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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지나 봄 오듯,

두타 넘어 청옥에 이르네

두타산·청옥산 탐방기


글, 사진. 장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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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창검처럼 높이 치솟은 두타산의 베틀바위.
 

예로부터 산(山)은 신과 소통을 하던 신성한 장소였다. 하늘의 뜻을 알기 위해 선조들은 산에 제단을 쌓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산을 찾았다. 산천은 때론 누군가에겐 벗이었고, 누군가에겐 따뜻한 보금자리였다.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白頭大幹)에서 뻗어나간 산천은 그렇게 생명을 품으며 긴 세월 이 땅을 지켜왔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높은 산들은 누군가 제 이름을 불러주길 바란 걸까. 철마다 옷을 갈아입으며 오는 이들을 반겼다. 겨울을 조금 남겨둔 계절에 만난 ‘두타산(頭陀山, 1357 )’과 ‘청옥산(靑玉山, 1404 )’도 그러했다.

강원도 동해시에 솟아있는 두타산과 청옥산은 백두대간이 낳은 명산이다. 백두대간의 허리 부분에 위치한 두 산은 해발 1000 가 훌쩍 넘는 높은 산세를 자랑한다. 힘찬 기운을 가진 두 산은 형제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저 멀리의 푸른 동해 바다와도 잘 어울린다. 두타, 청옥, 바다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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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산 무릉계곡 너럭바위에 새겨진 시인 묵객들의 명문(明文). ‘무릉도원’의 아름다움이 잘 담겨 있다.
 

두타산 매표소를 지나 신선교를 건너니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어찌나 매서운지 살을 베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코도 시큰거렸다. 이래서 다들 ‘강원도 한파’라고 하나보다.

그 순간 두타산과 청옥산의 산자락이 눈에 들어온다. 병풍처럼 둘려있는 반석과 한파에 얼어붙은 폭포의 모습은 웅장하고 신비스러웠다. 그렇다. 이곳이 바로 신선이 노닐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무릉도원(武陵桃源), 즉 ‘무릉계곡’이다.

‘무릉도원’이라는 말은 중국 송대(宋代)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처음으로 나온다. 지상낙원·천국과 같은 이상향의 땅이다. 전국에는 ‘무릉(武陵)’이라 불리는 곳이 많다.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의식 속에 내세를 갈급해하는 마음이 자리했나 보다. 그 중 두타산 무릉계곡은 그 옛날부터 시인 묵객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다. 그 아름다움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신선교 아래의 너럭바위에 새겨진 수많은 명문(明文)이 글쓴이의 마음을 대신했다.

저 멀리 나무 숲 사이로 ‘삼화사(三和寺)’가 보였다. 이곳은 자장율사가 642(신라 선덕여왕 11)년에 창건한 절이다. ‘삼화(三和)’라는 이름에는 삼국(신라·고구려·백제)의 화합이 담겨있다. 한반도라는 땅덩이가 세 개의 나라로 나뉘었으니, 하나가 되기를 바란 곳이었다. 그 간절함이 하늘에 닿은 걸까. 실제로 삼국은 676년에 통일된다.

당시에 많은 이들이 평화를 염원했다. 자장율사보다 앞선 시대에 살았던 원광법사도 그중 한 명이다. 신라 진평왕 때 승려인 그는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 화랑도의 수련지침을 삼도록 했다. 후일에 화랑도는 삼국통일의 토대가 된다.

신라의 승려인 원효대사도 있다. 그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중, 밤에 동굴 안에서 해골물을 마신다. 마실 땐 몰랐으나, 다음 날 해골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구토를 한다. 그때 원효대사는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였다. 기독교 경서인 <성경>에도 사람의 마음을 집이라고 했다. 실제 집을 짓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지어지니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또한 원효대사가 강조한 ‘화쟁사상(和諍思想)’은 ‘삼화사’와 의미가 비슷하다. 무슨 말이냐면 그 당시에 신라의 국교는 불교였지만 여러 개의 교리로 분열됐었다. 자기 생각과 욕심으로 교리와 세력을 만드니 국론 분열의 원인이 됐다. 이때 원효대사는 “자신의 교리를 가지고 나와서 서로 논쟁을 하면서 불교를 하나로 만들자”고 주장했으니 이것이 화쟁사상이다. 그런데 오늘날 지구촌도 종교로 인해 흩어지고 갈라져 있지 않은가. 천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지금, 원효대사의 가르침이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세속의 번뇌 내려놓다
‘인생은 고행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다. 산에 오르면 더 높은 산이 있듯, 출렁이는 파도를 넘으면 더 큰 파도가 오듯 인생도 그러하다. 사람들이 산을 좋아하는 것도 산에서 인생을 배워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이 결코 만만치는 않다. 가파른 산세와 굽이굽이 골짜기를 넘고, 턱밑까지 숨이 차오르는 고통을 몇 번이고 견뎌야만 산은 정상을 허락해준다. 이와 같은 인생의 고행을 담아 놓은 곳이 또 있으니 바로 절(사찰)이요, 더 정확히는 사찰의 ‘가람배치(伽藍配置)’다. 원래 사찰은 ‘일주문-천왕문-불이문-대웅전’의 형태를 갖춰야 한다. 대부분의 절은 가람배치가 잘못돼 있거나 조금씩 생략돼 있다. 가람배치가 잘 갖춰진 곳이 있다면 경남 양산 통도사를 꼽을 수 있다.

