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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고귀함, 강력한 왕권

‘태실(胎室)’로 드러내다


글. 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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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세종대왕자태실(출처:성주군청)
 


사람은 태어나 성장하고 병에 걸리면서 늙어죽는다. 이것은 모든 만물의 이치이면서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다. 그래서 사람들은 탄생을 축복하고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 애쓴다. 예로부터 풍수지리에 따라 묘의 위치를 선택했으며 아이의 교육은 태어나기 전부터 태교로 시작을 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는 탄생과 죽음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새 생명의 고귀함을 알았고 그러면서 독자적으로 발달한 문화가 있는데 바로 ‘태실(胎室)’ 문화다. 태(胎)는 엄마가 아이의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존재로 예로부터 ‘생명의 근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왕실에서는 태를 국가의 운명과 관련있다 생각해 매우 소중히 보관했다.

진천 김유신 태실
“신라 진평왕 때 만노군 태수 김서현의 아내 만명이 아이를 밴 지 20달만에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유신이라 하고 태를 현의 남쪽 15리에 묻었다. 신라 때부터 사당을 두고 나라에서 봄, 가을로 향을 내리어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에서도 따라 행하였다.”
- <세종실록지리지 진천현>

우리나라에서 태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이 김유신의 태를 묻은 기록으로 진천 태령산에 태실이 있다. 그래서 태령산에는 김유신 태실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오는데 김유신의 태를 묻을 때 하늘에서 신인이 내려와 태실 옆에 얼마동안 앉아 있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산의 이름 또한 태령산(胎靈山)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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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김유신 태실(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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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성종 태항아리와 태지석(출처:문화재청), 우)숙종 태항아리와 태지석(출처:문화재청)
 


약 1400년 전에 만들어진 김유신 태실은 태령산 정상부에 위치해 있으며 형태는 원형으로 3단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었다. 또 산의 정상을 따라 돌담을 쌓았는데 높은 곳은 6~7층, 낮은 곳은 3~4층으로 되어있고 태아의 모습으로 쌓았다. 태실을 보호하고 신성한 구역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왕실의 장태 풍속의 정립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풍수지리사상이 성행했다. 그러면서 고려시대에는 ‘안태제도’가 있었는데 ‘안태’는 왕가의 태를 명당에 설치한 태실에 편안하게 봉안하는 격식 및 절차를 뜻한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왕이 즉위하거나 태자로 책봉이 되면 태실을 명당에 드러나도록 조성했는데 태실이 있는 지역을 승격하는 등 ‘안태’는 고려 왕실에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다. 이런 고려 왕실의 태실은 양광도(現 경기 남부와 충청도, 강원도의 일부)와 경상도에 주로 많이 조성됐다.

“사찰 문 밖의 왼편 봉우리 꼭대기에 명종 원년에 태자의 태를 안치하였고, 이를 기하여 용문사를 창기사(昌期寺)라 개칭했다. 그 후 명종 9년에 이르러서는 중수 공사를 완공하고 참선하는 승려 500명을 모아 50일에 걸쳐 법회를 열었다.”
- <중수용문사기비> 中

경북 예천에는 고려 제22대 임금인 강종의 태실이 있다. 원래 용문사는 신라 경문왕 때 세워진 고찰로 명종 때 강종의 태실을 조성하면서 ‘용문사 창기사’로 개명됐다. 이후 조선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의 태실을 봉안한 이후 ‘성불사 용문사’로 다시 개칭됐다. 이후 정조의 첫 아들이었던 문효세자의 태실도 이곳에 봉안한 이후 ‘소백산 용문사’로 현재까지 불리고 있다.

이렇듯 한 곳의 명당에 시대를 거쳐 여러 태실을 조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태를 묻는 ‘장태’ 문화는 고려시대 때 정립되어 조선시대로 이어졌으나 현재 고려 때의 태실은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장태 문화는 고려 왕실에서만 행해지던 것이 아니라 민간에서도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그의 아들 정종, 태종의 경우 조선 왕실에서 태어나지 않았음에도 태실이 조성되어 있다.

태조는 즉위하면서 권중화를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로 임명해 태실을 조성할 땅을 찾도록 했다. 이에 권중화는 완산부 진동현에 태실을 마련할 것을 보고했고 태조는 해당 고을을 승격시켜 진주(珍州)로 삼았다. 원래 태조의 태함은 함경도 용연에 묻혀 있었다. 이를 통해 민간에서도 장태 문화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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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명종대왕 태실(출처:문화재청)
 


왕실의 태실을 위해 묘를 옮기기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왕실은 물론 사대부 집안까지 장태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먼저 왕실에서는 원자와 원손은 1등지, 대군과 공주는 2등지, 후궁 소생의 왕자와 옹주는3등지로 나눠 태를 묻었으며 이 중 왕위에 오르면 태실 주위에 돌난간과 표석 등을 세우면서 추가적인 공사가 이뤄졌다. 태실 조성 자체가 왕권 강화로 드러낸 것이다.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왕의 아들의 태실을 국왕 태실로 조성한 것은 세종 때이다. <세종실록>에 보면 “이제 장차 길한 때를 가리어 태를 봉할 것이오니, 청컨대 전례에 좇아 태실도감을 설치하여 길지를 택하도록 하소서.”라고 적혀있다. 이를 통해 세종대가 돼서야 국왕 태실 조성을 관장하는 태실도감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전에는 태조가 명했던 태실증고사가 관련 업무를 수행했다.

