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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평화가 필요합니다

임진강과 비무장지대의

막힌 혈을 뚫는 여행


글. 백은영 사진. 박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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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중성에서 바라본 풍경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지나간 역사 속, 그 현장에 있지 않고서는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기란 어렵다. 오직 저 우뚝 솟은 산과 흐르는 강물만이 침묵의 목격자일 것이다. 사료(史料)를 부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료는 분명 역사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모든 것들을 통해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겠는가.

그럼에도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가깝게는 수십 년 전부터 멀게는 수백, 수천 년의 역사를 더듬어가는 것,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혹 누군가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과거와 미래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비록 타임머신은 없지만 기자는 지난 8월 뜻밖의 여행에 동승하게 되면서 과거로의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호우 경보가 내렸던 8월 초, 파주로 향하는 마음 한켠에는 과연 억수와 같이 퍼붓는 빗줄기를 피해가며 잘 다녀올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정했던 곳 중 두어군 데를 제외하고는 폭우를 피해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 ‘임진강과 비무장지대의 막힌 혈을 뚫는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인 묵개(黙价)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의 지휘 아래 진행된 그 특별한 여행을 지금 시작한다.



북한산 문수보살을 만나다
여행의 첫 관문은 파주 월롱산성지(坡州 月籠山城址)다.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에 있는 산성 터로 2004년 5월 17일 경기도 기념물 제196호로 지정된 곳이다. 탄현면 금승리와 월롱면 덕은리, 금촌 양동동에 걸쳐 우뚝 솟아 있는 해발 246 의 월롱산은 예로부터 신산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월롱산은 북쪽으로는 임진강과 내륙지역, 서쪽으로는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해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뿐만 아니라 월롱산은 정상에 오르면 사방으로 파주 일대를 모두 조망할 수 있어 천연 요새의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지난 2003년에는 경기도박물관의 정밀 학술 조사를 통해 월롱산성이 임진강과 한강 하구 지역을 통제하던 초기 백제의 주성 역할을 담당했던 성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성의 외벽은 수직의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내부는 평지성처럼 가용면적이 넓어 천연 요새로서 안성맞춤이다.

월롱산성은 화성 길성리토성, 포천 고모리산성 등과 같이 한성백제시대 중요한 성으로서의 가치가 있으나 채석(규석 채취), 군사 및 체육시설 등으로 인한 훼손이 심해 보호가 필요한 상태다. 이러한 월롱산성에 얽힌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때는 2차 병자호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직접 전쟁에 참여한 청태종(홍타이지, 청나라제2대 황제, 재위 1626~1643)은 한양을 눈앞에 두고 월롱산성에서 3일간 대군을 머무르게 한 뒤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 전쟁 중이라면 왜 하루라도 빨리 한양을 공격하지 않고 무려 3일이라는 시간을 끌며 제사를 지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에 대해 고전연구가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는 “홍타이지가 월롱산에 올라가 한양의 북한산을 바라보는데 그 바위산의 모습이 흡사 문수보살처럼 보였을 것”이라며 “홍타이지는 이곳 월롱산성에서 죽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록에 따르면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생전에 자신이 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 말했다. 문수보살은 불교에서 많은 복덕과 반야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홍타이지는 월롱산성에서 북한산의 바위를 바라보며 아버지 누르하치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문수(文殊)’라는 개념의 실체를 확인한다.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는 “‘만주(滿洲)’라는 이름은 문수보살의 ‘문수(文殊)’에서 비롯됐다. 즉 분열돼 있던 여진족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표현이 ‘만주’였고, 청(淸)이라는 국호였다”며 “불교에서 ‘문수보살’은 지혜의 화신이다. 정치지도자에게 지혜는 무엇이겠는가? 분열된 민족을 통합시키는 방책이다. 만주는 문수이고, 문수는 통합”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만주족’이라는 이름의 뜻에 대해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만주족의 옛 이름은 ‘여진’이며, 이를 만주어로 하면 ‘주센(Jusen)’ 또는 ‘주신’이다. 조선(朝鮮)으로 들리지 않는가. ‘조선족’이라는 커다란 민족의 범주로부터 우리 한민족과 만주족이 분리돼 각기 발전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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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태조 누르하치 무덤에서 아들 홍타이지가 제향 드리는 모습 재현
 