이곳 삼화사에도 ‘일주문(一走門)’이 있다. 그런데 일주문의 구조가 조금 특이하다. 보통 건물은 기둥이 네 개인데, 일주문은 기둥이 두 개이고 일렬로 서 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신앙에 들어서는 순간 세속의 번뇌를 내려놓고 ‘일심(一心)’으로 가르침에만 정진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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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사 ‘일주문(一走門)’. 신앙인이 일주문에 들어서는 것은 ‘두타행’을 떠나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오르는 두타산도 예부터 ‘고행의 길’이라고 불렸다. 산세가 험한 것도 있겠지만 ‘두타(頭陀)’라는 이름 때문이기도 하다. ‘자신의 머리를 쳐서 모든 생각과 관념을 허물어뜨린다’고 하니 그 길이 얼마나 험하겠는가. 그러니 신앙인이 일주문을 통과하는 것은 ‘두타행’을 떠나는 것과 같다.

기독교 <성경> 요한복음 3장 5~6절에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말씀이 있다. 거듭나는 것은 ‘새로운 길을 택하고 걷는다’는 것으로, 과거의 나를 버리고 새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그럼 어떻게 버려야 하는 걸까. 성경에는 두타행을 몸소 보인 인물이 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에게만 전파됐던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으로 이방인에게 전한 ‘사도바울’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베냐민 지파 출신의 순수 히브리인인 그는 누구보다 많은 지식과 재물, 능력을 가졌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계시를 받은 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한순간에 배설물처럼 버린다.

그의 목적은 오직 부활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고, 그 사명을 다하는데 있어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않았으니 곧 두타행이었다.

그렇게 두타행 곧 일주문에 들어서면 ‘천왕문(天王門)’을 만난다. 내부에는 중앙 통로가 있고 좌우에 거대한 목조 사천왕상이 서 있다. 동방·서방·남방·북방으로 서 있는 사천왕은 비파, 칼, 용과 여의주, 보탑을 들고 불전(佛殿)을 수호한다. <성경>에서 사천왕은 ‘네 생물’ ‘네 천사장’으로 표현됐다. 이들은 일주문에 들어온 신앙인을 정도(正道)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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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화사 천왕문(天王門). 사천왕은 구도의 길에 들어선 신앙인을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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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각도에 따라 미륵불, 선비, 부엉이의 모습으로 보이는 ‘미륵바위’

 



만약 신앙인이 잘못된 길을 걸으면 혼을 내서 데려온다. 신앙의 방해자가 나타날 땐 그들과 싸워서 신앙인을 지켜낸다. 사천왕의 도움을 받으며 두타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산에 오르면 오를수록 대자연이 만들어낸 거칠고 강인한 산세에 인간으로서의 나약함을 느끼게 된다. ‘나는 누구일까’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살아 왔을까’ ‘내가 가야할 길은 어디일까’ 이 순간은 오직 신과 나에게 집중하게 된다.


두타행, 그리고 신과의 만남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지난해 8월 공개된 ‘베틀바위 산성길’이 그러했다. 이곳의 능선은 너무 위험해 그동안 사람의 접근을 막아 놨다. 그러다 동해시의 ‘등산로 재정비 사업’이 완료되면서 일반인도 베틀바위를 감상할 수 있게 됐다. 긴 창검처럼 높이 치솟은 바위, 돋보이는 입체감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거기다 한폭의 수채화로도 담아낼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니. 그저 신의 작품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이 험난한 길을 걸어왔기에 하늘은 이곳을 허락해 준 것이었다.

