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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끝, 그곳에선 동이 튼다
해남 두륜산, 땅 끝 탐방

글, 사진. 장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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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 가련봉과 오심재를 알리는 표목
 

정말 길의 끝일까. 한 걸음을 내디디면 또 다른 길이 열리지는 않을까. 길 잃은 방랑객처럼 정처 없이 떠돌 때 땅 끝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고 시작이었다. 바다와 맞닿은 땅.

1000년 전 해상왕 장보고는 이곳에서 해양실크로드를 개척했고 한반도는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지로 우뚝 섰다. 그 힘찬 기운이 또다시 뻗어 나가려 하듯 땅 끝은 동이 트길 기다리고 있었다. 탐방팀은 땅 끝에 숨겨놓은 또다른 의미를 찾아 나섰다.

해남 두륜산과 땅 끝
한반도 서남쪽 모서리에 자리한 전라남도 해남은 동쪽으로는 강진군, 남쪽 바다 건너서는 진도군과 완도군이 있다. 3면이 모두 바다인 반도이며 수많은 도서가 산재해 있다. 지세는 험준하고 하천은 나뭇가지 모양을 이루며 바다로 직접 흘러든다.

해남에는 우리나라 최남단인 ‘땅 끝’이 있다. 정확히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갈두 마을(땅 끝)이며, 북위 34도 17분 21초에 걸쳐있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을 통해 “해남 땅 끝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가 2천리”라고 했다.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명명한 이유다.

조선 중종 때 지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땅 끝이라는 말 대신 ‘토말(土末)’이라고 했고, 이곳을 남쪽 기점으로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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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 정상을 알리는 가련봉 비석
 

해남에는 명산인 ‘두륜산(頭輪山)’이 있다. 다도해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기암절벽을 품은 두륜산. 주봉인 가련봉(703 )과 노승봉(688 ), 두륜봉(630 ), 고계봉(638 ) 등 8개의 봉우리가 U자형으로 돼 있다. 원래 이 산에 대둔사라는 절이 있어 대둔산이라 불렀다.

지금의 두륜(頭輪)은 백두산의 ‘두(頭)’와 중
국 곤륜산의 ‘륜(輪)’이 합쳐진 이름이다. 곤륜산은 신비한 산이자 마고할미가 살던 비밀의 산으로, 이곳에서 시작된 맥이 동쪽으로 흘러 한반도 백두산에 닿았고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호남정맥의 끝 기류인 두륜산에서 쌍봉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 영험한 기운 때문일까. 한반도는 호랑이를 닮아있다.

오소재를 시작으로 두륜산에 올랐다. 장마철
로 흐리고 후덥지근한 날씨라 한 걸음을 내딛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해남의 정기 때문인지 나무들은 유난히 싱그럽다. 비껴드는 햇빛에 푸른 잎들은 몸을 뒤치며 반짝거린다. 원추리꽃은 바위틈 사이로 고개를 살짝 내밀고 객을 맞이한다.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쯤 하늘은 우리에게 정상을 허락한다. 가련봉 정상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는데 옅은 먹색이 퍼지듯 하늘은 빠르게 수묵
화를 그려냈다. 운무에 휘감긴 두륜산 정상. 그야말로 숨 멎을 듯한 천혜의 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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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 정상을 알리는 가련봉 비석
 


 
저 멀리 산 사이로 천년고찰 해남 대흥사가 보인다. 더 멀리 바다도 보인다. 그 옛날 이 땅은 대륙과 해양실크로드가 함께 발달했다. 이때 비단뿐 아니라 여러 종교와 문화·사상이 함께 유입된다. 그중 하나가 불교문화요, 대흥사가 그 증거다. 불교는 크게 육로로 들어온 북방불교와 해양으로 들어온 남방불교로 나뉘는데, 대흥사는 북방불교다. 반면 해남 달마산이 품은 미황사는 남방불교다.

