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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관료의 길,

멀고 멀도다


글. 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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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따뜻해지는 춘삼월이지만 아직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마음은 차갑기만 하다. 전염병으로 인해 경제・문화・사회 등이 다 얼어붙었지만 한 군데만큼은 뜨겁다. 바로 정치권이다. 15일에 치러지는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물론 코로나19 방역보다는 뜨겁지 않지만 정치인들의 발걸음은 바쁘기만 하다.

결과에 따라 국민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정해지기 때문. 이렇듯 오늘날은 민주주의에 의거해 국민들의 투표로 나라의 일꾼을 뽑았다면 과연 과거에는 어떻게 인재들을 등용했을까.

고려, 과거제를 도입하다
과거제도는 한 마디로 말해 관리를 뽑는 시험이다. 오늘날 공무원 시험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과거제는 고려 제4대 왕인 광종 때 쌍기의 건의로 시행된다. 고려의 전 시대인 통일 신라의 원성왕 대에 ‘독서삼품과’를 실시해 인재 등용을 한 기록이 있다. 독서삼품과는 국학 학생들의 유교경전 독해능력을 알아보는 시험으로 관리임용에 참고했다. 하지만 통일 신라 후기가 될수록 진골의 수가 늘어나고 도당유학생의 관직진출이 증가하면서 독서삼품과의 의미는 옅어졌다.

그랬기에 고려의 광종이 시행한 과거제를 본격적인 시험에 의한 관리 선발로 보는 경향이 크다. 고려의 태조가 혼인을 통해 호족을 통합했다면 광종은 조금 더 왕권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충성스러운 신하가 필요하다고생각했다. 그랬기에 쌍기가 건의한 과거제를 도입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개인의 능력보다 가문의 힘이 더 크게 작용했던 고려에서는 과거 외에도 ‘음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수가 더 많았다.

음서는 5품 이상의 고위 관리나 공신의 자손에게 벼슬을 내리는 제도로, 호족 출신의 가문들은 과거보다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다. 그러다보니 국익보다는 가문의 이익을 더 중요시 했고 고려는 점점 귀족 정치가 심해졌다.

고려의 과거제도는 크게 3가지로 나눠졌는데 문관 관료를 뽑는 문과, 기술관을 뽑는 잡과, 대선을 뽑는 승과가 있었다. 이 중 문과는 제술과와 명경과로 나뉘었다.

제술과는 문장의 구사 능력, 정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쓰는 시험이었다. 쉽게 말해 논술과 같은 시험이라 볼 수 있다. 명경과는 유교 경전인 <대학> <논어> <중용> <시경> 등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많은지 평가하는 시험이었다. 합격자는 명경과보다 제술과의 수가 더 많았는데 지식의 양보다 질을 더 중요시 했음을 알 수 있다.

과거는 총 3차에 걸쳐서 이뤄졌으며 1차 시험은 중앙과 지방, 외국인으로 나눠 선발했는데 이를 상공・향공・빈공이라 하였다. 이들을 국자감에서 2차 시험을 보게 했다. 3차 시험은 2차 시험 합격자와 국자감에서 3년 이상 수학한 학생, 벼슬에 올라 300일 이상 경과한 자들이 봤다.

지공거로 문란해진 과거
과거는 예부에서 관장했는데 시험관을 지공거라고 했다. 3차 시험에서 최종 합격한 자에게 합격증과 같은 홍패를 주었는데 지공거와 합격자는 좌주와 문생의 관계를 맺게 된다.

이 관계는 부자와도 같은 관계로 여겼기에 지공거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이로 인한 폐단이 발생했다. 지공거를 과거 응시자인 문생들은 은문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보였으며 이들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발전할 만큼 세력이 커졌다.

결국 파벌을 형성하면서 정치 사회의 문란을 가져오게 됐고 이에 창왕 대에는 지공거를 고시관으로 명칭을 바꾸고 인원수도 늘리면서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 공민왕 대에는 시험 하루 전에 지공거를 임명하기도 했다.

조선, 음서의 문을 좁히다
과거제도는 조선으로 넘어와서도 이어졌다. 고려와 조선의 과거제에서 가장 큰 차이점은 음서의 문이 좁아졌다는 것이다. 고려의 음서는 부조(父祖)의 관직이 5품 이상일 경우 아들과 손자까지 혜택이 주어졌으며 3품 이상인 경우에는 수양자, 사위, 조카, 동생에 이르기까지 혜택이 돌아갔다.