조선 전기에는 태실증고사를 지방에 보내 좋은 땅을 미리 찾도록 했다. 높고 정결한 곳을 선호한 왕실은 둥근 봉우리에 태를 묻어 보관했고 태봉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태실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금표를 세워 인근을 금지 구역으로 만들었다. 1등급인 왕의 태봉으로부터는 300보, 2등급인 대군의 태봉은 200보, 3등급인 왕자의 태봉은 100보로 정해 이 안에서는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했다.

왕후를 위한 태실도 조성이 됐는데 세종의 비였던 소헌왕후의 태실을 세종 20년에 만든다. <세종실록> 20년 1월 20일 기록에는 “중궁 태를 처음에는 양주 동면 여염 사이에다 갈무리 하였는데 다시 길한 곳을 가려서 옮겨 갈무리 하도록 명하였다.”고 적혀있다. 이후 소헌왕후의 태실을 이장하면서 품관 8인과 군인 8명을 정해 수호하도록 했다. 아마 세종은 장인 심온의 죽음에 대한 미안함과 위로로 중궁의 태실을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선례가 되어 세자의 태실 또한 품관과 군인을 통해 수호하도록 했다.

특히 성주 태봉산에는 세종의 왕자들의 태실이 모여 있어 눈길을 끈다. 세종의 19왕자 중문종을 제외한 18왕자의 태실과 세손 단종의 태실이 함께 있어 모두 19기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원래 성주 이씨의 증시조 이장경의 묘가 있던 곳이었다.

이와 관련된 설화도 전해지는데 옛날 어느 도사가 이 땅에 대해 “아무리 자손들이 잘되더라도 재실을 짓지 말고 주위의 나무도 베어선 안 된다”고 일렀다. 하지만 이장경의 후손들은 성묘를 할 때마다 초라해 보여 나무를 베고 재실을 지었다. 이에 세종의 왕자들의 태실을 만든 곳을 찾던 지관들이 소나기를 피해 찾은 곳이 이장경의 재실이었고, 지관들은 이곳이 명당임을 알아보고 세종에게 보고하자 이장경의 묘를 옮기게 했다고 한다. 당시 풍
수학제조는 이장경의 후손 이정녕이었는데 이를 보고하지 않아 귀양을 가기도 했다 하니 얼마나 명당을 찾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이곳은 유일하게 군집을 이룬 형태로 세종 20~24년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후 왕위 찬탈을 반대했던 다섯 왕자의 태실을 파괴해 5기의 태실은 연엽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남아있지 않다. 세조는 왕위에 즉위한 후 태실에 특별히 귀부를 마련해 가봉비를 태실석물 앞에 세워둬 왕권의 강력함을 드러냈다.

세종의 원자였던 문종의 태실은 성주에 다른 왕자들과 함께 있었으나 왕위에 즉위한 후 “여러 대군들과 함께 있는 것이 옳지 않다”하여 예천 명봉사로 옮겼다. 이후 명봉사에는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의 태실도 봉안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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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세종대왕자태실 전경(출처:성주군청)
 


조선 후기 태실
임진왜란 이후 태실의 문화 또한 바뀌었다. 먼저 태실의 길지를 알아보던 태실증고사의 일을 각도 도사가 관상감의 지리학 관원과 함께 먼저 살피게 됐다. 그러다보니 선조35(1602)년 이후로는 태실증고사를 파견하지 않고 관상감에서 맡도록 했다.

그리고 왕으로 즉위한 뒤 태실을 다시 단장하는 태실가봉도 조금씩 미루기도 했다. 인조와 효종은 태실가봉을 하지 않았고, 숙종은 흉년으로 인해 몇 년을 미루기도 했다. 이는 태실 가봉으로 인해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기도 했다.

또 조선 후기로 가면서 인구가 증가하면서 땅이 부족해졌고 이에 영조 34(1758)년에는 ‘태봉윤음(胎峰綸音)’을 발표해 부모가 같을 경우 왕실 자녀들의 태를 같은 산에 묻도록 했다.

이러한 태실은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파괴되고 만다. 일제는 태실이 조성되어 있는 명당이 탐났고 이에 왕실의 정기를 끊고자 전국에 흩어져 있던 태실을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겼다. 일제는 국왕 등의 태묘 54기를 옮기면서 태를 담았던 태항아리와 부장품들을 빼돌렸고 태실 앞에 세워놓은 작은 이름표에는 ‘쇼와(昭和)’를 적어 놨다. 지금은 지워놨지만 이를 통해 일제의 만행을 알 수 있다.

탄생은 축복이다. 그리고 모든 부모는 나의 아이가 잘 자라길 바란다. 태실 또한 이러한 마음에서 비롯됐다. 왕권 강화라는 이유도 있지만 태아로 있을 때 어머니와 연결됐던 ‘태’를 좋은 땅에 묻어 이 아이가 무병장수하길 바라는 마음도 컸다.

이는 왕실뿐만이 아니라 민간에서도 이뤄졌고 최근까지도 태를 묻지는 않아도 무명천에 보관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처럼 생명의 고귀함과 부모의 사랑이 모여 만들어낸 ‘장태’문화는 과거 우리의 조상들의 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현재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 내 태실은 비공개 상태다. 문화재청은 탐방로와 관람편의시설 등을 조성한 후 오는 9월부터 해설사와 함께 제한적으로 관람할 수 있도록 개방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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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가 적혀있던 태실비(출처:문화유산채널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