문득 ‘서기동래(西氣東來)’라는 말이 떠오른
다. 조선 중종 때 유학자이자 천문지리학이자인 남사고 선생이 쓴 예언서인 <격암유록(格菴遺錄)>에 기록된 글이다. 이 글을 문자 그대로 본다면 ‘서쪽의 기운이 동쪽으로 온다’는 뜻이다. 실크로드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의문이 든다. 도대체 서쪽 기운은 무엇이고 동쪽으로 온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 말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의 경서인 <성경>이다. <격암유록>에 함께 적힌 ‘상제예언 성경설(上帝豫言 聖經設)’, 즉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해 놓으신 말씀’이라고 하듯 남사고 선생의 예언 속에 창조주의 뜻이 함축적으로 담긴 것이다. 그러니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알 때 비로소 서기동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이요, 오늘날 눈앞에서 이뤄지는 역사를 알 수 있게 된다.

먼저 서쪽(西), 동쪽(東)이라는 것은 방위(方
位)를 가리킨다. 창조주 하나님은 예레미야 31장에서 ‘새 일 창조’를 약속하시고 약 600년 후 서쪽 유대 땅에 예수님이 오시므로 ‘새일’이 시작된다. 그리고 역사는 동쪽에서 완성된다.

중요한 것은 ‘새 일’이 무엇인가다. 예수님은 
범죄한 죄의 씨가 아닌 죄 없는 하나님의 씨로 난 분이다. 이것은 지금껏 한 번도 없던 ‘새일’이다. 하지만 인류의 죄 해결을 위해 처녀 마리아 몸을 통해 죄의 모습, 곧 육신으로 태어나야 했다. 그리고 인류 최고의 형벌인 십자가상에서 죄사함의 피를 흘렸다.
산 정상이 목적지인 사람은 반드시 표목(標木) 안내를 받아야 길을 잃지 않는다. 신앙인도 구원의 목적지에 가려면 길 안내를 받아야 하는데, 범죄로 길 잃고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수님이 길표이자 표목이었다. 다시 말해 표목으로 오신 예수님은 ‘서기동래’라 하듯 구원의 목적지 곧 동방(東方)을 안내하고 있었다.

동방(東方)이란 무엇인가
해남 땅 끝에서 보면 맑은 날엔 고산 윤선도 유배된 ‘보길도’와 멸치젓이 유명한 ‘추자도’가 보이고 바다 건너 ‘제주도 한라산’까지 보인다. 그리고 이곳 ‘땅끝탑’에는 땅 끝이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점’이라는 글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인지 금방이라도 출항할 것 같은 배 조형물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땅 끝인데 왜 시작점이라고 한 걸까.

‘동쪽, 동방(東方)’ 그렇다. 우리가 해남 땅 끝
에 온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선지자 이사야 41장에는 ‘동방’ ‘땅 끝’ ‘모퉁이’ ‘해 돋는 곳’ 등이 같은 의미로 묘사돼 있다. 즉, 땅 끝은 문자 그대로의 땅 끝을 넘어 인류가 찾고 깨달아야 할 또 다른 의미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창조주는 자기의 능력과 신성을 만물 가운데 
보여 알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남사고 선생도 ‘서기동래’에 창조주의 뜻이 담겼다고 하니 다시 <성경>을 살펴보자. 창세기 2장 7절에 하나님은 흙과 같은 인생(육체)에게 ‘생기(生氣)’를 불어넣어서 ‘생령(生靈)’이 되게 한다고 했다. 여기서 생기는 ‘하나님의 말씀(요한복음 1장 1~4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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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이 끝이 아닌 희망과 시작임을 알리는 배 모양의 조형물이 땅끝마을에 설치돼 있다
 

그런데 ‘땅 끝’, 즉 ‘땅의 끝’이라고 했다. 사람도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흙덩이에 생기를 넣어 생령이되도록 살렸는데 다시 죽어서 흙으로 돌아갔다. 결국 땅(흙)이 상징하는 건 죽음이요, 땅끝은 ‘죽음이 끝나는 것’을 뜻한다.