하지만 조선은 음서의 혜택 범위를 2품 이상의 고위 관료에게만 적용했고, 외가의 친척에게는 허용하지 않았다. 거기다 고려는 음서로 들어갔어도 최고위관직까지 진출이 가능했지만 조선은 당상관 이상의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오르기 위해서는 다시 과거 시험을 보도록 했다. 가문・혈통보다 개인의 능력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02.jpg과거시험 재현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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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모당 홍이상 평생도> 평생도란 사대부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일생을 그린 작품으로 돌잔치, 혼인, 과거, 벼슬살이, 회갑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선의 과거시험은 문과・무과・잡과로 이뤄졌다. 조선은 억불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고려의 승과를 없앴고 무인을 기를 수 있는 무과를 시행했다. 시험은 3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정기시와 수시로 열리는 부정기시로 시행됐다. 정기시에 치러지는 식년시는 문과・무과・잡과가 전부 진행됐고 부정기시에는 증 광시・별시・알성시 등이 있었는데 이때는 문과와 무과만이 진행됐다.

식년시는 12지 가운데 자(子)・묘(卯)・오(午)・유(酉)가 드는 해에 정월에서 5월 사이에 치러졌으나 농번기와 겹치는 이유로 초시는 식년 전해인 8월 15일 이후에 실시됐고 문과와 무과의 초시는 9월 초순에 각각 실시됐다. 문과는 소과와 대과로 나눠 쳤는데 소과에 합격한 생원・진사 및 성균관 유생, 현직 관리가 대과 초시에 시험 칠 수 있었으며 양인 신분 이상이면 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단 서얼은 문과 응시에 제한을 받았다. 식년시의 경우 합격 인원이 정해져 있었는데 문과 33명, 무과 28명, 생원 100명, 진사 100명, 잡과 46명이었다. 다만 부정기시는 정원이 따로 없었다. 문과와 무과의 최종 합격자는 임금과 종친, 문무백관이 있는 앞에서 홍패를 받았다. 잡과나 생원지사시 합격자는 백패를 받았으나 궐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입신양명의 꿈
과거제도는 입신양명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중죄인의 자손이나 재가녀의 자손, 서얼등은 과거를 응시할 수 없었지만 그 외 양인 이상의 이분이면 시험을 응시할 수 있었다. 물론 평민으로 생업인 농사일을 두고 글공부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기에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조선 초기에는 평민 중에서도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과거, 출세의 사다리>에 보면 조선시대 500년간 배출된 문과 급제자 중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은 꽤 높았다. 조선 전기 태조~선조 대에 합격한 문과 급제자 4527명 중 신분이 낮은 급제자는 1100명으로 24.3%를 차지했다. 특히 태종대에는 무려 문과 급제자의 50%가 신분이 낮은 급제자였다. 게다가 조선 초기에는 신분이 낮은 급제자 1100명 중 3품 이상 높은 관직에 오른 자가 306명에 이를 정도로 신분이동이 뚫려있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문벌이 득세하면서 비율이 줄어들지만 신분제가 약화되는 조선 후기에는 다시 비율이 높아졌다. 선조대에는 16.7%, 광해군 대에는 14.6%로 가장 비율이 낮았지만 인조(20.9%), 영조(37.2%)로 가면서 점점 높아졌고 순조 이후에는 신분 낮은 급제자의 비율이 50%를 넘기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고종 대에는 58%까지 차지하면서 과거를 통한 신분 상승의 욕구가 드러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거기다 조선의 과거제는 나이 제한이 없었다. 과거시험 합격 연령이 평균 36세였던 조선 과거 급제자 중 20세 미만의 급제자는 30명으로 그중 가장 어린 나이에 급제한 사람은 ‘이건창’이다. 고종 대에 활동한 그는 만 14세의 나이에 급제했으나 나이가 어린 이유로 4년 뒤인 만 18세에 홍문관직의 벼슬을 받았으며 암행어사로 활동을 많이 했고 <당의통략>을 저술했다.

장원 급제자 중 가장 어린 나이에 급제한 사람은 만 17세의 나이로 합격한 ‘박호’이다. 그는 선조가 직접 시험을 본 문과에서 장원 급제를 하여 정6품 홍문관수찬으로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임진왜란 때 경상도 순변사 이일 장군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26살의 나이에 상주 전투에서 전사한다. 그는 마지막 전투에서 “나는 18세에 장원 급제하여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는데 지금 전세가 이처럼 불리하니 내가 살아서 무슨 면목으로 왕을 뵐 수 있겠는가”라며 끝까지 싸웠다고 전해진다.

과거 급제자 중 최고령 급제자는 고종 대의 ‘정순교’이다. 식년시가 아니라 왕이나 왕비, 대비 등 환갑이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60세 이상 선비를 대상으로 실시한 ‘기로과’에 급제한 인물로 당시 나이 86세였다.