단재 신채호 선생의 저서 <조선상고사>에는 “조선족(朝鮮族)이 분화해 조선(朝鮮), 선비(鮮卑), 여진(女眞), 몽고(蒙古), 퉁구스족이 되고, 흉노족이 천산(遷散)해 돌궐, 헝가리, 터키, 핀란드 등 족(族)이 되었나니”라는 기록이 있다.

한편 홍타이지는 심양 천도 후 여진을 만주로 부르도록 규정하는데 이때 기존의 부족 개념에서 벗어나 ‘크고 새로운 만주국’이라는 의미가 부여됐다. 한마디로 말해 혈통이나 문화 중심의 민족개념이 사회적 개념으로 바뀌면서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만주족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는 “이런 개념에서 본다면 병자·정묘호란은 만주족의 수를 늘리려는 의도로 시도했을 가능성도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청나라 때 편찬한 만주 씨족 원류에 관한 책인 <만주팔기씨족통보>에는 ‘조선인 72개 성씨가 팔기에 편입돼 있다’는 기록이 있다.

3일! 홍타이지가 월롱산성에서 아버지와 다시금 조우하며 보낸 시간. 조선에게 그 3일은 운명을 가르는 시간이었다. 저항을 할 것인가, 항복을 할 것인가. 그 뒤의 이야기는 잘 알고 있는 그대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을 가고, 세자는 강화도로 피신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결국은 인조의 삼전도 굴욕으로 끝을 맺는다. 1637년 1월 30일의 일이다.

임금의 피난길 도왔다던 화석정
화석정(花石亭)에서 바라본 임진강은 쌍태극을 그리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빗소리에 어우러진 탓인가. 흐르는 강물이 지나간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파주시 파평면 율곡 3리에 자리 잡은 화석정은 임진나루 바로 위쪽에 세워졌다. 소재지에서도 읽을 수 있듯 이곳은 조선 중기의 큰 학자였던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살았던 곳이다. 그의 호 ‘율곡’도 아버지의 고향인 이곳 지명에서 따왔다. 율곡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논하며 시(詩)를 지었다. 화석정에서 바라보이는 마을 그곳이 바로 율곡마을이다.

이곳 화석정에도 전해져 내려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율곡 이이와 선조에 얽힌 일화다. 일화에 따르면 율곡은 살아 있을 때 틈나는 대로 이곳 화석정 기둥에 기름을 발라두게 했다. 율곡은 살아생전 전쟁에 대비해 군사를 길러야 한다며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율곡의 예상이 맞았던 것인가. 그가 죽고 난 8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서울을 빠져나와 의주로 피난길에 오른 선조에게 위기가 닥쳤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임진강가에서 발이 묶이고 만 것이다. 이때 갑자기 강 전체가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진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선조의 피난길을 수행하던 이항복이 기름을 먹인 화석정에 불을 놓아 주위를 밝힌 것이다. 율곡과 친분이 있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 화석정에 기름을 칠해둔 것을 기억하고 불을 붙였다는 이야기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 과연 화석정에 붙은 불이 임금이 가는 길을 밝혔을지는 의문이다. 다만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던 율곡 선생의 선견지명을 높이 산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이곳 화석정에 기대서면 한양의 삼각산과 송도의 오관산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임진강과 어우러진 그 절경이 빼어났다고 한다. 날이 좋으면 개성의 송악산도 보인다. 직선거리로 따지면 20㎞ 정도 떨어진 거리다. 화석정의 풍경을 보며 율곡이 8세에 지었다는 시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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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정에서 바라본 임진강과 풍경
 


