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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소용돌이 속에서

홍범도(3)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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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간도참변
홍범도가 독립군 봉오동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일본군부는 그 한 달 전부터 간도의 독립운동 세력을 ‘청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3·1운동 이후 간도 한인들은 독립군 무장투쟁을 강화해 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중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이 참패를 당하자 이 계획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문제는 일본군이 두만강 국경을 넘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만주 군벌 장쭤린(張作霖)에게 압력을 가해 독립군 ‘토벌’ 협력과 일본군의 진입을 용인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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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참변 때 일본군 간도 침입의 빌미를 만들어 준 마전 만순의 처형 장면. 만순은 같은 마적
패의 두목 고산에게 잡혀 처형당했다. 관병의 토벌에 자신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1920년 10월 2일 일본군은 중국 마적단 약 400명으로 하여금 혼춘 일본 영사관을 공격하여 전소시키도록 사건을 꾸몄다(혼춘사변). 일본은 “마적단 중에 약 100명의 조선인이 있었다”고 하며 일본군 제19사단 병력과 시베리아 파견 병력 중 일부를 간도로 파견했다. 그 와중에 일본군은 홍범도를 비롯한 한국 독립군 연합부대에 의해 청산리에서 대참패를 했다. 일본군은 더욱 이에 대한 보복으로 무차별 한인 학살 작전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조직적으로 지역을 분담하여 한인 마을을 포위하고 모든 남자들을 총이나 창으로 학살했으며 민가에 불을 지르고 가축을 약탈하여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또 일본군은 간도참변을 취재하기 위해 현지에 간 동아일보 기자 장덕진(張德震)을 암살하여 일본군의 만행을 은폐하고자 했다. 일본군의 학살 장면을 목격한 미국인 선교사 마틴(Martin, S.H.)과 푸트(Foote)는 “피 젖은 만주 땅”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1920년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한국인 3469명이 학살됐다. 학살만행은 그 후에도 3~4개월 동안 계속됐기 때문에 피해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홍범도 부대의 시베리아
이동과 자유시 참변

홍범도는 일본군이 간도를 침략하자 이 기회에 국내 진입 공격을 계획했다. 그러나 일본군에 의한 간도 동포들의 피해가 커짐에 따라 계획을 접었다. 홍범도와 독립군 부대들은 동포들의 피해를 줄이고 독립군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간도를 떠나야 했다. 홍범도는 간도를 떠나 1920년 12월 하순 북만주밀산(密山)에 도착하였다. 김좌진 부대를 비롯한 다른 독립군 부대들도 이즈음 밀산에 집결했다. 이들은 밀산에서 대오를 정비한 다음 1921년 1월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령 이만에 집결했다. 독립군 부대들은 자유시(알렉셰프스크, 현 스보보드니)로 갈 예정이었다. 볼셰비키 혁명파가 세운 원동공화국이 지원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홍범도 부대는 이만에서 2주간 머물렀다. 그런데 하바로프스크의 원동공화국 제2군단이 자유시로 출발하기 전에 독립군 부대들이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나왔다. 독립군 장병들은 의구심을 갖고 선뜻 응하지 않았다. 홍범도는 그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일제 총기 709정 등 총기와 탄환 4만 9000여 발, 수류탄 2804개 등의 무기를 넘겼다. 그해 1월 하순 홍범도는 부대원 380여 명을 아만에 남겨 놓고 나머지 220명을 이끌고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자유시에는 이미 안무부대, 최진동 부대 등이 와있었고, 그해 3월까지 만주에서 1850명, 연해주에서 온 빨치산 부대 약 1650명이 집결했다. 홍범도와 독립군 지도자들은 계속 자유시로 모여드는 독립군 부대들을 모아 대한의용군 총사령부(일명 대한총군부)를 조직하여 군사 통일을 성사시켰다. 이 군사통일 조직은 1921년 4월 대한독립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서일과 홍범도가 총지휘를 맡았다. 홍범도는 결집된 힘으로 일제와 일전을 벌일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좌진과 이범석 등 북로군정서 부대들은 무장 해제에 반대하여 북만주로 되돌아감으로써 차질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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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참변 때 학살된 한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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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출신 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대한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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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일지 필사 등본
 


당시 한인 공산주의 세력에는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오하묵이 중심이 되어 국제공산당(코민테른) 동양비 서부와 연결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주도권을 다투고 있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1921년 3월 중순 이르쿠츠크에서 임시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열었다. 의회는 이르쿠츠크파 오하묵이 지휘하는 한인자유보병대대를 중심으로 만주와 시베리아 한인 독립군 부대들을 모두 통합하여 소비에트군 체제로 개편하기로 결정하고, 사령관에 러시아인 깔란다라시월리, 부사령관에 오하묵을 임명하였다.

홍범도는 양파의 갈등을 조정하여 단결을 이루고자 노력했다. 홍범도 부대는 6월 25일안무 부대, 지청천 부대 등과 함께 고려혁명 군정의회 제3연대로 편성됐다. 군정의회 사령관 깔란다리시월리와 오하묵은 박일리아 부대와 일부 간도 독립군 부대가 여러 차례 경고에도 순응하지 않자 1921년 6월 28일 자유대대와 러시아 적군 제29연대를 동원하여 박일리아의 ‘사할린 의용대’ 진영을 포위, 공격했다. 사망 272명, 익사 37명, 행방불명 250여 명의 큰 인명피해가 났으며, 917명이 포로로 잡혔다. 포로의 다수는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 넘겨져 벌목작업에 동원되었다. 이 사건이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운동상의 최대 비극 중 하나로 꼽힌다.

