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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마오리(Maori)’족의

명칭 유래와 50달러짜리

지폐에 얽힌 이야기


글. 박춘태(중국 북경화지아대학교 기업관리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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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리족의 하카춤
 


1769년 제임스 쿡 선장이 이끄는 영국 탐험대는 뉴질랜드로 항해하던 중 ‘타히티’라는 섬에 들른다. 그들은 그곳에 있는 ‘투파이아’라는 원주민을 설득하여 승선하게 한다. 같은 해 10월 6일 새벽, 제임스 쿡 선장이 이끄는 영국 탐험대는 기습적으로 뉴질랜드 기스본(Gisborne) 근처의 ‘투우랑가누이(Turanganui)’라는 한적한 시골지역에 도착한다. 도착하자마자 탐험을 행하게 됐는데, 그 과정에서 원주민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된다.

원주민들은 탐험대를 목격할 때마다 화살을 쏘는가 하면 뾰족하게 만든 창을 무자비하게 던졌다. 탐험대의 사상자는 날로 늘어만갔다. 강력한 저항에 도저히 참지 못한 탐험대는 원주민에게 발포를 한다. 그러나 발포는 원주민들에게 더욱 큰 저항을 불러오게 한다.

제임스 쿡 선장은 어떤 방법으로든 원주민들과의 화해를 이끌어 내야 했다. 여러 가지 방도를 강구하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타히티의 원주민 투파이아족의 언어와 뉴질랜드 원주민들의 언어가 일치함을 알아낸다. 영국 탐험대와 뉴질랜드 원주민이 화해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마련된 것이다.

어느 날 영국 탐험대가 원주민들과 접촉할 기회가 생겼다. 한 대원이 원주민에게 다가가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원주민은 이름을 묻는 질문을 자신들의 신분에 대한 질문으로 받아들였다. 잘못 인식한 것이다. 그 원주민은 ‘보통계급(혹은 보통사람)’이라는 뜻으로 ‘마오리Maori)’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한 것이 계기가 되어 뉴질랜드 원주민을 ‘마오리’라 부른다.

오늘날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인구는 뉴질랜드 전체 인구의 약 15%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뉴질랜드의 발전을 견인하고 있으며, 강한 민족임을 화폐라는 수단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뉴질랜드 화폐 도안에 있어서 특이한 점이 있다면, 도전정신이 강한 인물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국민들에게 창조와 도전정신을 이끌어 내려고 한다.

한 국가의 화폐에는 그 국가의 특징, 가치, 정체성이 잘 드러나 있다. 은행권의 앞면 소재로는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나타내거나 존경하는 인물들을 사용하고 있다. 뉴질랜드 화폐에 새겨진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도전과 성취로 뉴질랜드를 빛낸, 뉴질랜드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들이다.

예로부터 뉴질랜드에서 통용되는 화폐의 단위는 달러(NZD)다. 총 5권 종의 지폐가 있는데 5달러, 10달러, 20달러, 50달러, 100달러 등이다. 이들 지폐에 나타난 공통된 특징이라면 앞면에는 인물이 있으나 뒷면에는 동물 및 식물 등 자연경관이 있다는 점이다. 뒷면에 자연경관을 새겨 넣은 점은 뉴질랜드의 세계적인 대자연이 한몫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 5권 종의 지폐 중 1981년에 등장한 게 있다. 50달러화이다. 지폐 앞면을 보면 ‘아피라나 낭아타(Apirana Ngata)’라는 마오리족 남성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또 그의 그림 옆에는 그가 설계했던 ‘포로우랑이집회소(Porourangi Meeting House)’가 그려져 있다. 이 지폐에 유일하게 마오리족 인물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 놀랍다. 뒷면에는 뉴질랜드 토종 까마귀인 ‘코카코(Kokako)’와 뉴질랜드 전역에서 자생하고 있는 청색을 띤 버섯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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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리족의 전통복장을 하고 있는 키위새를 그린 모습
 



5권 종의 지폐 중 고액권에 속하는 50달러화에 마오리족 ‘아피라나 낭아타’이 새겨져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뉴질랜드 및 마오리족을 위해 실행한 다양한 업적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민족 간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뉴질랜드 발전을 견인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74년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성장하면서 유럽 이민자들이 마오리족을 차별하는 상황을 직접 보게 되었다. 19세기말 마오리족의 사회적 위치는 늘 하위계층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마오리족 언어는 소수만이 사용하는 한정된 언어로 명맥만을 이어갔다. 또한 마오리족 문화와 문화재는 유럽문화에 일부 흡수·소실되거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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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50달러화
 

그는 이러한 상황이 대단히 불평등하다고 여겼으며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마오리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럽이민자 학생과 수시로 마찰이 생겼다. 놀림을 받거나 무시를 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한번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유럽 이민자 학생이 시비를 걸어와 같이 가던 마오리족 친구들이 폭력을 행사한 적도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유럽인 선생님은 마오리족 학생들에게 폭행 행사에 대한 아무런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오히려 마오리족 학생들만 크게 나무랐다.

낭아타는 이런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다가는 점점 악화될 것이라고 믿었다.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늘 멸시받는 마오리족을 위해 우선 인권이라도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래서 그는 뉴질랜드대학 교 법대에 입학을 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어렵게 입학을 한 그는 1897년 마오리족 최초로 뉴질랜드대학교 졸업생이면서 법학사 학위를 받는다. 이후 그의 활동은 눈부시다. 뉴질랜드 의회에 1905년에 진출하여 국회의원직을 무려 38년 동안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마오리족 법적 권리를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건의, 실행하게 했으며 마오리부 장관일 때는 마오리족 문화 보존과 전통 계승에 헌신했다.

대표적인 예로 마오리족의 전통춤인 ‘하카(haka)’를 대중화시켰다. 그 결과 오늘날 뉴질랜드 럭비팀은 물론 중요 행사가 있을 때 하카를 추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아울러 마오리족들이 뉴질랜드에서 동등한 대접을 받을 수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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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의 자연(가마우지 종류의 물새 Spotted shag)
 


19세기 말부터는 뉴질랜드 의회에 마오리족이 진출할 수 있도록 의석이 마련됐다. 마오리족의 의회 진출은 여러 측면에서 의의가 크다. 첫째 마오리족의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오리족의 권익 향상 및 영향력 확보를 의미한다. 따라서 뉴질랜드 제4당인 마오리당(Maori party)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뉴질랜드 의회 의석 중 7석이 마오리족을 위한 의석으로 배정되는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국민화합을 이끌어 냈다는 점이다. 이민자와 원주민간의 마찰, 갈등, 불신을 없애고 문화상대주의를 적용했다. 이는 마오리족의 경제, 사회적 측면에서의 개선뿐만 아니라 이민자와 동등한 대접을 받게 했다. 셋째 마오리족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저서를 통해 마오리 역사, 전통 문화와 언어를
보호하고 홍보했다.

20세기 초 혜성같이 등장한 마오리족 ‘아피라나 낭아타(Apirana Ngata)’. 그는 평화롭고 인권이 존중되는 뉴질랜드를 만들기 위해 헌신한 위대한 정치인, 사회운동가, 변호사였다. 때문에 뉴질랜드는 오늘날 인권이 존중되는 세계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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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남섬 크라이스트처지 아카로이(Akaroa landscape Christ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