林亭秋已晩(임정추이만)
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어드니
騷客意無窮(소객의무궁)
시인의 시상(詩想)이 끝이 없구나
遠水連天碧(원수연천벽)
먼 물줄기는 하늘에 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상풍향일홍)
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향해 붉구나
山吐孤輪月(산토고륜월)
위에는 둥근 달이 떠오르고
江含萬里風(강함만리풍)
강은 만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塞鴻何處去(새홍하처거)
변방의 기러기는 어느 곳으로 날아가는고?
聲斷暮雲中(성단모운중)
울고 가는 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 이이 지음/ 임동석 옮김



여진 정벌한 윤관 장군
고려 때 윤관(尹瓘, ?~1111)이라는 장군이 있었다. 그는 1107(예종 2)년 20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해, 동북지역에 9성(城)을 설치하고 고려 영토를 확장한 인물이다. 파평(坡平) 윤씨로 고려 개국공신인 윤신달(尹莘達, 893~973)의 후손으로 일찍부터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성장하며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후 예종 즉위 후 정2품 평장사로 있다 여진 정벌이 시작되면서 총책임을 맡아 동북 9성을 쌓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정세가 바뀌자 여진정벌의 실패로 모함을 받아 벼슬을 빼앗기고 공신호마저 삭탈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비호한 예종의 덕으로 1110년 다시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가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했다. 1130(인종8)년 예종의 묘정에 배향됐으며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사적 제323호)에 있다. 훗날 여진은 9성의 환부와 강화를 요청했고 조정은 9성을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여진에게 돌려줬다.

한편 윤관이 고려 조정의 견제를 받아 벼슬을 빼앗겼을 당시 윤관의 아들 가운데 두 명이 행방불명 됐는데, 아버지를 따라 여진 정벌에 나섰다가 아버지의 파면으로 개성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여진족 땅으로 망명했다고 본다. 이에 윤관의 아들들이 마의태자 후손과 함께 금나라를 세우는 주체세력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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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서원에서 후학을 가르치던 율곡 이이가 틈만 나면 올라와 임진강을 내려다보면서 시문을 읊기도 했다는 화석정.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임진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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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 설마리 추모공원 내에 설치된 베레모 조형물
 


영국군 설마리 추모공원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감악산 기슭인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영국군 제29여단 소속 글로스터셔 연대(Gloucestershire Regiment) 제1대대가 235고지 등에서 중국군 제63군에 맞서 싸운 전투다. ‘글로스터 고지 전투(Battle of Gloster Hill)’라고도 한다.

1951년 4월 22일 중국군 제19병단이 문산-파주 지역을 공격해왔다. 특히 글로스터셔 연대의 제1대대가 지키는 마지리 일대를 집중 공격했다.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는 사흘 밤낮 총격전을 벌이며 고지를 사수했지만 결국 감악산 기슭인 설마리 일대의 고지로 물러났다. 그렇게 적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도 그들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저항했다.

푸른 눈의 전사들. 그들이 10배가 넘는 적의 공세를 저지하는 동안 한국군과 유엔군은 방어선을 재구축하는 시간을 벌었고, 수도 서울을 사수할 수 있었다. 이역만리 먼 땅에서 자유를 수호하다 전사한 이들이 없었다면 전쟁의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에 있는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은 제29여단 글로스터 1대대와 제170경 박격포대의 소대장병 등 영국군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14년 4월 23일 조성됐다.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선택이라 해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이역만리에서의 전쟁은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청춘을 채 꽃피워보지도 못한 채 어둡고 차가운 산속에서 잠든 청년들. 하늘도 그들의 희생에 감동한 것인가. 일행이 이곳을 방문할 당시 잔잔한 빗방울이 대지를 적셨다. 공원 입구에서 평화의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6・25 참전 당시 영국군이 썼던 베레모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먼저 눈에 띈다. 그 뒤로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는 글이 적힌 추모비가 보인다. 일행은 이곳 추모비 앞에서 잠시 머물며, 그들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손으로 곱게 접은 종이꽃을 헌화하며, 시들지 않는 이 꽃처럼 그들의 희생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마음을 전했다. 뭉클했다. 다시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살아 있는 자들의 몫이며, 후대에 전할 영원한 유산인 것이다. 더 이상 죄 없는 이들의 목숨이 사상과 이념의 갈등으로 인해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사라져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전쟁 없는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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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투에 참여했던 영국군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 2.설마리 전투비 3.제임스 칸 중령의 십자가
 