이렇게 입신양명의 길이었던 과거 급제는 사실 하늘의 별 따기였다. 정규 시험인 식년시는 3년에 한 번 치러졌고 한 번 볼 때 많게는 1만 명도 봤기 때문에 그중 최종 33명에 드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재수, 삼수는 물론이고 몇 십 년을 과거에 매진한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부정으로 시험을 치는 자도 늘어났다. 방법도 다양했다. 대리시험을 치는 차출차착, 책을 시험장에 갖고 들어가는 수종협책,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쟁점, 시험관과 응시자가 미리 짜고 하는 혁제공행 등 조선 후기 다양한 부정행위들이 난무했다.

이에 부정행위를 막는 방법도 날로 발전했다. 시험장을 두 군데로 나눠 형제나 친척은 다른 곳에서 치도록 하고, 시험장 입구에 수협관(문지기)을 세워 붓・먹・벼루 외에 다른 것을 들고 들어갈 수 없도록 했다. 또 옆 사람의 시험지를 볼 수 없도록 응시자들의 간격을 여섯 자(약 180㎝)를 띄워서 앉도록 했고 감독관이 중간 중간에 다니면서 부정행위를 엄격하게 지켜봤다.

만약 부정행위를 들키면 두 차례의 응시 자격을 박탈했으므로 약 6년간 시험을 칠 수 없었다. 또 부정행위에 따라 곤장 100대를 치거나 군에 보내지기도 했고 정도가 심한 경우에는 유배까지도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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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급제자의 모습
(장원 급제자는 어사화를 쓰고 합격증인 홍패를 임금에게 직접 받았다.)
 


과거제도는 갑오개혁까지 실시됐다. 고려의 과거제도는 지공거의 문란함과 음서제로 인해 후퇴되는 모습을 보였고, 조선은 후기로 갈수록 부정기시가 잦았으며 매관매직이나 부정행위 등으로 인해 퇴보되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제도 자체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과거제도는 조선이 500년 동안 왕조를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근간이기도 했다.

흔히들 조선에 대해 생각할 때 붕당 정치로 인한 문란함과 양반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양반’이라는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4대조 이내에 6품 이상의 관직을 지내거나 문·무과 합격자의 자손 또는 생원진사시에 합격해야 했다. 즉 가문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 능력을 갈고 닦지 않으면 신분을 보장받지 못했다. 이렇듯 조선은 붕당 정치로 인해 가문이나 당파가 중요한 시대였던 것처럼 보이지만 개인의 능력 또한 중요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 우리나라는 물론 많은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 정부 형태다. 그렇기에 선거철이 되면 온 나라의 눈과 귀가 선거로 쏠린다. 어떤 후보가 어떤 공약을 걸고 나오는지, 어떤 사람을 뽑아야 좀 더 나은 미래를 구상할 수 있을지 저마다의 생각을 하나의 표로 표현한다.

하지만 후보 검증에 있어서 아직 구멍이 여럿 보인다. 막말을 일삼았던 사람이 후보에 오르기도 하고, 크던 작던 범죄를 저질렀던 전과자도 등장하고, 자신의 말이나 자기가 속한 당의 이익만 내세우는 편협한 사고를 가진 사람도 부지기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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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 중에서 인재를 뽑는 것은 어렵지만 공정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나라의 일을 하느냐에 따라 그나라의 미래가 결정된다. 그렇기에 일꾼을 뽑는 공정성은 절대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며 그 사람 개인의 능력 또한 중요하게 봐야한다. 민주주의의 필수 요건을 보면 첫째, 국민은 1인 1표의 보통선거권을 통하여 절대권한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며 둘째, 적어도 2개 이상의 정당들이 선거에서 정치강령과 후보들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국가는 모든 구성원의 민권을 보장하여야 하며 이 민권에는 출판·결사·언론의 자유가 포함되고 적법절차 없이 국민을 체포·구금할 수 없다. 넷째, 정부의 시책은 국민의 복리증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다섯째, 국가는 효율적인 지도력과 책임 있는 비판을 보장하여야 하며 정부의 관리들은 계속적으로 의회와 언론에서 반대 의견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시민은 독립된 사법제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여섯째, 정권교체는 평화적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두산백과 참고).

이 필수요건들을 봤을 때 우리나라는 과연 민주주의를 지향해오고 있는 것이 맞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과연 우리나라는 공정한 체제 아래에서 올바른 일꾼을 통해 민주주의를 잘 지탱해가고 있는 것일까. 이번에 치러질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가 자못 궁금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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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선거로 인재를 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