불가(佛家)에서도 고행의 길을 걷는 이유는 극락을 맛보기 위함이다. 그러니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온 것은 더 좋은 세계로 가기 위한 필요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아직 하나의 문이 더 남았다. ‘불이문(不二門)’이다. 여기서 ‘불이(不二)’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뜻이다.

그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늘과 땅의 것, 영과 육의 만남 즉, 하나됨을 의미한다. <성경>에 보면 창조주는 영과 육을 처음에는 함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로 나뉘어졌고, 이들을 다시 하나되게 하는 게 창조주의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6000년의 긴긴 세월의 역사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신앙인이 일주문에서 약속을 받았다 해도 영이 함께하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하다.

그러니 완전함을 위해 새 사람으로 거듭나라고 했다. 이 조건을 갖추기 위해 두타행은 반드시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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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뒤에서 본 형상이 백곰을 닮은 두타산성의 ‘백곰바위’ 우) 겨울을 조금 남겨둔 계절에 만난 두타산의 천혜의 비경이 렌즈에 담기고 있다.

 


잠시 세상의 이치를 살펴보자. 곤충의 알이하나 있다. 아주 작아 보이지만 그 안은 생명을 품고 있다. 생명이 알 속에 있을 때는 깜깜한 밤이지만, 알을 깨고 나오면 처음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이제 애벌레가 되고 고치집을 짓고, 그 안에서 번데기가 되어 성충(나비)이 되기까지 몇 번의 죽음과도 같은 변화의 과정을 겪고 이겨냈을 때 비로소 ‘훨훨’ 하늘을 날 수 있다. 그럼 지금 이 이야기를 왜 하는 걸까. 일주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알을 깨고 나와 새 세상에 들어가는 것이요, 고비마다 죽음의 과정을 넘기면서 자신을 바꿔나갈 때 비로소 천국, 낙원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된다는 걸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주는 이 이치를 만물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왔다.

그때 불이문을 지나 대웅전 ‘적멸보궁(寂滅寶宮)’에 들어간다. 적멸보궁이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전각이다. 우리나라에는 양산 통도사 등 5대 적멸보궁이 있다. 이곳은 다른 사찰과는 달리 대웅전 안에 불상이 없고,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있다. ‘금강(金剛)’은 진리를, ‘계단(戒壇)’은 계율, 즉 법을 모신 단이다. 기독교에서는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이라 했다. 그러니 금강계단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을 모신 제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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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 넘으니 청옥이 보이네
두타산과 이웃한 청옥산의 산세는 제법 부드러웠다. 하지만 청옥산을 만만히 봐서는 안된다. 두타산만큼 해발이 높아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다 발목 위로 올라오는 눈 때문에 걷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산행하는 이들은 험한 두타산을 넘어야만 청옥산, 곧 극락에 이른다고 여겨왔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불경 ‘아미타경(阿彌陀經)’을 보면 극락을 상징하는 일곱 보석 중 하나가 ‘청옥’이다. <성경>에도 ‘청옥’이 나온다. 요한계시록 21장에는 하늘의 영계 천국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라고 했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창조되면 임해 온다고 약속돼 있다. 영계 천국은 12보석으로 돼 있는데 11번째 보석이 바로 ‘청옥’이다. 그래서 두타 산이 고행이라면 청옥산은 극락이 된다. 그런데 이 천국은 성전이 없고, 빛이신 하나님과 예수님만 있다고 한다. 또 눈물·고통·사망도 없는 평화의 세계, 안식의 세계였다. 그러니 이곳이 인류가 지향하는 목적지요, 이 시대에 태어난 우리가 고행의 길을 통해 반드시 도달 해야하는 곳이 되는 것이다.

삼국의 화합을 이룬 자장율사와 원광법사가 다시 떠오른다. 원효대사도 화쟁사상을 통해 평화를 강조했다. 갈라진 교리와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것, 그것은 ‘종교 통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도 모든 인류가 분쟁을 하고 있지 않은가. 갈라진 세상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갈라진 종교를 하나로 대통합하는 길이다. 이 종교대통합은 저마다의 교리를 들고 나와 논쟁과 토론을 통해 그중 최고의 진리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가 될 때 지구촌의 분쟁과 전쟁은 종식될 것이며 세계평화의 길은 열릴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한 분이듯, 세계도 창조주 안에서 인종도 국경도 종교도 하나될 때 인류가 기다리던 유토피아 곧 청옥산이 열릴 것이다. 이를 위해 고단하지만 오늘도 두타행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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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이 낳은 명산인 두타산과 청옥산. 해발 1000m가 넘는 두 산의 산자락이 길게 이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