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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의 멋,

천년의 세월 뽐내다


글, 사진. 장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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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百)’


한지는 천년, 비단은 오백 년 동안 남아 있음을 실감케 하는 옛말이다. 예로부터 한지는 질기고 강한 특성이 있었다. 이는 순결하고 강인한 우리 민족의 정신을 담아놓았고 그래서 한지를 ‘백지’라고도 불렸다. 그야말로 ‘백의민족’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선조들의 땀과 얼이 들어간 한지와 역사적으로 연관이 깊은 도시가 있다. 바로 강원도 원주다. 이곳에 둥지를 튼 ‘한지테마파크’는 한지의 역사를 다양한 자료들과 함께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종이를 사용하기 시작한 걸까. 역사적으로 그 이유가 명확히 기록된 것은 없다. 하지만 고대에 이미 종이가 있었고, 중국에서 전해진 종이 만드는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그 명성을 오히려 중국에 전했다.

그 증거로 610년경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승려 법정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채색, 종이, 먹, 맷돌 등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고 하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 남아있다.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다른 유물과 함께 나온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751년)>이 천년을 넘어 현존하고 있다.

목판 인쇄물로 수요가 성장하고 이로 인해 종이 공급이 뒷받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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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지’라 불리게 됐나
한지의 원료는 닥나무다. 전통 방식 그대로 손으로 떠서 만드는 한지는 종이의 본고장인 중국에서도 그 우수한 품직을 인정받았다. 신라의 백추지(白硾紙), 고려의 만지(蠻紙), 조선의 태장지(苔壯紙)와 같이 시대마다 고유한 양질의 종이가 개발됐다.

무엇보다 한지는 천년이 넘도록 보존이 가능했다. 종이는 자연스럽고 유연하며 매끄러워서 글씨와 그림의 용도로 사용됐다. 그뿐만 아니라 양반 생활 공예와 민속품 등 모든 생활에 사용할 수 있었다. 자투리 하나도 귀히 쓰였다.

왜 한지라 불리게 된 것일까. 크게 네 가지의 어원을 갖고 있다. 첫째는 양지의 반대 개념으로 서양의 것과 구별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됐다. 둘째는 대한민국의 ‘한(韓)’자를 따서 지어졌다. 셋째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전통 종이는 겨울에 원료를 거둬들여, 겨울철 찬물에 담가 좋은 질의 원료를 만들었다고해 찰 한(寒)자를 써서 한지라고 불렀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화지(華紙)와 일본의 화지(和紙)에 대응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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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한지로 제작된 필통

 



급변하는 시대, 한지도 변해
한지의 태동기는 삼국시대였다. 그 이전에는 이미 중국에서 종이 만드는 기술이 전래됐고 상당 기간 중국 종이를 모방해 제작하다가 이 시기 이후 독창적인 한지를 생산했다.

통일신라시대 종이 생산의 중심지는 경주지방이다. 여기서 만들어진 종이의 대부분은 관청에서 필요한 종이를 충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종이는 백추지로 국내외에 뛰어난 종이로 알려졌다.

고려의 종이는 누에고치의 솜으로 만들어
색의 희기가 능(綾)과 같고 단단하고
질기기가 비단과 같으며
여기에 글씨를 쓰며 먹빛이 아름답다
이것은 중국에는 없으니 또한 진기한 물건이다
-중국 송나라 조희곡 <동천청록(洞天靑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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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로 만든 작품들

 



고려시대는 우리 종이의 새로운 도약기였다. 고려인은 중국에서 도입된 새로운 기술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 결과 중국인이 제일 좋은 종이라 부르는 ‘고려지(만지)’를 만들었다. 고려의 종이는 송나라에서 누에고치로 만든 것이라고 잘못 전해질만큼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특히 고려지에 쓰인 글씨는 먹이 진하게 배어 아주 좋았고 색도 명주처럼 하옛다고 한다. 고려는 958년 과거제도를 실시해 학문에 능통한 인재들을 뽑았다. 유교 경전과 문장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책에 대한 수요가 커졌다. 또한 고려는 불교 국가여서 불경에 대한 수요도 늘어났다. 종이 공급도 늘어났는데 종이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종이 가격도 내려갔다.

