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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1월 러일전쟁 개전을 앞두고 이미 대한제국은 ‘보호국’ 처지로 전락해 갔다.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가지고 압박했다. 거기엔 ‘일본의 군사행동에 필요한 편의제공’과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시로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종은 1월 21일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2월 9일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하기 전에 지상군 선발대 2천 명을 인천을 통해 서울에 진주시켰다. 중립선언은 무의미해졌다. 그 전에 일본은 이 조약체결에 반대할 만한 인물을 격리 조치하였다. 황제의 최측근이자 반일 인사인 이용익은 의정서 체결 전날 일본군에 납치되어 10개월간 일본에 연금되었다. 그밖에 고종 측근의 반일성향 인사들은 외국이나 지방으로 보냈다.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는 체결되었다. 의정서에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보호국’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1904년 8월 22일 일본은 다시 ‘제1차 한일협약’을 통해 한국정부에서 일본인 또는 일본이 추천하는 사람으로 외교·재정고문을 두게 하고, 그밖에도 궁내부, 경무청, 학부, 법부, 군부, 농상공부 등에도 고문이나 보좌관, 교관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인들을 두게 했다.

일본 육군은 러시아 육군에 대해 연전연승했다. 러시아 해군은 뤼순항의 봉쇄로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이를 구하기 위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동해상에 나타난 발틱함대는 1905년 5월 31일 일본 해군에 궤멸되었다.

러·일전쟁이 승리 국면으로 돌아가자 일본은 한국에 대한 침략적 방침을 결정하였다. 첫째, 군사적으로 한국을 위협할 수 있는 군대를 계속 주둔시킨다. 둘째,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를 막는다. 셋째, 한국 군대를 감축 또는 해체하여 무력화시킨다는 계획이었다.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데는 국제적인 동의와 묵인이 필요했다. 1905년 7월 미국 육군장관 윌리엄 에이치 테프트(William H. Taft)가 필리핀으로 가는 길에 일본을 방문했다. 테프트는 장관 부임 전 수년간 필리핀 총독을 지낸 미국 최고의 아시아통이었다. 그는 1905년 초 육군장관이 되어 미국의 해외 식민지 정책의 최고 책임자로 역할을 담당했다. 미국으로서는 러시아를 꺾은 일본이 태평양 상의 필리핀 같은 미국의 식민지를 넘보는 야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의심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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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 동경 제국호텔에서 마주앉은 가쓰라와 테프트 두 사람은 러일전쟁 후 미일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가쓰라는 일본이 필리핀에 대해 하등의 야심이 없음을 단언했다. 이에 대해 테프트는 조선에 대한 일본 지위의 정당성을 인정하며,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은 동양평화에 공헌할 것이라고 일본의 입장을 지지했다. 미국 의회는 비밀외교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런 내용을 각서로서 교환했다. 미일 간의 각서 교환으로 일본과 미국 간의 전쟁 가능성을 감소시켰다며 미일 양쪽에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의 희생을 전제로 일본과 협약을 맺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일본이 얼마나 기만적이었던가를 깨닫는 데 미국은 비싼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로부터 36년 뒤 일본은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 미국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함과 동시에 필리핀과 남태평양 전역에 기습침략을 감행하였다. 미국 영토에 대한 외국의 공격은 역사상 처음이었다.   

1905년 8월 12일 일본은 영국과도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해 조선의 보호국화에 대한 양해를 받았다. 그 해 9월 5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미국의 중제하에 일본은 러시아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그 자리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위를 공인받는 자리이기도 했다.

1905년 11월 2일 일본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를 보호조약 책임자로 파견하고, 1주일 뒤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파견하였다. 11월 9일 이토는 광무황제를 배알하고 나온 후 11월 15일 다시 황제를 배알하며 ‘한일협약안’이라는 것을 꺼내 보이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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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안을 승인하시거나 반대하시거나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거부하시면 조약을 체결하는 이상으로 더 불리한 결과도 각오하시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고종은 정부 대신들에게 물어보겠다며 일단 미루었으나 절대 윤허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하야시 공사는 대신들을 초대하여 조약안을 설명했다. 대신들은 황제가 참석한 어전회의에서 뜻을 말하겠다고 했다. 하세기와 오시미치(長谷川好道) 주한 일본군 사령관은 대신들과 국새(國璽) 관리자를 철저히 감시했다.

11월 17일 하야시 공사는 한국 정부의 각부 대신들을 공사관에 불러모아 한일협약을 승인하도록 위협하며 설득을 했으나 오후 3시가 되도록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에 다시 경운궁(덕수궁) 중명전(수옥헌)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무장 일본군이 궁궐 주변을 겹겹이 둘러싸고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조약에 찬성하는 대신 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황제는 이토의 알현을 거부했다.

이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일본의 협약안을 거부한다는 결론이 났다. 이에 이토는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를 대동하고 세 번이나 광무 황제를 배알하고 대신들과 의논하여 원만한 해결을 볼 것을 강박하였다.

다시 광무황제가 불참한 가운데 어전회의가 열렸다. 여기서도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일본 공사는 이토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토는 하세가와 사령관을 데리고 들어와 다시 회의를 열었다. 이 날 회의에 참석한 대신은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이었다.

각 대신들 개개인에게 의견을 물었다. 한규설과 민영기는 조약체결에 적극 반대하였다. 이하영과 권중현은 소극적인 반대의견을 내다가 권중현은 나중에 찬의를 표하였다. 다른 대신들은 이토의 강압에 못이겨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 의사를 밝혔다. 격분한 한규설은 고종에게 달려가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게 하려다 중도에 쓰러졌다.

이날 밤 이토는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뒤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약을 승인받았다.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의 5명이 조약체결에 찬성하여 ‘을사오적(乙巳五賊)’이 되었다. 자정이 넘은 11월 18일 새벽 1시 반에서 2시 사이였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11월 17일로 알려진 을사5조약의 날자는 정확히는 11월 18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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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협적 분위기 속에서 강압에 의한 조약은 무효인데다가, 국왕의 비준도 없고, 형식과 절차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국제 조약으로 효력을 가질 수 없는 이 ‘조약’에 의해 일본은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외교관계를 차단하고, 통감부를 설치해 한국 내정을 일본이 좌지우지하는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되자 11월 20일 황성신문에서 ‘시일야 방성대곡’ 즉 ‘이날을 목 놓아 통곡한다’는 장지연의 사설을 발표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조약에 찬성한 대신들을 공박하였고, 전 국민도 이에 분격하였다. 광무황제는 나흘 뒤인 11월 22일 황실고문 헐버트에게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 양국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도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 정부에 전
달하기 바란다”며 거부의 뜻을 만천하에 공포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간판만 내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광무황제의 시종무관장 민영환은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전 좌의정 조병세, 전 참판 홍만식, 전 대사헌 송병선, 학부 주사 이상철 등의 인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일본의 부당한 주권침탈에 항의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그 중 가장 크고 치열했던 의병항쟁이 민종식을 중심으로 충청남도의 홍주(지금의 홍성)에서 일어났다.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려는 기독교청년회, 헌정연구회, 자신회, 대한자강회, 동아개진교육회, 서우학회, 상업회의소 등이 문화운동을 표방하면서 국민계몽과 비밀결사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부분 황제와 대신이 잃어버린 나라를 우리가 나서서 되찾아야 할 것 아닌가 하고 나선
‘보통사람’들이었다. 바야흐로 ‘보통사람’들의 특별한 희생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비(非) 노블레스들의 오블리주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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