1921년 8월 말 홍범도는 남은 부대원 1745명에 포함되어 이르쿠츠크로 가서 다른 한인 부대와 같이 소비에트 제5군 직속 한인 여단으로 재편되고 독립군 사령관이었던 그는 한인 빨치산(의용군) 대장이 되었다. 그는 소련군이 지급하는 무기를 받고 일본군과 싸우길 원했으나 그럴 수 없게 되자 이르쿠츠크에 온 것을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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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에 태워져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집단 이주되는 한인들
 


레닌과의 만남
1922년 1월 홍범도는 한인 무장 세력의 대표로 선출되어 다른 52명의 한인 대표와 함께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회 극동제민족대회(일명 극동인민 대표회의)에 참석했다. 대회 후 홍범도는 레닌(Vladimir Il'ich Lenin)을 만났다. 홍범도는 레닌으로부터 혁명에 협조하여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금화 100루블, 군복 한 벌, 홍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 받고 레닌, 트로츠키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1922년 2월 중순 이르쿠츠크로 돌아온 홍범도는 1년가량 그곳에서 머물렀다.

스탈린 체제하의 농업지도자 홍범도
1922년 4월 레닌이 은퇴하고 스탈린이 집권했다. 볼셰비키파는 그해 10월 연해주를 비롯한 극동지역에서 혁명 반대파 백군을 완전히 제압했고, 일본 간섭군도 철수했다. 그해 12월 말 스탈린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 소련)을 공식 출범시켰다. 한인들이 많이 사는 연해주에 대한 사회주의화가 시작됐다. 소련은 일본군이 다시 러시아에 침입하는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한인 무장 세력에 대해 강력한 통제를 가했다. 소련군에 편입되어 오하묵의 지휘를 받는 홍범도 등의 무장 세력 이외의 다른 한인 무장 세력은 연해주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어 만주로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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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형제를 맺은 홍범도(오른쪽)와 엄인섭(1910년대초). 엄인섭은 후에 변절하여 일제의 밀정노릇을 하였다.
 


약소민족의 비애를 느낀 홍범도는 1923년 9월경 소련 당국과 교섭하여 이만 근처 까잔린구역에 토지를 지급받았다. 홍범도는 50여 명의 제대한 동지들과 함께 그곳에서 농업조합과 양봉농업협동조합을 세우고, 1927년까지 농사를 지었다. 그의 꿈은 식량을 비축하여 군자금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확이 좋지 않았고, 사회주의 체제가 정착되어 가면서 판매의 길도 막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홍범도는 동지들의 강력한 권유에 아내를 잃은 후 18년 만에 이인복이라는 여성과 재혼했다. 그 후 1933년 나이 65세까지 이만 남쪽 진동촌, 더 남쪽의 ‘항가의 별’이라는 콤비나트(기업결합체)의 지도자로 일했다. 홍범도는 그곳에서 벼농사를 처음 시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홍범도는 우수리스크의 한인 76연대의 명예군인으로 추대되어 3·1절이나 8·29 국치기념일 등이 오면 부대나 학교에 초대되어 항일투쟁담을 들려줬다. 홍범도는 일할 때나 강연할 때나 언제나 군복차림에 레닌이 준 권총을 차고 있었다. 1934년부터 1937년 9월 초까지 홍범도는 블라디보스톡 동북의 스찬(水淸)에 있는 뿌찌 레닌나(레닌의 길) 콜호즈(농업협동조합) 지도자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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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가족사진. 홍범도는 전설적인 의병장이었으나 카자흐스탄에 강제이주되어 조선극장 수위를 했다(1930년대).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와 말년
1937년 8월 21일 소련공산당과 소련인민위원회는 재소 고려인 20만을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킨다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일본 간첩들의 침투를 막는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홍범도는 1837년 9월 초 스찬을 떠나는 열차에 몸을 싣고 약 1달 후인 10월 초순 카자흐스탄 시르다리아 강 근처 잔 아뤼크촌에 내 던져졌다. 69세 때였다. 이듬해 4월 그는 좀더 환경이 좋은 크즐오르다로 오게 되었다. 한인들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각국에 분산됐다. 황무지에 그냥 버려진 상황이었으나 한인들은 강인한 생명력과 근면성으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물길을 내어 벼농사를 시작했다.

1941년 6월 히틀러의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 73세의 홍범도는 당국을 찾아가 전선으로 보내 주기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동포들은 노년의 홍범도가 좀 더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조선극장 수위장을 맡겼다. 홍범도는 매월 받는 연금 80루블 이외에 따로 50루블을 받아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극장은 1932년 9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창립된 단체로, 대표 태장춘은 일본군과 싸운 홍범도의 투쟁을 연극으로 만들고자 했다. 홍범도는 고난에 찬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일지>를 썼다. 태장춘은 홍범도 <일지>를 바탕으로 연극 <의병들> 극본을 써서 1942년 초 무대에 올렸다. 관객들은 열광했다. 연극 <의병들>은 후에 <홍범도>로 제목이 바뀌었다. 그 얼마 후 카작 청년들이 조선극장에 옷감을 훔치러 왔다가 홍범도에 발각되어 격투가 벌어졌다. 이 일 이후 74세의 홍범도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여 1943년 10월 25일 75세의 일기로 크즐오르다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3월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1984년 11월 초 크즐오르다 묘지에 흉상이 세워졌다. 정부에서는 올해 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맞아 홍범도 장군의 유해 국내 봉환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와 북한에서 평양이 고향인 홍범도 장군 유해는 평양으로 봉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난관에 부딪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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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의 홍범도 장군 기념공원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