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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와 함께한 한양도성 둘레길
서울의 울타리, 아로새긴 역사 만나다
 
초록이 물들기 시작하는 5월 중순, 글마루 편집국은 20여명의 독자들과 함께 ‘한양도성 둘레길 탐방’에 나섰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의 문화를 돌아보는 시간. 송골송골 맺히는 땀을 닦으며, 역사의 현장을 함께 걸었다.
글/사진 박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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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가 아로새겨진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의 가치관이 절대적으로 반영된 성이다. 그는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서울을 건설하고 싶었다. 이는 유교국가의 출범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다. 한양도성은 1392년(태조 5년) 조선의 도읍을 송악(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축조되기 시작했다. 북악(백악)산·낙산·남산·인왕산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 차례 개축되어 왔다. 수도를 방위하는 타원형의 도성으로서는 세계에서 그 유형을 찾아볼 수 없을만큼 큰 성이다.
 
한양도성에는 우리 역사 전체가 아로새겨져 있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 민족이 발전시켜 온 축성기법과 성곽구조를 계승했고, 조선시대 성벽 축조 기술의 변천, 발전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처음 축조 당시의 모습은 물론이고 후에 보수하고 개축한 모습까지 간직하고 있어 성벽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다.

한양도성이 처음 완공된 것은 약 620년 전인 1396년 음력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 간, 이어서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49일 간, 모두 98일 동안 전국 백성 19만 7천 4백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태조 때 처음 축성할 당시 평지는 토성으로 산지는 석성으로 쌓았으나, 세종 때 개축하면서 흙으로 쌓은 구간도 석성으로 바꾸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성벽 일부가 무너져 숙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개축하였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정비했다. 성을 쌓을 때에는 일부 성돌에 공사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태조·세종 때에는 구간명·담당 군현명 등을 새겼고 숙종 이후에는 감독관·책임기술자·날짜 등을 명기하여 책임 소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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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문 사진 정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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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도성 둘레길을 걷고 있는 글마루 애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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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옛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1899년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전차가 개통됨에 따라 먼저 성문이 제 기능을 잃었고, 1907년 일본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길을 넓히기 위해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되었다. 이어 1908년에는 평지의 성벽 대부분이 헐렸다. 성문도 온전하지 못했다. 소의문은 1914년에 헐렸으며, 돈의문은 1915년에 건축 자재로 매각됐다. 광희문의 문루는 1915년에 붕괴되었고, 혜화문은 1928년에 문루가, 1938년에 성문과 성벽 일부가 헐렸다. 일제는 1925년 남산조선신궁과 흥인지문 옆 경성운동장을 지을 때에도 주변 성벽을 헐어버리고 성돌을 석재로 썼다. 민간에서도 성벽에 인접하여 집을 지으며 성벽을 훼손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도로·주택·공공건물·학교 등을 지으면서 성벽이 훼손되는 일이 되풀이되어 왔다.

도성의 음기를 품은 숙정문
 
와룡공원에서 출발해 밀바위 안내소에 신분증 확인을 하고 한참을 오르면 숙정문이 나온다. 숙정문(肅靖門)은 1396년 9월 축조되고 18년 만에 폐쇄됐다.
 
 
당시 풍수학자 최양선은 “숙정문은 지리학상 경복궁의 양팔과 다리 같으니 길을 내어 지맥을 손상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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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다만 북쪽은 ‘음, 물’로 인식된 탓에 가뭄이 심하게 들면 비를 부르기 위해 숙정문을 열었다. 반대로 ‘양이자 불’인 숭례문은 닫았다. 음양오행설로 보면 북은 물이요,
 
겨울이며, 그 성질이 음이니 형체 없는 기운이 왕래하는 문이다. 숙정문은 한때 물이 맑은 동네 삼청동 위라 숙청문이라 부르기도 했다. 

또 북쪽은 여성을 상징한다고 해서 암문으로도 불렸다. 가물고 비가오지 않을 때 숙정문을 연 것은 도성의 음한 기운을 받아 들여 비를 부르기 위함이었다. 숙정문 바깥은 성북동인데 이곳은 공기 맑고 물이 좋아 여름엔 시원한 바람이, 겨울에는 솔바람이 솔솔 불어 살기 좋은 곳이다. 그래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부유층의 별장이 많다고 한다.
 
