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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주인이신 창조주,
이미 그 신성을 만물에게 보여 알게 했다
- 글 이상면 글마루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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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은 말 그대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천지 즉, 영계라고 하는 영의 세계와 육계라고 하는 육의 세계를 창조하셨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신(神)이요 영(靈)이시다(요 4:24). 영은 볼 수도 만질 수도 냄새도 없다. 하지만 존재하며 나아가 역사(役事)한다. 나무가 흔들린다는 것은 바람이 존재한다는 증거요, 라디오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전파가 존재한다는 것이니,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궁궐에 왕을 보지 못하였다 하여 궁궐 안에 왕이 없다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한 창조주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계획을 수많은 선지사도들의 피를 대신해 가며 기록하게 해 남기셨으니 오늘날 신앙인들이 접할 수 있는 경서다.
 
또 그 경서를 통해 우리에게 신의 섭리를 알게 하신다. 경서뿐만이 아니라 지으신 만물(행 17:24, 히 3:4) 안에 신의 본질과 관념을 넣어 우리로 느끼고 깨달아 알게 하신다(롬 1:20).
 
즉, 신과 경서(말씀)와 만물은 하나며, 상호 서로를 증거하고 증명하는 필요충분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얼마 전 경북 영주에 위치한 부석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곳 부석사는 화엄종의 아미타여래를 모신 법당 즉, 국보 18호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무려 4개의 문화재가 국보로 지정 보존돼 있는 곳이다. 이 무량수전은 한국 건축미의 극치를 말해주며, 나아가 귀솟음양식이 적용된 고건축물의 대표적 사례로 무량수전에 있는 부석사는 불도뿐만 아니라 일반 학도 나아가 전 세계인이 찾아드는 곳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하지만 이 부석사를 통해 느끼고 깨달아야 할 것은 정작 따로 있으니 종교적 의미다. 먼저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다. 무량(無量)은 불교적 의미로 지혜가 한이 없다라는 뜻이며, 게다가 목숨 수(壽)를 써서 생명이 끝이 없는 것이다. 인도말로 하면 ‘아미타’요 한자로 하면 ‘무량수(無量壽)’다.
즉, 이 말은 사망이 없는 영원한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을 암시하는 예언적 단어다. 이는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팔만 또는 팔만사천에 담긴 의미와 팔만대장경 중 하나인 ‘법멸진경’에 기록된 내용과도 일맥상통하다. 즉, 불교가 추구하는 세계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영원한 세계를 약속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대목이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은 극락세계, 이 극락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살아서 가는 극락임을 가르쳐 왔다. 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는 다른 게 아니라 하나라는 일체사상을 가르쳐 왔다.
 
또 이 부석사엔 ‘부석(浮石)’이란 돌이 하나 있다. 부석사(浮石寺)란 이름이 붙게 된 이유가 되는 돌이다. 부석(浮石)이라함은 떠 있는 돌 즉, ‘뜨인 돌’이다. 이는 땅 즉, 세상과 구별돼 하늘에 속했다는 의미가 된다. 당시 의상이 이 절을 창건할 때 창건을 훼방하는 이 지역의 이교도(異敎徒)들과 싸울 때, 이 돌이 이교도들을 물리쳤다는 설화에서 이 부석은 신성시되고 있다.
 
이제 살펴볼 것은 성서의 내용 또한 불교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예수의 제자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라 했고, 예수도 친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했다면, 종교의 목적은 하나라는 얘기가 된다. 문제는 이 대목에서 예수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40)”고 했으니, 불교의 무량수전이나 성서의 영생이나 우리에게 ‘마지막 날’이라는 이루어질 ‘한 날’이 약속으로 남아 있음을 깨닫게 한다. 또한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단 2:43)”라고 기록됐듯이 부석(浮石) 즉, 뜨인 돌이 등장한다. 다니엘서는 예언서다. 장차 나타날 뜨인 돌은 돌이 아니고 세상과 구별된 예수를 가리키고 있으며, 그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로 초림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이 진리가 아닌 비진리로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는 무리들과 싸워 이기게 될 것을 약속하는 내용이다.
 
유교 문화에서도 도연명의 ‘무릉도원’과 같이 영원한 세계를 한결같이 노래하고 있으니, 모든 역사와 문화는 바로 종교의 역사요 문화였으며, “너희 자손들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신 31:21)”고 기록된 말씀과 같이, 이 모든 사연이 더 이상 예언이 아니라 이루어질 때 증거가 되게 하려 함인 줄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유불선을 포함한 모든 종교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숲을 보고 나무를 보라’는 말이 있다. 종교의 궁극적 이념과 목적은 아랑곳없이 자기 종교에만 골몰해 남의 것은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는 몰지각한 신앙은 금해야 한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말씀이 있다. 내 안에 들보를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만 트집 잡는 행위는 바로 내 안에 진리가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행위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진리는 자유함을 주므로 이해와 배려와 용서를 낳게되니 그야말로 진리로 자유한 자가 되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야겠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