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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삶의 주인이 돼
운명을 개척하는 근대인의 탄생
‘최초의 근대 개업의 안상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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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와 그 가족들
 
 
우리나라 최초의 개업의 해관(海觀) 안상호(安商浩)는 주어진 삶의 조건에 희생양이 되어 살지 않았다. 이를 박차고 나와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간 근대인의 한 전형을 보여줬다. 자칫 고아, 시골의 고단한 머슴으로 삶이 끝날 수 있었던 안상호는 자신을 묶고 있었던 사슬을 끊고 나와 의사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 도전과 노력을 통해 새로운 삶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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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건영 <춘경산수도>
 
   
안상호의 본관은 순흥, 문숙공파(文肅公派)로서 1872년 11월 5일 부친 안건영(安健榮)과 모친 전주 이씨 사이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 안건영은 <취화선(醉畵仙)>이란 영화의 소재가 되었던 장승업과 쌍벽을 이뤘던 조선말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이었다. 안상호가 태어나던 1876년 그해 부친 안건영은화원 중 31세의 가장 어린 나이로 고종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그리는 일에 참여하여 칭송을 받았다. 그 공로로 종6품 외관직인 찰방(察訪)에 제수되어 역참을 관리하던 관리로 일하였다. 그러나 윗대 고조부 안성보(安聖輔), 증조부 안국전(安國銓), 조부 안동헌(安東獻) 등은 과거시험 중 잡과의 의관 시험에 합격한 의원(醫員)들이었다. 그러므로 안상호가 의사가 된것은 집안의 피를 이어받은 것으로 우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의 집안에 불행이 줄을 이었다. 안상호의 형제 9남매 중 안상호 외 8명이 다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어릴 때 안상호도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몹시 얽어 ‘찰곰보’라는 말을 들었다. 1876년 안상호가 겨우 4살때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10세 때(1882년)는 어머니 이씨가, 다시 2년 후(1884년경)에는 원주군수로서 고아가 된 조카 안상호를 돌보던 작은 아버지 안도영(安道榮)마저 병으로 돌아갔다. 집안 남자들이 잇따라 다 돌아가자 수입이 없어 하인들을 부릴 수가 없었다.

작은 어머니네 아들인 사촌동생은 글공부를 하고 있었으나, 안상호는 아침밥 한 끼도 새벽같이 산에 가서 나무를 해줘야 얻어먹었으며, 10월에도 여름옷을 입고 떨면서 일하였다. 안상호는 서울로 떠날 생각을 했다.

18세 되던 1890년경 작은어머니는 집안의 주 노동력인 안상호가 떠날까봐 억지로 결혼시켰다. 안상호는 혼례를 올린 지 이틀째 되는 날 말없이 집을 나와 서울 마포의 부자 왕고모댁(崔씨 집)에 몸을 의탁하여 일을 도우면서 한문공부도 하고 신학문도 접하게 되었다.

23살 때인 1895년 4월 안상호는 새로 설립된 관립일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안상호는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일을 하며 1898년 10월 11명의 제1회 졸업생중 하나가 되었다. 안상호는 모교에 남아 일어 교관이 되었다. 그러나 일어학교 교관으로는 장래성이 없어보였다. 안상호는 일본어를 바탕으로 다른 학문을 수련할 생각을 하였다. 그는 양친과 8명의 형제가 다 병으로 죽었던 것을 생각하며 의사가 될 결심을 하였다.

안상호는 적십자병원의 와다 야치호(和田八千穗) 박사를 찾아가서 조언을 구했다. 와다 박사는 안상호에게 도쿄에 있는 자혜병원(慈惠醫院) 의학교 다카키가네히로(高木兼寬, 1849~1920) 남작에게 추천서를 써주었다. 안상호는 대한제국 관비 유학생 자격으로 일본 도쿄의 다카키 가네히로를 찾아가 입학 허락을 받았다.

안상호가 찾아간 다카키 가네히로는 자혜병원과 부설 의학교 설립자였다. 그는 미야자키(宮崎)현 출신의 하급 사무라이 계급으로 일찍이 서양의학을 배워 해군 군의(軍醫)가 되었다. 그는 영국 런던의 세인트 토마스 병원(St. Thomas Hospital)에 5년간 유학하고 돌아와 무료로 환자를 진료해주는 세인트 토마스 병원을 모델로 한 의료기관으로서 또한 일본 최초의 사립병원으로서 자혜병원을 열고 부설로 의학교와 간호학교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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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는 관비 유학생이었지만 가난했다. 그는 변두리 절 한 켠의 방에서 자취를 하면서 다카키 이사장의 주선으로 학교 해부실습실 준비와 청소를 하여 생활비를 보탰다. 점심은 학교에서 군고구마를 사먹고 때우며 열심히 노력하여 1학년 때부터 성적이 항상 2,3등을 유지했으며, 1902년 6월 28일 나이 30살에 졸업했다. 졸업식 때에는 메이지(明治) 천왕을 대신하여 참석한 가야노미야(賀陽宮) 비(妃) 앞에서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읽었다. 안상호는 졸업 후 모교 부속병원인 자혜병원에 남아 2년간 임상수련을 하였다. 병원실습 1년 후 의국장이 되었고, 해부학을 가르치는 한편 부설 간호학교에서도 가르쳤다. 이렇게 하여 그는 성공한 유학생의 모델이 되었다.