조선 전기는 종이 제작 기술의 완성기였다. 15세기는 성리학이 대중에게 알려졌고, 국가적으로 간행물이 많아졌다. 정부 주도로 백성에게 닥나무 재배가 권장됐고, 일본에서 들여온 닥나무로 품종 개량을 위한 재배 시험이 이뤄지기도 했다. 또 이 시기에는 종이 생산을 관리하는 기관이 설치됐고, 종이도 대중화됐다. 덕분에 생산된 종이가 200여종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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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한지로 제작된 지승팔각반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조선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집에라도 책이 있다.”

1866년 조선을 침략한 프랑스의 군인 앙리쥐베르(Henri Zuber)의 말이다. 그는 조선의 우수한 종이 발달에 대해 이같이 토로했다. 외규장각 의궤의 우수한 종이 질에 프랑스인들은 감탄했다.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갖는 종이를 우리는 갖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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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한지로 제작된 지승바구니

 



반면 조선 후기부터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1592~1598)과 연이은 환란이 큰 영향을 줬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종이가 대량으로 수입됐다. 해방, 그리고 6·25 전쟁 후에는 한지 생산 기반이 약화되는 반면 양지는 점차 대중지의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글로벌 시대로 인해 서양 문화는 물밀듯 빠르게 들어왔다. 특히 인쇄기술 발달로 한지는 급속한 쇠락의 길을 걸었다.

백지라고도 불린 한지
한 장의 한지가 탄생되기 위해선 수많은 공정이 필요했다. 11월경 1년 된 닥나무를 베어내어 찌고 삶고 말려야 했다. 두들기고, 고르게 섞는 작업도 필요했다. 도침을 아흔아홉번 손질을 거친 후 마지막 사람이 백 번째로 선별과정을 거쳐 한 장의 한지를 만든다. 그래서 옛날에는 한지를 ‘백지’라고도 했다.

우리 선조들은 생활 속 공예품 제작에 한지를 사용했다. 작은 조각 하나도 버려지지 않은게 한지였다. 예컨대 선비들이 오랫동안 보던 낡은 책을 재활용해서 ‘지승공예’를, 색지를 사용하고 남은 조각을 모아서 ‘색지공예’를 만들었다. 특히 한지의 색이 발할수록 더욱 색이 은은해져서 매력이 더욱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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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한지 제작 과정을 재현한 한지 인형
 


한지의 본고장은 원주

예로부터 원주는 한지의 본고장으로 불리었다.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닥나무가 원주 특산물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명숙 원주시 문화관광해설사는 “1872년에 만들어진 ‘원주목지도’에 보면 저전동면(현호저면)의 ‘저’자는 ‘닥나무 저(楮)’자다. 닥나무는 논둑에서 자라는데, 일조량과 적당한 습도가 딱 최적의 조건”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 문화관광해설사는 “과거에는 원주 치악산에 암자를 포함해서 절이 40여개가 있었고 스님들이 많았다”라며 “스님들은 앉아서 공부하고 글을 많이 썼는데 호저에서 생산된 한지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조선시대에는 원주 강원감영(監營, 각 도의 관찰사가 거처하는 관청 중 하나)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300여명이 있었는데 고장에서 생산된 종이로 책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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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한지 테마파크

 


종이를 만들다 남은 한지의 자투리는 여인들이 꼬아서 지승공예를 만들어 자연적으로 소비자와 소비처가 맞아떨어졌다.

이 문화관광해설사는 “우리 선조들은 한지의 작은 것 하나까지 소중하게 다루었다”라며“세계 속에서 우수성을 인정받은 우리 한지를 많은 이들이 알아주길 바라고 지켜나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