긴박했던 순간의 기록, 1·21사태 소나무
 
북악(백악)산 정상을 지나 청운대로 내려가는 길에 1·21 사태 소나무(오른쪽사진)가 있다. 수령이 200년 정도 된 나무인데 이 나무엔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이 총탄 자국은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 31명과 우리 군경이 교전한 흔적이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공작원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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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 사진 정은선
 
 
이들은 국군으로 위장하고 수류탄과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채 휴전선을 넘어 야간 산악행군 끝에 수도권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세검정 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던 순간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아 정체가 드러나자, 이들은 검문경찰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했다. 우리 측 군경은 즉시 비상경계 태세를 갖추고 현장으로 출동해 28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 짓게 됐다.

이 사건으로 많은 시민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 경무관이 무장 간첩의 총탄에 맞아 순직했다.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경사 추모비가 창의문 아래 세워져 있다. 이날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金新朝)는 귀순, 사상전향 후 지금은 개신교 목사로 활동 중이다. 1·21사태를 계기로 우리나라에서는 4월 1일 향토 예비군을 창설하게 됐다.

의로움을 만천하에 드러내다, 창의문
 
1·21사태 소나무를 지나 성곽을 따라 내려오면 서쪽으로는 인왕산과 만나고 동쪽으로는 북악산과 이어지는 창의문이 나온다. 자하동에 있어서 자하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소문 중 유일하게 조선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문루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영조 17년(1741)에 다시 세운 것이다. 영조 때 문루를 새로 지으면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어놓았다. 이 현판은 지금도 그대로 걸려있다. 현재는 자하문으로 더 많이 불리는데, 이 문 부근의 경치가 개경(開京)의 승경지(勝景地)였던 자하동과 비슷하여 붙은 별칭이다.

숙정문이 닫힌 성문이라면 창의문은 서민들의 북행 길목이다. ‘의로움을 드러내는 문’이란 창의문의 이름에서 벌써 인조반정을 예견한 듯하다.
 

청와대를 사수하라, 최규식 경무관 동상

1968년 1월 19일, 파주 법원리 마을 뒷산에 나무를 하러 올라갔던 우성제 씨 4형제는 국군 복장을 한 채 수류탄과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부대와 마주쳤다. 이들은 우씨 형제에게 경찰서의 위치와 동두천, 의정부로 가는 방향 등을 묻고 신고하면 가족들까지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한 뒤 풀어주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갈등하던 우씨 형제는 이날 밤 9시, 파주군 창현리 창현 파출소에 ‘공비 출현’ 신고를 하게 된다.
 
당시 국방장관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서울지역에 비상경계령을 내렸고 서울지역 경찰서에도 비상 경계근무가 시작되었다. 김신조 부대는 경찰의 검문을 받았지만 ‘우리는 CIC 방첩대다. 훈련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니 참견마라’라는 거짓말로 검문을 따돌렸다. 육군기무사령부의 전신인 CIC 방첩대가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파악하고 치밀한 계획에 따라 움직인 김신조 부대가 청와대를 공격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최규식 종로경찰서장만큼은 통과하지 못했다. 최규식 서장은 그들에게 소속과 신분을 밝히라며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김신조 부대는 최규식 서장 뒤에 정차한 시내버스를 국군의 지원 병력으로 오인해 발포하기 시작하면서 교전으로 치닫게 된다. 최규식 서장은 김신조 부대가 발포한 총탄에 맞았고 그와 함께 교전을 벌이던 정종수 경장도 피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영원히 눈을 감았다. 당시 그의 나의 서른여섯이었다. 최규식 서장은 총탄에 맞아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에도 ‘청와대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결국 대대적인 추적 작전을 감행한 국군에 의해 28명은 사살, 생존자인 김신조는 인왕산 기슭에서 체포된다.

독자와 함께 한 답사코스는 한양도성 가운데 일명 ‘백악구간’에 해당된다. 이 구간은 산세가 아름다워 ‘반쯤 핀 모란꽃’에 비유되기도 한다. 1968년 1·21사태 이후 40년 가까이 출입이 제한되다가 2007년부터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600년간 서울의 울타리이자 역사적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한양도
성 둘레길은 자연과 사람 전통과 현대 그리고 역사의 아픔까지도 품고 어우러져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독자 사랑 일일 답사’에 함께 동행해 주신 동북아역사재단
장세윤 박사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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