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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자신들 입맛에 맞는 인사들로 내각을 구성하게 압박했다. 김홍집을 총리로 하는 친일 내각이 성립되었다. 고종은 사방으로 포위되어 어디에 도움을 구해야 할지 모르는 고립상태가 되었다.

때마침 일본의 만행에 분개하여 지방에서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지방 진위대만으로 의병을 진압할 수 없었다. 서울의 친위대 병력을 지방으로 파견했다. 수도 경비에 공백이 생겼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1896년 2월 11일 이른 새벽, 고종과 왕세자가 일본의 감시망을 피하여 경복궁에서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파천(播遷)이란 임금이 본궁(本宮)에서 다른 곳으로 난을 피하는 것인데 아라사(俄羅斯)라고 불렀던 러시아의 공사관으로 피신했기 때문에 이 사건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한다. 총리 김홍집은 군중에게 피살되었으며, 친일파는 정권에서 쫓겨났다. 대신 친러파가 정권을 잡았다. 고종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으며 1년간이나 러시아 공사관에서 정무를 보았다.

아관파천 약 5개월 후인 고종 33년(1896) 7월 2일 독립협회가 창립되었다. 갑신정변에 실패하여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박영효, 유길준 등의 권고로 귀국하면서 서재필의 자문을 받아 개혁파들이 창립한 단체였다.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 등이 주도했고 이완용, 안경수, 박정양 등 당시 정부 고위관료들과 남궁억, 안창호 등도 참여하였다. 처음 성격은 관료와 민간인이 함께 참여한 관민합동기구와 같은 독특한 성격이었다.

서재필은 국적이 미국으로 되어 있어 고문의 역할을 하였다. 서재필(徐載弼)은 처음 외부대신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대신 10여 년 전 갑신정변의 실패가 국민의식이 따라 주지 않았던 데 있었다고 생각하여 국민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하여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최초의 한글신문이다. 4월 7일이 신문의 날이 된 것은 이 날을 기념한 것이다.

독립협회는 자주독립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 건립을 목적사업으로 설정하였다. 독립문은 국민의 성금을 모집하여 3825원의 예산을 잡았다. 서재필이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기본설계를 하고, 독일 공사관의 러시아인 기사 사바친(Sabatin)이 세부 설계를 했으며, 공사는 한국인 기사 심의석(沈宜碩)이 담당하였다.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을 5~6천여 명이 참석한 자리에 성대하게 거행했다. 독립
문은 1897년 11월 21일 준공하였다. 독립관(獨立館)은 종래 중국 사신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고 묵게 하던 영빈관인 모화관(慕華館)을 수리하여 1897년 5월 23일 완공했다. 독립협회의 사무실과 집회장소로 사용되었다.

독립협회는 독립관이 건립되자 1897년 8월 29일부터 매주 일요일 오후 토론회를 열었다. 8월 29일의 첫 토론회 주제는 ‘조선의 급선무는 인민의 교육으로 작정함’이었다. 이 주제에 대해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자신의 소견을 발표했다. 찬성편은 이경직과 조병건이, 반대편은 백성기와 이건호가 연설했다. 이후 회원 중에서 찬성과 반대편을 도와 연설을 하였다. 정부의 대신들도 토론회에 참석했다. 첫 토론회에서 학부대신 이완용, 법부대신 한규설, 농상대신 이윤용 등 유명한 이들이 이 문제에 대해 소견을 말했다. 이런 방식으로 토론회는 모두 34회가 개최되었는데 큰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토론회가 거듭될수록 참석자들의 집단의식 형성과 독립협회의 사상의 발전에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수많은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 이 토론회를 통해 지도자로 자라났다.