땅 끝이 맞닿은 바다에서는 해가 뜨는데 시편 
84편 11절에는 하나님을 해라고 했다. 요한계시록 7장 2절에는 천사가 하나님의 인(印, 도장, 말씀)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온다고 했다. 즉, 해가 돋는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마치 창세기 2장 8절의 동방의 에덴에서 시
작된 하나님의 역사와 같다. 그러니 ‘땅 끝’은 ‘해 돋는 곳’ ‘모퉁이’ ‘동방’이 된다. 과연 만물속에서 만고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

그럼 이곳 해남 땅 끝이 ‘서기동래’의 예언이 
이뤄지는 곳일까. 아니다. 우리가 두륜산의 의미를 통해 알아보았듯 지구촌의 땅 끝이 한반도라는 것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 하지만 이 또한 표면적 땅 끝이다. 땅 끝이 아닌 곳이 없고 해 돋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이에 한반도 어딘가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 역사가 시작되고 서쪽에서 예언한 것이 이 동쪽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해가 돋는 곳이 따로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곳은 어딜까. 우리는 대한민국 경기도 과천
(果川) 문원동(文原洞), 청계산(淸溪山), 막계리(莫溪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름 값 한다’는 말이 있듯이 人名과 地名은 장차 이루어질 예언과도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청계산이다. ‘맑을 청
(淸)’ ‘시내 계(溪)’ 즉, 맑은 물인 하나님의 말씀이 흐르는 곳이다. 이는 구약 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와 있던 시내산과도 같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두개의 돌판(법, 
말씀)을 받았다. 청계산에서도 하나님의 법을 받았고 또 흘렀다. 그러나 막계리(莫溪里), 즉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금지)하니 흐르던 물이 어느새 끊어진다. 빛 된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과 하나 되면서 혼돈과 흑암이 찾아왔다.

이를 창세기 1장 2절에서는 땅이 혼돈하고 흑
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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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남단 땅끝을 알리는 비석
 
청도, 품고 있던 빛 드러내다
그럼 이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된 역사가 끝나야만 하는가. 그럴 순 없다. 하나님은 말씀이 흐르는 진리의 산을 재창조해야 했다.

밤이 된 이 땅 끝에서 빛을 찾아 나섰고 비로
소 찾았다. ‘청계’라고 했듯이 ‘청도’가 있다.바로 경상북도 ‘청도(淸道)’였다. 여기서 ‘길도(道)’는 말씀을 뜻하는데 맑은 물, 곧 새로운 청계가 출현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아니 원래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다가 때가 되어 비로소 보일 뿐이다. 결국 청도란 수정 같이 맑은 하나님의 말씀이자, 그 ‘말씀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실제 청도는 강인한 기운을 가진 땅이다. 신라 진평왕 때 승려 원광이 화랑에게 일러준 다섯 가지의 계율, 즉 세속오계의 화랑정신이 꽃핀 곳이자 1970년대 시작된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다. 이뿐 아니라 조선말 고종황제의 등극을 예언했다는 유명한 관상가 박유붕(1806~?)도 청도 출신이다. 그간 잠들었던 땅이 깨어난 걸까. 긴긴밤을 지나 새벽을 두드리듯, 청도는 품고 있던 빛을 드러내고 있다.

문득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떠오
른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받으라”고 당부하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回復)되는 때가 이때입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답하신다. 즉, 회복의 역사가 ‘땅 끝’인 ‘해 돋는 데’에서 이뤄진다는 말이다. 이는 창세기 때 잃어버린 실낙원인 동방의 에덴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니, 회복을 넘어 광복(光復)의 역사다. 이를 미리 알려준 인물이 바로 남사고 선생인 것이다.

오늘날은 모든 물질문명 시대가 끝나고 진리의 시대, 정도(正道)의 시대가 이뤄지고 있다. 누군가는 이 이치를 깨닫고 섭리 가운데 진행되는 역사에 동참하지만 여전히 방황하는 이도 있다. 분명한 건 남사고 선생의 예언은 더욱 뚜렷해진다는 점이다. ‘서기동래’한 구원의 역사, 땅 끝에서 비추는 밝은 빛에 이제는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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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땅끝마을에서 희망을 품고 드넓은 바다로 출항하는 배 한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