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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동문
 
 
국내 최대 규모의 금정산성
최전방, 늘 그 자리에서 지킨다
 
금정산은 역사적으로 나라를 지키는 호국의 산이었다. 이 산에 금정산성이 축성되어 있다. 능선을 따라 세워진 성
곽은 이제 하나의 예술품이 되어 전국에서 몰려온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산자락에 자리한 옛 성곽과 성문을 통해
역사의 길을 걸어본다.
 
글 박미혜 사진 문해영, 백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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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루 우물에서 노는 금빛 물고기의 산, 금정산
 
새벽 3시 30분. 금정산 정상에서 일출을 찍기 위해 취재팀과 야간산행을 했다. 헤드랜턴의 빛 한줄기에 의지해 바위에 발을 디디며 정상을 향했다. 인적이 없는, 미명의 새벽은 언제나 묘한 느낌을 준다. 대부분 잠들어 있을 시간에 깨어서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평소 느끼지 못했던 에너지를 발산하게 한다.

범어사에서 출발한 취재팀은 산을 탄 지 10분이 못되어 땀범벅이 되었다.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들고서 사방이 캄캄한 산 속을 오르니 온몸에서 고통의 신호를 보낸다. 그렇게 1시간 남짓, 어느새 주변은 환해져갔고 일출시간보다 일찍 오른 덕분에 산 정상에서 단잠을 자는 경험도 해보았다. 금
정산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니, 부산 시가지가 서서히 밝아졌다. 도심을 품고 있는 산의 정상 탈환, 꼭 해볼 만한 일이다.

금정산은 부산의 진산이다. 진산이란 지난날 도읍이나 성시(城市) 등의 뒤쪽에 있는 큰 산으로 한 마을의 중심이 되는 산을 말한다. 부산사람들은 예부터 금정산을 경배하고 이 산자락에 안겨 삶을 영위해왔다. 부산의 역사와 문화, 부산사람들의 삶과 정신이 금정산과 함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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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금샘 
 
   
 
금정(金井)이라는 이름은 이 산의 정상에 있는 작은 우물에서 비롯됐다. 일명 ‘금샘’이라고 부르는데 이 금샘은 산 이름과 산 아래 범어사라는 절과도 연관이 된다. 이 금샘 설화는 동국여지승람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금정산 산정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자(3m) 남짓하며 깊이는 7치(21cm)쯤 된다. 황금색 물이 항상 가득 차 있고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금빛 물고기 한 마리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 우물에서 놀았다 하여 산 이름을 금정(金井)이라 하고, 또 이로 인해 절을 짓고 그 이름을 범어사(梵魚寺)라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중-

실제 금샘에 가보면 금빛 우물도, 금빛 물고기도 만날 수 없다. 샘은 우물이라 할 수도 없을 만큼 작은 물웅덩이 정도로 보인다. 하지만 ‘하늘로부터 내려온 금빛 물고기’가 놀았다는 이 설화는 금정산이 예부터 신령스러운 영산이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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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산성
 
 
남해안 최전방 방어시설, 금정산성

금정산에는 최고봉 고당봉(801.5m)을 비롯해 12개의 봉우리가 있다. 이중 10개 봉우리에 성곽이 능선을 따라 쌓아져있다. 그래서 웬만한 산봉우리에선 성곽이 길게 펼쳐져 있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성곽의 전체 길이가 자그마치 17km이다. 평지에서 걸었을 때 4~5시간 되는 거리다. 우리나라의 산성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다. 금정산성이 그렇게 광대하게 축성됐던 이유는 뭘까. 아마도 남해안 최전방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그렇지 않았을까. 성은 적의 침입을 막는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었고, 왜구와 가장 가까이 있는 곳이 부산이었으니까 말이다.

금정산성의 축성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학계의 추측에 따르면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성곽의 축성 기법이나 남문과 북문 등 문의 건립 기법에서 그 시기로 짐작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산성의 규모와 형태는 조선시대 숙종 때의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바다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재정비가 이뤄졌다. 금정산성 축조 역사 연구에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는 자료가 하나 있는데 부산시 금정구 장전동 주택가에 놓여있는 거대한 자연석 암반 위에 세워진 돌비석이다. 그 비석에는 1703년 동래부사 박태항에 의해 축성된 산성이 1704년에 폐허화되었고, 이에 1808년 동래부사 오한원이 순조의 윤허를 받아 다시 축성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산성은 필요에 의해 그렇게 복원되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여지없이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산성 안의 건물들은 다 파괴되었고 무기도 몰수 되었다. 이후 1972년부터 복원작업을 시작했고 금정산성 정비계획을 통해 연차적으로 현재까지 지속 보수정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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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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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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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동문
 
 
청출어람의 사연 담은 동문과 서문
금정산에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각각 문이 있다. 그중에서 동문과 서문은 다른 두 문과 달리 남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다. 먼저 동문은 금정산 주능선의 잘록한 고개에 위치하고, 사람들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곳에 있어 금정산성의 관문으로 자리하고 있다.

동래부사 정현덕이 동문과 서문의 재건에 힘쓸 때 일이다. 그는 두 성문을 완벽하게 만들고자 이름난 석공을 수소문한 끝에 사제지간인 두 석공을 찾아 스승에게는 동문을, 제자에게는 서문을 짓게 했다. 그런데 서문을 맡은 제자가 스승보다 기술이 앞서 정교하고 아름답게 지을 뿐 아니라 스승보다 먼저 짓게 되었다. 이에 스승은 제자의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했고, 사람들은 그런 스승을 미워하고 제자의 기술을 칭송했다. 하지만 이들은 결국 동문과 서문 공사가 끝난 뒤엔 힘을 합쳐 국내 3대 누각 중 하나인 밀양 영남루 공사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서문을 보면 나머지 문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금정산성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계곡에 세워져있고, 문 옆에는 아치를 이룬 세 개의 수문이 있다. 또 서문의 좌우에는 성문을 보호하는 ㄷ자형의 적대가 있어 성문을 보호해 주고 있었다. 아름다우면서도 견고해 보인다. 성곽과 4개의 문은 금정산과 조화를 이루며 운치 있게 또는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부산에 내노라 하는 술꾼,
산성막걸리 모르면 간첩

금정산의 능선을 따라 타원형으로 축성된 금정산성에는 성문안에 3개의 부락이 살고 있었다. 현재 행정구역상 부산시 금정구 금성동이고, 이 부락들을 통틀어 ‘산성마을’이라고 한다. 산성마을은 부산의 명소로서 특히 ‘산성막걸리’로 유명하다. 금정산성 막걸리의 유래는 원래 화전민들이 생계수단으로 술을 빚기 시작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금정산성을 쌓는 데 동원된 인부와 군졸이 새참으로 나오는 산성막걸리를 먹으며 갈증과 허기를 풀었던 것이다. 조선초기부터 산성마을은 누룩을 빚어 생계를 잇는 누룩동네였고, 금정산성 입구부터 누룩 향기가 진동을 했었다. 또 국방부락으로서의 막중한 역할도 담당했다.
 
금정산성 성안에 있는 마을로 산성을 지키기 위한 각종 군사 시설물들을 설치했고 무기, 군량미 등도 다량으로 보관해두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후 산성마을의 국방유물들은 모조리 말살되었고 무기도 몰수, 국방 시설물들은 무참히 사라져버렸다.
 
막걸리 또한 주세법 강화로 쇠퇴기를 맞게 됐다. 그러다 1978년 금정산성 막걸리의 진한 맛에 매료된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지역 특산물로 양성되면서 다시금 본격적인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은 역사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라기 보다 음식점들로 난립돼 있어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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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 범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