한편,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체류기간이 길어지면서 조선의 국왕이 러시아에 포로가 된 형국이 되었다. 또한 친러파에 의해 이권이 러시아와 다른 국가들에 줄줄이 넘어갔다. 국내외적으로 고종 환궁 여론이 비등하였다. 전국의 유생들이 상소운동을 개시하고, 장안의 시전들은 철시를 단행했다. 여론이 거세어지자 고종은 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1897년 2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한 후 개화파와 수구파가 연합하여 왕을 황제로 격상시키고 제국의 연호를 새로 선포하는 칭제건원(稱帝建元)운동을 다시 추진하여 1897년 10월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내외에 선포하였다.
러시아는 1897년 9월 종래의 온건한 베베르(Veber, K. I.) 공사를 스페이에르(Speyer, A.)로 교체하고, 부산절영도(絶影島: 지금의 영도)의 석탄고 기지조차(租借) 요구, 황실 시위대(侍衛隊)에 러시아 사관들을 파견하여 장악을 기도했고, 경제장악을 위해 러시아인 재정고문 알렉세이예프(Alexeiev, K.) 고용 및 한러은행(The Russ-Korean Bank)을 설립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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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위기상황에서 서재필(徐載弼)·윤치호(尹致昊) 등 독립협회 간부들은 1898년 2월 기존 계몽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정치운동을 선언했다. 외국의 군사권과 재정권 간섭을 규탄하고, 대외적으로 완전 자주독립을 주장하였으며, 대내적으로 입헌정치와 탐관오리의 제거, 내정개혁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러시아 공사 스페이에르는 부산의 절영도조차를 거듭 요구하고, 3월 1일 한러은행을 서울에 개설했다. 독립협회는 독립관에서 성토대회를 개최하고, 외부(外部)와 탁지부에 강경한 항의문을 발송하였다. 수구파 정부는 러시아가 정권을 지탱해주리라 믿으면서 여론의 압박에 확실한 답변을 회피했다.
 
러시아는 대한제국을 장악하려는 정책이 독립협회에 의해 전면적인 저항에 부딪히자, 3월 7일 오후 러시아의 원조냐 독립협회이냐 선택하라며 24시간 내에 회답하라는 최후통첩을 대한제국 외부에 보냈다. 독립협회는 이 기회를 러시아의 침략과 간섭정책을 완전히 배제할 기회로 판단하고, 정부가 러시아 세력을 철수시키도록 압박하기 위해 3월 10일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1만여 명이 보신각 앞 종로 네거리에 모여들었다. 독립협회의 토론회와 같은 노력이 가져온 결실이었다. 시민들은 쌀장수 현덕호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백목전(白木廛) 다락 위에서 현덕호를 비롯한 시민들이 성토 연설을 하였다. 만민공동회 1만여 참여자들은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를 전체의사로서 결의하였다. 러시아 공사를 비롯해 외국공사들과 외국인들이 만민 공동회를 보고 놀랐다. 대중의 여론이 형성되어 정부에 전달되는 현장을 그들이 지켜보게 된 것이다. 러시아는 고종과 정부는 고심하다 3월 11일 만민공동회의 결의에 따르기로 결정하고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의 철수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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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2일에는 독립협회와 무관하게 서울 남촌(南村) 평민들이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이틀 전보다 더 많은 수만 명이 운집했다. 민중의 성장과 거대한 힘에 정부관료 뿐만 아니라, 독립협회 회원들과 외국인들도 깊은 인상과 놀라움을 느꼈다. 러시아 측은 두 차례의 만민공동회의 결의와 각국의 반응을 보고 부산절영도의 석탄고 기지조차 요구를 철회하였으며,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을 철수하고, 한러은행도 철폐하였으며, 스페이에르 공사를
교체했다. 마산항을 조차하여 러시아함대 기지를 두고자 하던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철수하여 랴오둥반도의 뤼순에 해군기지를 두게 되었다. 이리하여 만민공동회운동은 국민의 여론을 통하여 열강의 이권침탈, 침략과 간섭을 물리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으며, 제정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무산시키고 1904년 러일전쟁 발발 때까지 6년간 동북아의 세력균형을 유지시켰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놀라운 성과였다.

독립협회가 일단 시민의식을 일깨우고 만민공동회라는 민중운동 형식을 개발하자 민중들은 스스로 시국현안에 따라 다양한 만민공동회를 만들어냈다. 예컨대, 4월 30일 숭례문 앞에서 열린 서재필 추방에 반대하는 만민공동회, 6월 20일 종로에서 열린 무관학교 학생 선발 부정을 비판하는 만민공동회, 7월 1일과 2일 종로에서 열린 독일 등 외국의 이권침탈 반대 만민공동회, 7월 16일 종로에서 열린 의병에 피살된 일본인의 배상금 요구를 반대하고 경부철도부설권 침탈을 반대하는 만민공동회 등이 그것이다.

이 운동과정에서 근대적 자주민권사상을 가진 많은 애국 인사들을 배출했으며 자유민권사상을 국민들에게 보급했다. 이 운동으로 전제국가의 신민들이 근대 국가의 시민으로 깨어나 이후 국권을 잃자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국권회복과 독립운동의 책임을 떠맡으며 새로운 국민국가 시대의 주역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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