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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파 대신들에 대한 퇴진운동을 벌였다. 고종으로서는 그런 독립협회가 사사건건 민중을 끌어들여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것 같아 심히 불편해했다.

독립협회는 점차 심각해지고 있는 1인 전제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는 의회 설립운동을 시작했다. 독립협회는 1898년 4월 3일 ‘의회원(議會院) 설립의 긴요성’으로 주제로 정하여 토론회를 개최하고, 이어 4월 30일자 ‘독립신문’에 의회설립 필요성에 관한 장문의 논설을 게재하였다. 또한 광무황제에게 서양의 전제정치하 상하원(上下院)처럼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원(議會院)을 설치하자고 제안하였다. 국왕의 응답은 부정적이었다. 독립협회는 7월 11일 재차 상소하였다.

“유럽 여러 나라는 비록 전제정치를 하는 국가라 하더라도 상·하 양원을 두어 국사를 자문하고 언로를 열어두니 황제께서도 여론을 겸손이 따라주소서.”
 
그러나 고종은 이렇게 답했다. “조정의 일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직분을 넘어 망령되게 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독립협회는 작전을 바꾸었다. 우선 의회설립에 찬동하는 개혁파 정부를 먼저 수립하게 만들어야 되겠다고 판단했다. 1898년 10월 1일부터 12일간의 철야 상소시위를 벌였다. 구한말 판 촛불집회의 시작이었다. 마침내 개혁파 정부가 들어섰다. 10월 14일 독립협회와 정부대표가 마주앉아 의회 설립
에 합의하였다.

황제는 의회설립을 두려워했다. 독립협회는 정부 관리들과 함께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다시 관민공동회를 열어 ‘헌의6조’를 관민합의로 올렸다. 그 제1조는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한마음으로 힘을 합하여 ‘전제 황권을 견고하게’ 할 것”이라 함으로써 황제의 두려움을 잠재우고
황제를 존중한다는 내용과 함께,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등을 건의했다. 이에 황제는 종래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을 의회격인 의회원으로 개편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정부는 새로운 중추원 관제를 제정해서 11월 4일 공포하였다. 한
국역사상 최초로 의회를 설립하는 법률이었다.
 
새로운 중추원 관제는 50명 정원에 25명을 민선으로 뽑고, 나머지 25명은 황제가 임명하여 구성하나, 입법권, 조약 비준권, 행정부 정책에 대한 동의권을 통한 감사권, 행정부 건의에 대한 자순권(諮詢權; 다른 기관에 의건을 구하는 것), 건의권 등을 갖추어 근대국가의 의회 기능과 역할을 모두 갖춘것이었다. 외국공사들은 시민들의 힘에 의해 의회가 설립되는 것을 보면서 “일종의 국민의회(Popular Assembly)의 개설을 보장받는 데 성공했다”고 경탄의 목소리로 본국에 보고했다. 민선의원 25명은 독립협회가 뽑도록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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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식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 대신들은 “이렇게 되면 우리들은 권력에서 배제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감에 떨었다. 11월 4일 밤 광화문 거리에 익명의 벽보가 붙었다. “독립협회가 박정양을 대통령으로 하여,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정부를 수립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광무황제는 보고를 받고 깜짝 놀랐다. 그렇잖아도 마뜩치 않아 했는데 역모라니. “독립협회를 반역단체로 규정하여 해산시키고 이상재 등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긴급체포하라”는 포고가 떨어졌다.
 
조병식이 이끄는 수구파 정부가 수립되고 새 중추원 관제는 취소되었다. 이에 서울시민들은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이미 수차례 서울 시민들은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민의의 광장을 자발적으로 열어왔었다. 만민공동회는 11월 5일부터 경무청 앞에서 시작되어 만 6일 동안 철야집회를 하며 광무황제와 정부의 조치에 항의했다. 고종은 하는 수 없이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석방했다. 서울시민들은 해산하지 않고 종로로 옮겨 철야시위를 계속하면서 ①독립협회 다시 허가 ②모략배의 재판 ③헌의6조 등의 실시를 요구하였다. 고종이 요구조건을 승낙하지 않자 11월 15일 만민공동회를 덕수궁 인화문(仁化門) 앞으로 옮겨 턱 밑에서 압력을 가중시켰다.

11월 21일 고종과 수구파들은 황국협회(皇國協會) 보부상 약 2000명을 서울로 불러들여 만민공동회를 기습하였다. 분노한 시민들이 마포에까지 몰려가서 보부상들을 공격하였다.고종과 수구파 정부가 만민공동회의 압력에 굴복하여 보부상의 혁파를 명령하였다. 그러나 고종과 정부가 실천하기로 약속한 위의 3개조 요구사항에 진전이 없자 2일 뒤인 11월26일 종로에서 다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놀란 고종은 돈례문(敦禮門) 밖까지 나와 시위군중의 요구를 들어 줄 것은 친히 약속했다.

고종과 수구파는 독립협회를 다시 문 열도록 허락하고 1898년 11월 29일 국회의원격인 50명의 중추원 의관을 임명하였다. 이때 친러수구파들은 중추원 의관 중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가 선출하는 민선의원을 없애고 모두 정부가 임명하는 관선(官選)으로 바꾸었으며, 당초 독립협회가 절반인 25
명을 뽑게 되어 있던 것을 17명으로 줄이고 보부상 계열을 29명으로 늘려 원내 다수가 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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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공동회가 이렇게 활동하자 전국에서 의연금이 쇄도하고, 평양에서도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으며, 독립협회의 지회들이 전국 각지에서 연이어 설립되었다. 1898년 11월 5일부터 12월 23일까지 고종이 직접 나와 의사를 밝힌 후 6일간을 제외하고 42일간이나 만민공동회가 철야로 전개된 끝에 마침내 11월 29일 중추원 의관 50명을 임명하게 되었다. 이 전과정을 주도한 23살의 이승만도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이리하여 대한제국 의회가 설립된 것이다. 독립협회는 새 개혁정부를 위해 강력하고 유능한 인물 11명을 천거했다. 만민공동회는 중추원이 천거한 인물들을 인준했다. 그 중에 박영효가 포함되어 있었다. 박영효는 민 왕후 암살을 기도하다 탄로나 일본에 망명 중이었다. 이에 분노한 고종은 시위대와 보부상을 동원하여 12월 23일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고 독립협회를 다시 불법화시켰다.

고종은 법제연구를 명하여 이듬해 대한제국의 헌법격인 9개조로 된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를 공포했다. 그 핵심은 대한제국은 ‘황제의 나라’라는 것(제1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만세에 걸쳐 변하지 않는 ‘전제정치’라는 것(제2조), 대한국의 황제가 ‘무한한 군권’(君權)을 향유한다고 함으로써 국민 참정의 길을 봉쇄하고, 절대적인 황제권을 ‘무한하게’ 갖도록 명시한 것이었다.(제3조)
‘영원한 제국’을 위한 이 헌법은 불과 6년을 가지 못하여 일본으로부터 을사늑약을 강요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의회가 없고 황제가 전권을 무한하게 갖는다고 하였음으로 황제는 일본 특명전권공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부터 직접 압박받게 되었다.

황제는 이 압박을 피하여 대신들에게 논의를 맡겼다. 그러나 대신들 중에 이러한 부당한 요구에 목숨을 바쳐 저항할 대신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일본은 대신들을 압박, 회유하여 손쉽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을 수 있었다. 그리고 5년 뒤, 황족과 대신들을 우대한다는 조건을 제시하며 일본은 대한 제국 주권을 통째로 손에 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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