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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의 전설

홍범도(2)


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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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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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 장군(1912)
 

고된 노동과 준비의 시간(1911~1918)
나라가 망하자 연해주 분위기가 일변했다. 홍범도 같은 조선의 독립 운동가들은 러시아 당국의 감시받는 존재가 되었다. 러시아로서는 조선 독립 운동가들의 독립 운동이 일본을 자극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1911년 홍범도를 비롯한 이상설 등 독립 운동 지도자들이 정치적인 목적을 빼고, 생업을 장려한다는 ‘권업회’를 조직하게 된 것도 러시아 당국의 압박 때문에 취한 고육책이었다.

홍범도도 ‘권업’에 나섰다. 1912년 가을 동지들과 ‘노동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노동판에 나섰다. 시베리아 철도 공사장, 추풍 다아재골 농장, 1913년부터 1915년 7월 중순까지 연해주 북방 하바롭스크주의 태평양 연안도시 니콜라엡스크 어장과 꾸르바트 금광, 비얀꼬 금광, 얀드리스크 금광 등지를 전전했다. 노동하여 모은 돈과 한인들의 독립자금을 합친 4500루블로 소총 17정과 탄약을 구입했다.

망국 직전인 1909년 가을 독립 운동가들은 미주 동포들이 모아 보낸 자금을 기초로 중국과 러시아 국경지대에 흥개호(興凱湖)라는 큰 호수를 끼고 있는 북만주 봉밀산에 45방(方)의 땅을 사서 100여 한인을 이주시키고, 한민학교를 세워 독립운동기지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홍범도는 1915년 9월 5일 봉밀산의 김성무 농장으로 왔다. 그곳에서 2년 반 동안 홍범도는 사냥을 하며, 동포들의 농지 개척을 돕고, 어린이와 청년들의 민족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사방 천지에 일손이 필요한 개척지에서 동포들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여유가 없었다. 홍범도는 동포들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부모들을 설득하여 어린 아이는 업고, 큰 아이는 손을 잡거나 앞세워 걸려서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 개척지 독립운동 기지를 방문했던 박은식은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그들은 산에서 사슴을 쏘고 땔나무를 팔며 감자를 심어 양식으로 삼고 엿을 팔아 살았으니 모두 지난날의 의병 장령이었다. 그들은 쓰러져가는 집에 살면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고, 오로지 노래하고 읊조리는 것은 조국뿐이며, 자나 깨나 조국이었다. 술을 마신 후에는 비분 강개하여 서로 노래 부르고 통곡했다. 세속의 소위 명예나 공리 따위는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겼다. 나는 심히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봉오동 대첩
홍범도가 다시 무장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서였다. 3·1운동은 국내에서도 처음에는 독립을 요구하는 데서 시작하여, 나중에는 독립을 쟁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만주 동포들은 이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나아가 각지에서 독립군을 조직하고, 서로 연합하여 압록강 두만강 국경을 넘어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920년 들어 이러한 공격이 1651회에 달했다.

1920년 5월말 두만강이 동해 방향으로 꺾어지는 봉오동 지역에서 홍범도 부대, 최진동부대, 안무 부대가 연합하여 대한북로 도독부가 조직되고, 수백 명의 독립군 부대가 봉오동에 집결했다. 봉오동은 산으로 둘러싸인 긴 계곡으로 좁은 입구로부터 하촌 중촌상촌의 동포 마을이 있었다.

6월 4일 독립군 30명이 두만강을 넘어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국경수비대를 공격했다. 일본군은 즉각 보복에 나섰다. 니이미지로(新美二郞) 중위가 지휘하는 남양수비대에다 야스카와사부로(安川三郞) 소좌를 지휘관으로 하는 200여 명의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6월 7일 한밤의 어둠을 타고 두만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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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초 함경도 나남 일본군 19사단 예하의 회령 주둔 보병 75연대 부대원의 제대기념
사진첩에 들어 있는 독립군 처형 장면. ‘부두목 만순부수’라고 나와 있다. 당시 이 부대는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항일독립군에 참패했다.
 



홍범도 등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두만강을 넘어 쳐들어오는 것을 알고는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긴 골짜기 좌우에 독립군 부대를 나눠 매복하여 일본군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일본군은 6월 7일 아침 봉오동 입구에서 도착해 수색작전을 펼치며 정오 무렵에는 골짜기 깊숙이 상촌까지 들어왔다.

홍범도를 비롯한 독립군들은 일본군이 완전히 포위망에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4시간에 걸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여 골짜기 아래 일본군에 집중사격을 가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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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청산리 대첩 지도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는 일본군 전사 157명, 부상 300명이며, 독립군 전사 4명, 부상 2명이라고 발표했다. 전투 후 전과를 확인했을 홍범도는 <홍범도 일지>에서 일본군은 본대 370여 명, 후원병 100여 명 전체 500~600명이 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독립군의 큰 승리였다. 일본군은 패배의 후폭풍을 우려하여 전사 1명 부상 2명 등으로 피해를 극소화하여 보고했다.

