은 가정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봉양을 매우 간소하게 했다. 김주신은 관복의
띠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서 사용하고 임금이 하사한 초관(貂冠, 담비꼬리로 만든 고관의 관)을 10년 동안이나 바꾸지 않았다.

항상 사치를 금지하여 부녀자들도 현란한 홍자색(紅紫色) 옷을 입거나 기괴한 물건을 차지 못하도록 하였다. 4살 때 부친을 여의고 부모를 기리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영사정을 지었으나, 그 규모나 양식을 보면 조금도 사치스럽게 집을 짓지 않고 다만 일찍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효성만을 담아서 소박한 재사(齋舍)를 마련하려고 했음을 알 수있다. 김주신은 청탁도 사절하고 혐의스러운 일을 멀리 피하였으므로 집안이 물처럼 깨끗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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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왕후가 어머니에 대해 한글로 쓴 선비유사
 
 
그는 집사람에게 “궁중의 일은 비록 하찮은 것이라도 발설하지 말라”고 엄하게 경계했다. 김주신은 소론 박세당(朴世堂)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당파에 휩쓸리지 않았다. 국구(國舅) 즉, 국왕의 장인이 된 후 그는 말과 행동에 더욱 조심하여 현실정치에 간여하는 것을 극도로 삼갔다. 그러나 김주신은 종사의 안정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 경종이 즉위하자 왕자가 없는 경종에게 배다른 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게 하여 왕위를 잇는 후계자가 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왕세제 책봉을 서둘러 추진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는 완강한 반대가있었다. 그러나 경종이 만성적인 질환을 앓고 있었고, 왕자를 생산하기 어려웠으며, 김주신이 일찍부터 이복동생 연잉군의 인물됨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왕대비 김씨는 연잉군을 왕실의 관례에 따라 자신에게로 입적을 하고, 친아들처럼 돌보았다.

마침내 경종이 재위 4년에 돌아가고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어 영조가 되었다. 영조는 이후 52년간 왕위에 있음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이루었으
며, 이후의 왕들이 모두 영조의 후사로 잇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경종수정실록> 2권, 경종 1년(1721) 7월 24일조)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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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신의 7대손으로 대종교 제2대 교주인 김교헌
 
 
“김주신이 이미 졸(卒)한 지 26일 만에 왕대비가 연잉군을 세워 세제(世弟)로 삼았다. 아! 종사(宗社)가 오늘날에 이르러 억만년(億萬年) 왕업의 기초(基礎)를 세우게 된 것은 모두 김주신의 힘이다.”

김주신의 지극히 반듯하고 진실하며 겸손하고 깨끗한 정신은 훌륭한 모범이 되고 엄한 가르침이 되어 그의 후손들에게로 이어졌다. 따님 인원왕후
는 당시 망국적인 당파싸움을 종식시키는 데 큰관심을 가졌다. 영조의 탕평책 이면에는 당쟁에 대한 인원왕후 김씨의 강력한 염려와 경계가 있었음
이 인원왕후 사후 영조가 친히 지은 <대행 대왕대비(大王大妃) 행록(行錄)>에 나타나 있다.
 
“아! 당론(黨論)은 바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근본이므로 이 폐단을 매우 염려하셨는데, 말씀이 간혹 이 문제에 미치면 반드시 척속(戚屬)은 서로 경계하여 편당(偏黨)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매우 강개하셨으니, (중략)
 
‘만약 편당(偏黨)이 없어진다면 나라를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셨다.”

영조는 김주신과 왕대비의 은혜에 감사하여 박동(礡洞, 현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 자리) 340간 왕자궁을 하사했다. 사대부의 집은 100간을 넘을 수
없었던 조선시대에 김주신의 손자 김효대(金孝大,1721~1781)는 궁궐과 같은 저택에 사는 것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워 팔고자 하였다. 이를 안 영조는
김주신과 인원왕후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을 그것으로나마 보답하고자 하니 승지 김효대에게 저택을 팔지 않도록 권고했다. 이에 김효대는 저택의 기둥을 모두 검은 먹물을 칠하도록 하였다. 후손들도 이 가르침을 받들어 조상 묘를 관리하는 데 필요한 묘답(墓畓), 묘전(墓田) 이외에 한 뼘의 묘답도 늘이지 않았다.

그 집안에서 한말까지 7대를 내려오면서 1영의정3판서가 나왔다. 5대손 김홍집은 내각총리대신이되어 개화정책을 이끌었고, 7대손 김교헌(金敎獻)
은 독립운동가이자 대종교 제2대 교주였다. 김교헌은 영조가 하사하고 팔지 말도록 당부한 박동 340간 대저택 경은가(慶恩家)를 처분하여 국권회 복을 위한 대종교 부흥에 쏟아 부었다. 이 때문에 후손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김교헌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귀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델이었다. 최초의 독립선언서라 할 수 있는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의 제일 첫머리에 나오는 인물이 김교헌이다.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사고가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세월호 사건은 한마디로 우리사회 각 부문의 ‘공인의식 실종’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기업주, 선장과 승무원, 선박검사기관과 허가 및 감독관청, 해상안전 관련 기관, 구조기관 등 관련된 어느 한 곳이라도 관계자들의 공
인정신이 깨어있었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났더라도 구명조끼를 입고 배 안에서 침착하게 구조를 기다리던 304명의 우리 아이들과 다
른 승객들을 다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월호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권력 핵심부에서 문건유출과 온갖 폭로와 고소고발사건이 터져나왔다. 거기다가 재벌그룹 3세 경영인
이 뉴욕 JFK 공항에서 출발하던 자기 회사 비행기 1등석에서 승무원의 땅콩 서비스 때문에 비행기를 다시 되돌린 ‘땅콩리턴’ 사건이 터져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다. 우리 사회 고위 공인들의 처신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폭풍처럼 질타하고 있다.

공인(公人)이란 ‘국가나 국민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공직자만 공인인 것은 아니다. 국민 다수의 안전, 이익, 행복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 또는 그런 지위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공인이다. 그런 지위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사사로운 입장이나 이익보다 공공의 이익, 안전, 행복과 대의를 먼저 생각하는 공인정신을 가져야 한다. 또한 처신에 품격을 갖추어야 한다. 영사정을 세운 김주신의 공인정신이 돋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별히 사회 지도층은 매사에 몸가짐,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철저하게 자신과 주변을 흠잡을 데 없이 관리하면서 공공의 복리와 대의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를 보여줘야 국민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우리 사회에 공인정신 회복운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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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문학박사·前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 연구위원·現 (사)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