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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39도선(혹은 38도선) 분할 제안
 
1895년 한반도를 둘러싸고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청국을 꺾고 한반도를 거의 손에 넣은 듯했던 일본은 1896년 2월 광무황제가 일본의 감시망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여 러시아의 보호 아래 들어가자 하루아침에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는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청일전쟁
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후유증을 앓고 있었던 일본은 조선을 두고 러시아와 무력대결을 벌이기에는 시기상조라 판단했다. 일본은 러시아와 협상을 벌였다. 아관파천과 친러정권을 인정했다. 왕후 민 씨를 살해한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의 책임도 시인했다. 동시에 일본군 병력을 줄여 철수하는 데 상응하여 러시아군의 감원과 철수를 이끌어 냈다.

1896년 5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Nikolai Ⅱ)가 황제에 오르는 대관식이 열렸다. 대한제국에서 민영환(閔泳煥)을 전권 대사로 파견했던 그때 일본에서는 외상 야마가타(山縣有朋)가 참석하여 러시아외상 로바노프(Rovanov)와 비밀협상을 벌였다. 일본은 39도선을 경계로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자고 제안했다. 러시아는 처음엔 일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내심 조선 전역을 차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다만 한반도에까지 진출할 경우 영국, 미국, 프랑스등이 반발할 것을 우려했다. 일본과 러시아는 39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하기로 잠정 합의했다.

그후 일본은 조선을 독차지 하고 싶었다. 일본은 러시아에 만주를 러시아가 차지하는 대신 한반도는 일본이 차지하겠다고 만주-한반도 교환을 제안했다. 이에 러시아는 39선 분할안을 제시하면서 39선 이북을 중립지대화하자고 역제안(1900~1903)했다. 일본은 러시아의 제안을 거부하고 한반도
와 만주를 독차지하고자 러시아와 일전을 벌일 각오를 하게 되었다. 1900년 6월 중국 의화단(義和團)이 러시아가 건설 중이던 치타-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동청철도(東淸鐵道)를 공격하자, 러시아는 18만 명의 군대를 파병하여 만주의 주요지역을 점령했다. 영국과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러시
아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러시아와 영국과 손잡은 일본이 대립의 강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대한제국 중립화운동

청국과 일본, 러시아에 둘러싸여 점점 위기로 빠져들고 있었던 1880년대, 조선의 외교고문 뮐렌도르프는 조선이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벨기에와 같이 중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독일 부영사 부들러도 스위스의 경우 강대국들이 조약을 체결하여 영토를 보전해 준다며 중립화를 권고했다.

1891년 고종은 주한 미국공사에게 미국정부가 스위스의 분할을 방지하는 조약을 한국에도 적용하는 일을 주도해 주도록 요청했다. 1897년에는 청국 주재 영국 공사 맥도날드를 통해 영국정부가 주도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받게 해줄 것을 요청했다. 1899년 봄 고종은 미국으로 떠나
는 알렌 미국공사를 통해 미국정부가 주도하여 열강에 의한 한국 독립과 영토보전을 보장해줄 것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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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정부는 중립화 추진을 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다 청국의 압력을 받아 해임된 뮐렌도르프(Paul Georgvon Möllendorff, 한국 이름 목인덕穆麟德, 1848~1901)를 다시 고빙하고자 수차에 걸쳐 시도하다 실현하지 못하자,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William Franklin Sands, 山島; 1874~1946)를 궁내부 찬의관(宮內府贊議官) 겸 외부 고문(外部 顧問)으로 고빙했다. 샌즈는 한국을 열강의 보장을 통해 스위스나 벨기에 같은 영세중립국으로 만들려 했다. 고종은 1900년 청국의 의화단사건으로 열강이 파병하여 청국이 분할될 위기에 놓이자 아오키(靑木)
일본 외상과 주일 미국공사 버크를 통해 한국을 스위스나 벨기에 같은 중립국화하는 데 노력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는 일본이 자국 상비군을 한국에 주둔해 둔 상태에서 한국의 중립화를 획책하는 것으로 보고 중립화안에 강력 반대하였다. 미국도 시종일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이와 같이 열강의 협조를 통한 중립화 추진은 성과 없이 끝났다.

러일전쟁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이 노골화되자 대한제국은 1903년 11월 23일 세계 각국에 장래 러일전쟁 개전 시에는 국외중립을 지킨다고 선언했다. 그 후 러일전쟁 시작 2주일 전인 1904년 1월 20일 대한제국은 다시 영세중립을 선포하고 미국, 일본, 러시아, 중국 정부에 이를 통보하면서 연합국은 조선에서 전쟁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 다음날 중국의 지부(芝罘)에서 프랑스어로 국외중립 선언을 세계 각국에 타전했다. 그러나 러·일·미 등 중립화 실현에 핵심적인 국가들은 대한제국의 중립선언에 무관심하거나 거부하는 입장을 보였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전쟁을 지지했다.
일본은 1904년 2월 8일 밤 선전포고 없이 여순항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기습하고 항만 입구를 봉쇄했다. 러시아 해군이 묶인 틈을 타서 일본은 9일 인천항의 러시아 군함 2척을 격침시킨 다음 10일에야 선전을 포고했다.

일본은 5월 5일 제2군을 요동반도에, 제1군은 인천에 상륙시켜 조선의 전시 국외중립 선언을 무시하였고, 서울을 점령하여 군사적 협박 아래 일본의 전쟁 수행에 지원하도록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케 하였다. 그후 압록강을 건너 러시아가 장악하고 있는 만주로 진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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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전의 일본군은 수차 교전을 거치면서 러시아군을 다렌과뤼순 쪽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뤼순 요새 공략을 맡은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 중장의 제3군은 고지식하게 정면 언덕을 향해 공격을 수없이 시도했다. 공격은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실패했다. 그러나 결국 여러 개의 11인치(280mm)
크룹곡사포 포대들의 지원으로 일본군은 1904년 12월에 언덕 위 요새를 점령했다.

한편 러시아 육군은 매번 일본군 공격에 상대적으로 더 많은 사상자를 내며 물리쳤다. 그럼에도 1905년 1월 2일 148일간 포위당한 끝에 시베리아 제3군단 사령관 스테셀은 다른 상급 장교들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물자와 병력이 충분했음에도 일본인들에게 요새를 내주고 말았다(1904년 12월). 일본군 장성들도 깜짝 놀랐다. 스테셀은 1908년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가 후에 사면되었다.

해상에서는 지노비 로체스트벤스키(Zinovy Rozhestvensky)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발틱 함대가 북유럽 발틱해로부터 희망봉을 거쳐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여순 함락 후 5개월이나 지난 후에야 겨우 일본 근해에 나타났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원수가 이끄는 일본 해군은 영국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함대가 쓰시마해협을 통과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할 것을 알고 기다렸다가 1905년 5월 27, 28일에 요격하여 궤멸시켰다. 만주지방의 러시아 육군은 연패 당하면서도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으나, 국내에서는 이미 혁명조직이 공장노동자는 물론 일반시민이나 군대 안에도 파고 들어와
있었다. 러시아정부도 더 이상 전쟁을 진행시키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의 데오돌 루즈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가게 되었다.

110년 전 독자적으로 자기 나라를 지킬 힘없이 주변국의 보장만을 기대한 대한제국의 중립화 운동은 어느 강대국의 이해를 받거나 협조도 받지 못했다. 결국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들어가 일본으로부터 전쟁협력을 강요당했으며, 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고, 마침내 식민지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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