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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역사칼럼
충청도 선비들의 항일 의병전쟁 이야기
홍주성의 핏빛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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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5월 홍주성 의병 전투도(박흥순 작)
 
 
홍주는 충남 홍성의 옛이름으로, 한말 기호유림의 주요 중심지였다. 조선 후기 유학자들 간에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으냐 여부를 놓고 벌인 호락논쟁(湖洛論爭)이 벌어졌을 때 둘이 다르다는 충청도 호론(湖論)의 대표학자 남당 한원진(韓元震)이 이곳 남당리에 있었다. 한원진은 많은 제자들을 길러 보령, 예산 등에까지 제자들이 퍼졌다. 이 지역 유림들은 1876년 개항과 개화정책(開化政策)에 반대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군대를 조직하여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이렇게 홍주 주변지역 유림들은 시대 변화에 맞서는 면도 있었으나, 홍주 의병을 통해 의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대쪽 같은 선비정신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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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한 선생 홍주 의병장 민종식 초상화
 
   
 
1895년 10월 8일 왕후 민씨가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홍성의 기호유림 거두 김복한(金福漢)과 이설(李偰), 안병찬(安炳瓚) 등은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의병장으로 추대하려 했던 홍주 관찰사 이승우의 배신으로 이들은 체포, 압송되어 10년 유배형을 받았으나 얼마 후 특사로 풀려났다. (제1차 홍주의병)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김복한과 이설은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안병찬은 “대권이 모두 일인(日人)에게 넘어갔으니 천 장의 상소, 만 장의 공문서가 무슨 소용이랴” 하면서 의병을 모았다. 안병찬은 1906년 청양군 화성면 합천(合川)에서 일본군을 치다 패했다. 안병찬은 그해 2월 23일 박창로(朴昌魯) 등 40여 명과 함께 잡혔다가 4월 12일 풀려났다.
풀려나자마자 안병찬은 다시 300~600명의 의병을 모았다. 그는 참모역을 맡아 4월 16일 청양군 정산에 낙향하여 있던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여 청양군 광시(光時) 장터에서 의병의 깃발을 들었다. 지도부 대부분은 관직 경험이 없는 지역 유생이었으며, 11년 전 을미의병에도 참여했던 인물들이었다.

의병장 민종식은 일제와 부일매국 대신들을 성토하는 통문을 각처로 발송했다. 또한 서울에 주재한 각국 공사관에도 ‘호소문’을 보내 국권회복에 협조를 요청했다. 서양을 짐승의 나라로 보던 이전의 시각이 달라졌음을 보여주었다.

홍주의병은 홍주성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호응, 동참할 것으로 믿었던 홍주군수 이교석(李敎奭)이 성문을 닫고 저항했다. 이에 공주점령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그러나 200명의 일본군이 공주 진출로를 차단했다. 3월 17일 새벽 청양군 화성면 합천(合川)에서 홍주의병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안병찬·박창로·윤자홍·최선재 등 26명이 체포되고 군사들은 흩어졌다.
 
혹심한 탄압이 뒤따랐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각지로 흩어져 또다시 재기를 모색했다. 전주로 탈출했던 민종식 의병장은 기호유림의 또다른 중심지 여산(礪山)에서 30명 정도의 의병을 모았다. 서천으로 오니 의병은 300명으로 늘어났다. 다시 남포를 경유하며 5월 11일 홍산(鴻山) 지치(芝峙)(현 부여군 내산면 지터리)에 이르자 이상구·문석환(文奭煥)·정재호·이용규(李容珪)·김광우(金光祐)·조희수(趙羲洙)·이세영 등 유림들이 합류해 왔다. 400여 명의 의병진이 되었다. 이에 제2차 홍주의병의 깃발을 들었다.

5월 13일 홍주의병은 서천·비인·판교를 거쳐 남포에 이르러 공주부에서 출동한 관군과 5일간 치열한 공방전 끝에 관군을 물리쳤다. 이어 보령으로 진격했다. 군수 신석구(申奭九)를 통해 의병들을 모으고, 양총과 군량미를 확보했다. 이때 보령의 유학자 유준근(柳濬根)이 유생 의병인 ‘유회군(儒會
軍)’ 33명을 이끌고 의진에 합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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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병의 사상적 지주였던 남당 한원진 선생 영정 홍주성 남쪽 성벽
 
 
홍주의병은 결성(結城)을 거쳐 홍주성으로 나아갔다. 홍주성 4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성벽은 높았다. 이에 하수구로 신문천(申文天)과 천학순(千學順) 두 병정을 침투시켜 4대문을 열었다. 일본군은 성을 포기하고 거류 일인들을 이끌고 예산 방면으로 도주했다. 홍주성은 그날로 의병 수중에
떨어졌다.