설마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글로스터교를 건너면 임진강 전투 당시 글로스터셔 연대 제1대대를 이끌었던 제임스 칸 중령의 십자가가 보인다. 이 십자가는 그가 포로생활 중 만든것으로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예배드릴 때 사용됐다.

설마리 전투비는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임진강과 설마리에서 벌어졌던 영국군과 중국군(중공군)의 치열했던 전투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수적으로 열세에 있던 글로스터셔 대대는 혈전 끝에 지금의 전투비가 있는 설마리 계곡까지 후퇴했다.

칸 중령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해 철수하든가 중공군에 투항하든가 결정해야 했다. 그는 끝까지 싸우는 길을 택했다. 글로스터셔 연대는 혈전 끝에 67명만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으나 이 전투에서 59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526명은 포로가 됐다. 3년간의 포로수용소 생활중 34명이 사망했다.

1957년 6월 29일 영국군과 한국군 보병 제25사단은 동굴 주변의 돌을 채석해 입구에 쌓아올리고, 상하 각 2개씩 총 4개의 비(碑)를 부착한 형태로 전투비를 건립했다. 위쪽에 있는 2개의 비 중 왼쪽엔 유엔기, 오른쪽엔 희생된 영국군 부대 표지가 새겨졌다. 아래쪽의 왼쪽 비에는 한글, 오른쪽 비에는 영문으로 설마리 전투 상황이 기록됐다. 유엔군 참전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서 2008년 등록문화재 제407호로 지정됐다.

1999년 4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한 일정 중 이곳을 방문해 헌화했으며, 영국군 참전용사들도 매년 이곳을 방문해 추모행사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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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고성 당포성에 울린 기도소리
6・25전쟁 당시 서부전선 최전방이었던 경기도 파주. 이곳엔 다소 생소한 이름의 묘지가하나 있다. 적성면 답곡리 도로변 한쪽에 자리 잡은 ‘북한군/중국군’ 묘지즉 북중군묘지다. 적군묘지로도 불리는 이곳은 6・25전쟁 때 전사한 북한군과 중국군의 유해를 안장한 곳이다. 제네바 협정과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 지난 1996년 6월 조성됐다. 총면적 6099㎡(약 1845평)인 이곳엔 총 1102구의 유해가 묻혔다. 무장공비나 수해 때 떠내려 온 북한인도 포함돼 있다. 이들 묘비는 모두 북한의 개성 송악산 쪽을 바라본다.

묵개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는 10여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적군묘(敵軍墓)의 죽은 혼령들을 달래는 위령제(慰靈祭)를 지내왔다. 살았을 때는 물론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의 넋이라도 달래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념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가족의 품을 떠난 이들. 비록 적군이라 해도 이들 또한 전쟁이 만들어낸 희생자들이었다.

일행은 한여름 칠흑 같이 어두운 밤, 고구려의 고성 당포성으로 향했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는 매년 그래왔던 것처럼 이곳에서 전쟁 중 죽은 혼령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먼저 고유문(告諭文)을 읊고 도교의 반야심경이라고 할 수 있는 <청정경(淸淨經)>을 낭송했다. <청정경>은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도사였던 갈현(葛玄, 164~244)의 저서로 알려져 있다.

서상욱 역사칼럼니스트는 <청정경>에 대해 “공(空)과 무(無)가 핵심사상이지만 한마디로 ‘절대성에 대한 부정’을 말하고 있다”며 “세상에는 영원불변하는 것도 없고 항상 변화한다. 즉 이 세상 만물은 생장, 소멸, 변화하다보니 절대적 가치는 없는 것이고 모든 것은 상대적 개념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특이한 것은 그가 위령제를 지낼 때 바로 이 <청정경>을 제문으로 올린다는 것이다. <청정경>으로 북중군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이 깨끗하게 씻겨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다시 태어난 세상에서는 원하는 바를 이루고 가라는 염원을 담아 그렇게 그날 밤 당포성에서는 또 한 번 <청정경>이 낭송됐고, 이후 소지해서 하늘로 날려 보냈다.