청산리 대첩
홍범도를 비롯한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의 보복공격에 대비하여 백두산 기슭 화룡현 이도구 어랑촌 부근 산림지대로 이동했다. 10월 초 안무의 국민회군 약 250명, 한민회 부대 약 200명, 의군단 약 100명, 신민단 약 200명이 근처로 이동해 왔다. 10월 13일 4개 독립군 대표자 회의가 열려 행동통일 하기로 결정하여 홍범도 연합부대가 결성되었다. 10월 20일에는 허근의 의군부 부대 300여 명도 합류했다. 이로써 홍범도 연합부대는 7개 부대 1400여 명 규모가 되었다.

6월의 봉오동 전투 참패로 충격을 받은 일본군은 간도지방 조선 독립군 섬멸계획을 수립했다. 일본 내각회의는 10월 7일 일본군의 ‘간도 출병’을 결정했다. 그날 밤 11시 나남주둔 19사단 사령부에 명령이 떨어졌다.

제19사단은 출병부대를 3개 지대로 편성했다. 제1지대는 혼춘현(甲지구)을, 제2지대는 왕청현(乙지구)을, 제3지대는 화룡현(丙지구)을 담당하여 10월 16일까지 담당지역에전개를 완료했다.

홍범도부대 등 여러 독립부대들은 10월 7일에서 13일 사이 전략방침에 대한 토의를 거듭했다. 결론은 적이 강하고 우리가 약한 상황에서 전투를 피하면서 역량을 보존하다 적을 깊은 산속으로 유인하여 유격전으로 돌연 습격하고 신속히 은폐, 탈출한다는 것이었다.

10월 18일 저녁,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500여 명은 완루구 부근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탐지하고 일본군 하가시(東) 제3지대장 휘하 주력부대가 기습해 왔다. 홍범도 부대는 이들을 맞아 10월 21일 오후부터 22일 새벽까지 포위섬멸전을 벌인 끝에 물리쳤다. 홍범도는 일지에서 이날의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날이 밝자 대포소리 한 방 나더니 사방으로 사격소리가 그치지 않고 단박에 말리고 민간촌에 일본군이 달려들더니 나의 군인 520명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때려치듯 막 사격하니까 적들이 혼란에 빠져 헛총질을 해댔다. 밤이 삼경이 되도록 진을 풀지 못하고 밤새워 공격을 감행하여 일본군을 거의 다 잡았다.”

승리를 거둔 홍범도 부대는 안전한 안도현으로 철수하지 않고, 어량촌에 있는 독립군에 합류했다. 어랑촌은 일본군 간토 ‘토벌군’ 제3지대 히가시 지대의 예비대 주력이 주둔한 곳이었다. 홍범도 등 독립군 연합부대들은 당초에 설정한 피전책(避戰策), 즉 일본군과 정면 대결을 파고 기회를 봐서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전개하겠다는 방침과 달리, 일본군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어랑촌 일대에 집결해 있는 일본군과 정면승부를 택했다. 홍범도 부대 등은 어랑촌의 주요 고지인 874 고지를 선점한 후, 방어진을 편성해 은밀히 일본군을 포위했다. 독립군들은 보급이 부족한 상황이었으나, 동포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독립군을 도왔다.

청산리 일대에서 있었던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이 전투로 독립군 연합부대는 일본군 연대장 이하 600여 명을 사살하였다. 독립군 측에서도 전사 100여 명, 실종 90여 명, 부상200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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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제19사단 보병 75연대 단체 사진(사진제공:김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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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 출신 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대한독립군)
 


청산리 전투는 10월 21~26일 사이에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차례 일본군과 벌인 일련의 교전이다. 그중에서 대표적이 것은 10월 21일 아침 김좌진 부대의 백운평(白雲坪) 전투, 21일 오후부터 22일 새벽까지 홍범도 부대의 완루구(完樓溝) 전투, 22일 새벽의 천수평(泉水坪) 전투, 22일 오전부터 일몰까지 벌어진 홍범도 등 연합부대의 어랑촌(漁郞村) 전투, 24일 저녁과 25일 새벽에 발생한 천보산(千寶山) 전투, 25일 밤에서 26일 새벽까지 벌어진 고동하(古洞河) 전투 등의 6개 전투이다.

청산리 전투에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참가했던 이범석은 독립군의 승리 요인을 “오직 만주의 끝없는 산림과 끝없는 산악의 특수한 지형 속에서만 이룩할 수 있는 전과”라고 했다. 즉 독립군의 지휘력과 정신력이 우월했고, 현지 지리에 정통하여 능동적으로 일본군을 상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정보, 보급 등 동포마을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했기 때문이었다.


나아가세 독립군아 어서 나가세
기다리던 독립전쟁 돌아왔다네
이때를 기다리고 10년 동안에
갈았던 날랜 칼을 시험할 날이

나아가세 대한민국 독립용사야
자유로운 광복할 날 오늘이로다
정의의 태극 깃발 날리는 곳에
적의군대 낙엽같이 쓰러지리라.


독립군들이 목청껏 불렀던 독립군가에 봉오동 청산리 대첩의 독립군 기상이 잘 나타나있다. 올해 100주년을 맞는 1920년 6월의 봉오동 전투와 10월의 청산리 대첩에서 홍범도는 그 주역으로서 우리 독립 운동사에서 대승리의 신화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