홍주성 점령 소식이 전해지자 내포지역 사방의 유림 명망가들이 합류하고, 음양으로 지원해 왔다. 의병부대는 총포병 600명, 창병 300명, 그리고 유학자로 조직된 유회군(儒會軍) 300명 등 모두 1천 200명에 달하였다. 유생들의 부대를 위해 별도로 ‘유병소(儒兵所)’를 설치하였다.

홍주성을 점령한 의병장 민종식은 광무황제에게 을사5적과 이토 히로부미를 처형할 것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종은, “의병이 이미 수의(守義)의 명분이 있으니 억지로 멸해서는 아니 되고 단지 타일러 물러가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하며 군대를 동원하여 탄압하지 말도록 지시하며 은근히 지원했다.

그러나 일제는 홍주성 함락 다음날인 5월 20일 공주의 이와다(岩田) 경부가 이끄는 고문부 경찰과 수원의 헌병부대를 동원하여 성 안의 동정을 정탐하는 한편, 5월 21일 파상적인 공격을 가해 왔다. 5월 22일에는 서울 경무고문부의 키리하라(桐原彥吉) 경시를 비롯하여 21명의 경찰이 홍주로 증파
되어 왔다. 이들은 24일 공주진위대에서 파견된 관군 57명과 함께 의병을 공격했다. 의병대는 이를 물리쳤다.

이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한국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홍주의병 해산의 특명을 내렸다. 하세가와는 27일 오후 대대장 다나카(田中) 소좌 이하 보병 2개 중대를 홍주로 급파했다. 경성 헌병대대 대위 이하 26명, 전주 수비대 1개 소대병력도 추가 파견했다.
일본군은 1906년 5월 31일 새벽 2시 반 서문의 불빛을 신호로 총공격을 시작했다. 3시경 기마병 폭파반이 동문(조양문)을 폭파했다. 일본군 보병이 기관포를 쏘며 성문 안으로 진입하고 헌병·경찰대가 뒤따랐다. 또한 갈매지 남쪽 고지와 교동 서쪽 도로 입구에 각각 1개 소대를 배치하여 의병들의 퇴로를 차단했다. 의병측은 성루에서 대포를 쏘면서 대항하였으나 북문도 폭파되어 일본군이 들어왔다. 의병은 백병전을 펼치며 결사적으로 방어했으나 일본군 화력을 당할 수 없었다. 오전 6시 민종식 등 약 100명은 성을 탈출했다. 오전 7시경 성은 일본군에 점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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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 이남규 선생 고택 사랑채 수당 이남규와 아들 충구, 하인의 순국지 조난비
 
 
그후 6월 7~9일경까지 약 열흘간 수색과 무자비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6월 14일 주차군 참모장은 학살 83명, 피체 154명으로 보고했다. 그러나 홍주의병의 유병장 유준근 일기에는 의병 300명이 순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홍주성 전투 직후 부임한 군수 윤시영(尹始永)은 일기에서 “의병 시신 83구를 매장했고, 또 목이 잘린 시신 15구를 찾아내어 6월 8일 매장했”고, 사상자가 몇 백 명인지 알 수 없으며, 사방 수십리 지경 이내는 인적이 끊기고 잡힌 사람이 160여 명인데 모두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들으니 심히 참혹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홍주성 함락 후 살아남은 의병들은 해미·청양 등지로 탈출하여 의병을 규합하여 다시 항일전을 벌였다. 민종식의 처남 이용규는 그해 7월에 청양군 유치(杻峙)에서 군사 400명을 모은 뒤 연산 부흥리(富興里)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그뒤 이용규는 1906년 10월경 예산군 한곡(閒谷), 현 대
술면 상항리 수당 이남규(修堂 李南珪, 1855~1907)와 그 집에 피신해 있던 민종식 등을 만나 예산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

일제는 이남규가 민종식을 숨겨주고, 홍주지역 제3의 항일의병 구심점이 되어가자 1907년 9월 26일, 기마병 100명을 동원하여 예산 대술의 집을 급습하였다. 일본군이 포박하려 하자, 그는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욕보일 수는 없다(可殺不可辱)”고 하며 가마에 올라 집을 나섰다.
 
서울로 압송해 가던 일본군은 이남규를 회유하여 귀순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완강하게 거부하자 온양 근교 평촌(坪村)에서 이남규와 그를 따르던 장자 이충구, 그리고 하인 김응길(金應吉)을 무참히 살해했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칠갑산·해미·대흥·서산을 비롯하여 당진 소난지도, 경기도 안성·용인 등지에서 투쟁을 계속했다. 목숨을 버릴지언정 대의를 저버릴 수 없다는 조선 유학자들의 정신은 이렇게 식을 줄 모르고 홍주의병 항쟁에서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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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 문학박 사·前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現 (사)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