1906년 4월 30일 일본 도쿄에서 러일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개선관병식(凱旋觀兵式)이 열렸을 때 대한제국 황실에서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이 사절로 와서 약 두 달간 일본에 머물렀다. 이때 의친왕이 하코내(箱根)의 휴양지에서 병이 났다. 자혜병원에 한국인 의사가 있다는 말을 듣고 진료를 요청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의친왕은 안상호를 자주 불렀다. 이때 의친왕은 안상호에게 한국으로 같이 돌아가 한국 국민을 위해 봉사하라며, 귀국할 때 꼭 함께 귀국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이때는 의사면허 시험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올 수 없었다. 1906년 9월 의사시험에 합격했다.

안상호의 의술과 인품을 깊이 신뢰한 의친왕은 일본에 올 때마다 자신의 귀국 시에 동행하여 귀국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때의 안상호는 임상수련을 끝냈고, 의사면허도 받았으며 일본에서 인정받는 의사가 되어있었다. 안상호를 신임하여 중책을 맡기고 있었던 자혜병원 원장도 난감했다. 그러나 대한제국 황실의 의친왕 전하 부탁이므로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병원 측도 결국 안상호의 귀국을 양해했다.

안상호는 도쿄의 의친왕 저택에 자주 출입하게 되면서 그곳에서 사무를 보던 야마구치현(山口縣) 시모노세키(下關) 출신의 가와구치 이코(川口 イツ子)라는 여성을 소개받아 결혼했다. 35세 늦은 나이였다. 1907년 3월 21일 안상호는 의친왕을 수행하여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 돌아온 안상호는 황실 의사로 일하는 한편 의학교 교관으로서 가르쳤다. 안상호는 황제를 비롯한 황실의 의료를 책임지는 전의(典醫)로 일할 것을 여러번 종용받았다. 그러나 궁중의사는 의사이면서 관리였다. 성격상 격식을 싫어하며 실질적인 안상호는 관리 생활이 자신을 옥죄는 듯해서 싫었다. 그는 궁내부 촉탁의로서 1주일에 1회만 입시할 것을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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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호는 황실의 전의가 되는 대신 종로 3가 16번지(지하철 3호선 1번 출구 앞 현 국민은행 자리) 2층 빨간 벽돌집을 사서 아래층에 ‘안상호진료’라는 이름의 병원을 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의술을 베푸는 개인병원이었다. 얼마가지 않아 일하는 사람들이 점심도 제때 먹을 수 없을 정도로 환자가 밀려들어, 대합실이 좁아서 번호표를 받아 종로 길거리까지 환자가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였다. 의사 안상호는 진료소를 운영하는 한편 황실의 촉탁의로서 창덕궁·덕수궁의 광무황제, 순종황제, 황태자, 각 비빈, 내관 등 광내부 관리와 그 가족들의 진료도 했다. 특히 의친 왕궁에는 거의 전속되어 있는 형편이었고, 북촌과 남촌의 귀족이나 부호들 집안에서도 안상호를 초치하여 진료를 받았다. 1908년 1월 의친왕이 다시 일본을 방문할 때 의사 안상호는 의친왕을 수행했다.
 
당시 일본 의사들은 한국인 환자들에게 오만불손하게 대하였다. 이에 한국인들은 한국인이 하는 진료소를 환영하였다. 한국인 의사들이 하나둘씩 늘어가자 한국인 의사들은 일본인 의사들이 조직한 경성의사회에 대항하여 1908년 11월 초 의사연구회(醫事硏究會)를 조직하였다. 회장에는 1899년 자혜병원 의학교를 졸업한 선배 김익남(金益南)이, 안상호는 부회장이 되었다. 선배 김익남은 의사면허증을 따지 않고 귀국하여 의학교 교관, 육군 군의 책임자가 되었다. 의사연구회는 1909년 4월 정부에 대해 의사법을 제정, 공포하도록 청원하는 운동을 벌였다. 1909년 가을 서울과 수원 일대에서 콜레라가 유행했다. 서울에서만 매일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학교들은 휴교했다. 이에 콜레라 방역작업과 대중위생 강연에 안상호를 비롯한 민간의 의사들이 나섰다.
 
1909년 10월에는 한국인 의사들의 조직체인 대한의사총합소(大韓醫士總合所)를 조직하여 의사들에 대한 보수교육과 함께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들에게 무료로 약을 처방해 주는 사업을 했다. 그러는 중에도 엄귀비(嚴貴妃)의 병환을 돌보는 등 황실 촉탁의로서 일도 계속했다.

안상호는 부인 가와구치 사이에 4남 3녀를 두었다. 의사 안상호는 일본 부인과 결혼하여 국제결혼가족을 이룸으로써 ‘일선동화(日鮮同化)’의 모델케이스로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가 갑자기 서거하여 장례식을 앞두고 3.1운동이 일어났다.
 
안상호는 광무황제 국장에 이왕직 소속의 촉탁의로서 장의행렬에 참여하였다. 이후에도 안상호는 개업의사로서의 일과 황실 촉탁의로서의 일을 계속했다. 순종실록에는 촉탁 안상호 황실 요인 진료기록이 1920년 8월부터 1926년 순종 서거 전까지 18건이 나온다. 1927년 12월 31일 안상호는 병석에서 숨을 거두었다.
 
자칫 고아, 시골의 고단한 머슴으로 삶이 끝날 수 있었던 안상호는 자신을 묶고 있었던 사슬을 끊고 나와 의사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 도전과 노력을 통해 새로운 삶을 이루었다. 조선 최초의 개업의 해관(海觀) 안상호(安商浩)는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운명을 개척하는 근대인의 한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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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문학박사·前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 연구위원·現 (사)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