이날 위령제에는 신명숙(대진대학교 무용과) 교수가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진혼 무를 펼쳐보였다. 자식 잃은 어머니의 애잔한 마음이 묻어나는 듯, 함께한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춤사위였다. 한 발작 내딛는 발걸음이, 허공을 가르는 손짓이 간절한 기도소리가 되어, 그렇게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다녔다. 그렇다. 이날 당포성의 밤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고,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웠으나 또한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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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성에서 북중군 위령제를 지내는 모습
 


위령제를 지내고 돌아오는 마음이 왠지 무거웠다.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청년들이 권력을 잡은 철없는 어른들의 이념과 사상 놀음에 이유도 모르고 죽어갔다. 역사 이래 이념의 희생자들은 죄 없는 평범한 소시민들이었다. 오죽하면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 말하겠는가. 허나 권력은 손에 꽉 움켜쥐면 쥘수록 결국 으스러지고 만다. 욕심을 놓아야 한다. 이념과 사상이 아닌 이치와 진리로 살아가야 한다.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사로잡은 생각은 나부터 그런 사람이, 그런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쟁 없는 평화 세상, 그 세상을 꼭 후대에 유산으로 남겨주고 싶은 마음이다.

날이 밝아 새 아침이 시작됐다. 일행은 또 다른 일정을 소화하며 파주가 품은 역사을 돌아보았다. 어디인들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파주 역시 많은 역사를 품고 있었다. 이번 여행의 행선지가 주로 전쟁과 관련된 곳이기에 유독 ‘묘(墓)’를 찾을 일이 많았다. 임진왜란 당시 부산에 침입한 왜적과 맞서 싸우다 성의 함락과 함께 전사한 정발(1553~1592) 장군묘(경기도 기념물 제51호)를 시작으로 역시 임진왜란 때 큰 업적을 세운 의열공 박진 (1560~1597) 장군묘(경기도 기념물 제110호)를 찾아 그들의 업적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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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없이 산화한 어느 북한군의 묘비 앞에서
 


이후 신라 제56대 왕이자 마지막 왕인 경순왕 의 능을 찾았다. 신라의 왕릉이 경주 지역을 벗어난 것은 경순왕릉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경순왕릉은 임진강 건너 개성과 거의 수평선상이자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산야에 위치해 있다.

마지막으로 일행은 전날 밤 위령제를 지내 그 넋을 달랬던 북한군 묘지(북중군 묘지)에 들렀다. 잔잔하던 하늘이 묘지에 가까워지자 갑자기 비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총면적 6099㎡인 묘지는 북한군 유해만을 안장한 1묘역과 북한군과 중국군이 혼재된 2묘역으로 구분된다.

우리 군에선 원래 이곳을 ‘적군묘지’로 불렀다가 현재와 같이 ‘북한군/중국군’ 묘지라는 중립적 표현으로 명칭을 바꿨다. 유해는 총 1102구에 이르며 묘비는 모두 개성 송악산을 바라볼 수 있도록 북쪽을 향해 있다.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이들을 위한 배려다.

대리석 묘비에는 전사자의 이름과 발굴 장소등이 적혀있으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은 ‘무명인’으로 표시돼 있다. 일행은 다시 한 번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마음이 끌리는 묘비 위에 술 한 잔을 흩뿌렸다. 다음 생이 있다면 못다 핀 그 꽃송이 활짝 피우길 바라며 ‘임진강과 비무장지대의 막힌 혈을 뚫는 여행’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 아니 잠 못 드는 영혼들이 우리를 떠나보내는 그 길 위로 아쉬운듯 눈물이 빗물 되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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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