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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불선이 만나는 곳,

전남 강진을 찾다


글. 이예진 사진. 강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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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차로 달려 7시간. 추운 겨울바람이 부는 12월에 글마루 탐방팀은 강진으로 향했다. 다산 정약용이 18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한 그곳. 우리는 강진에서 그의 발자취를 찾았다.

조선 최고의 실학자 정약용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자로 정조와 함께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정조의 신임 아래 두루 요직을 지낸 그는 실학자로서 배다리, 거중기 등 기술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그는 도르래 원리를 이용해 만든 거중기로 정조가 계획했던 수원화성을 단시간에 만들었다. 10년 계획이었던 수원화성 건축을 2년 6개월 만에 완공시키면서 조선의 과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어떤 사람은 선유(先儒)의 학설에만 의거하여 당동벌이(黨同伐異)나 하느라 새로운 학설은 감히 의논조차 못하게 하는 자가 있다. 이들은 모두 학문을 빙자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무리이지 진심으로 착함을 찾으려는 사람이 아니다.
- 정약용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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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조가 승하하자 젊은 시절 받아들였던 서학(西學, 천주교)으로 인해 1801년 신유교난(辛酉敎難)에 휘말려 정계를 떠나게 된다. 처음에는 경상도 포항으로 유배됐으나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인해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됐다. 그는 이곳에서 18년이라는 기나긴 유배기간을 보내게 된다.

강진에서 보낸 18년은 정약용이 다양한 학문을 탐미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후에 설명할 다산초당에서 만난 혜장선사, 초의선사와의 만남으로 그는 실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유학을 더욱 심도 있게 연구했으며 실학을 집대성한 기간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정약용에게 ‘18’이라는 숫자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22살에 정계에 진출한 후 유배 생활 전까지 관직생활을 18년 했으며 강진의 유배생활을 18년 했다. 그리고 유배가 풀린 후 생을 마감하기까지 향리에 은거한 기간도 18년이다. 또 강진에서 양성한 제자의 수도 18명이어서 그에게 18이라는 숫자는 의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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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뿌리의 길)
 

실학을 집대성한 곳, 다산초당
다산초당은 강진군 남쪽에 있는 만덕산에 있다. 만덕산은 차나무가 많아서 다산(茶山)이라 불렸는데 이는 정약용의 가장 유명한 호가 되었다. 사암·탁옹·태수 등 여러 호가 있지만 가장 일반적이고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는 이 호를 통해 그의 삶에서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18년의 강진 유배 생활 중 10년 동안 기거하며 실학을 집대성한 그. 과연 그는 이곳에서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의 발자취를 따라 다산초당을 찾았다.

다산초당 입구에는 찻집이 하나있다. 이곳은 전 강진군수이자 다산의 18제자였던 윤종진 선생의 후손인 윤동환 다산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운영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 다산초당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다산학’에 대해 알려주며 좀 더 정약용을 느낄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다.

윤동환 이사장은 “다산은 많은 시를 남겼는데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려는 마음이 없는자는 시를 지을 자격도 없다’고 말할 정도로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컸다”면서 “관리뿐 아니라 백성 또한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찻집을 지나 초당까지 가는 길에는 많은 나무들의 뿌리로 얼기설기 엉켜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를 보고 정호승 시인은 ‘뿌리의 길’이라고 부르며 시를 짓기도 했다. 12월 쌀쌀한 초겨울 날씨. 뿌리와 낙엽들로 이뤄진 길을 걷고 있노라면 마치 유배 온 다산의 쓸쓸한 마음에 점점 다가가는 듯 했다.

초당에 올라가다보면 다산의 제자였던 윤종진 선생의 무덤이 있다. 윤종진 선생의 본관인 해남 윤씨 집안은 조선시가에서 정철과 쌍벽을 이뤘던 고산 윤선도의 집안이자 다산의 외가이기도 하다. 이들은 정약용에게 초당을 선뜻 마련해주면서 깊은 교류를 가졌다.

이곳을 지나 비탈길을 한걸음씩 올라가다보면 다산이 은거했던 초당을 만날 수 있다. 초당이라 하여서 풀을 엮은 초가집을 생각했지만 기와집이 널찍하게 서 있다. 이는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복원했고, 옆에 있는 동암과 서암도 1974년에 복원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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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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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환 다산기념사업회 이사장
 


초당 왼쪽으로는 정약용이 직접 새긴 ‘정석(丁石)’ 바위를 볼 수 있다. 커다란 바위에 ‘丁石’을 새기며 보이지 않는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정조의 신임을 얻어 관직생활을 했던 18년을 뒤로한 채 그의 임금이 승하하자 닥쳐온 피바람 속에서도 나라에 대한 근심과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새긴 그의 마음을 살필 수 있었다.

초당 앞에는 크고 넓은 돌판이 있는데 ‘다조(茶竈)’라고 불린다. 이곳에서 다산은 솔방울을 태운 불로 찻물을 우려 마셨다고 한다. 이와 함께 옆에는 자그마한 연못과 함께 자그마한 정원이 있었는데 아마 다산은 기나긴 유배생활 동안 답답했던 마음을 이곳에서 정리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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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
 


그러면서 그는 2000여권의 책을 동암에 가득채울 정도로 학문을 깊게 탐구하였고 후학을 양성했다. 정약용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동암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 손님을 맞이하면서도 집필에 몰두했고 <목민심서(牧民心書)> 또한 이곳에서 완성했다. 하지만 형제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동암을 지나면 넓은 강진만을 탁 트이게 볼 수 있는 천일각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그는 함께할 수 없지만 함께이고 싶은 그의 형제들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천일각(天一閣)’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니 정자 이름에서 볼 수 있듯 하나의 하늘 아래 함께 있기를 바라며 흑산도로 귀양 가 있는 둘째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는 정약용의 뒷모습이 그려졌다.

道人은 학문을 가리지 않더라
처음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를 오자 많은 사람들은 역병에 걸린 환자를 보듯 그를 피해 다녔다. 하지만 강진읍 동문 앞에 있던 주막집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첫 거처로 삼는다. 그것이 바로 ‘사의재(四宜齋)’.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인 이곳에서 다산은 4년을 지냈다. 그는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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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각에서 바라본 강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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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사의재 주막, 우)백련사 가는 길(다산과 혜장이 걸은 길)
 


사의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주역(周易)을 파고들던 어느날 누군가 찾아와 만덕산에 있는 백련사의 주지가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듣는다. 당시 백련사에는 혜장선사가 주지를 맡고 있었는데 그는 학승(學僧)으로 유학에도 식견이 높았다.

다산은 신분을 감춘 채 백련사로 찾아가 혜장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나중에서야 혜장은 자신이 이야기 나눈 이가 다산임을 알고 쫓아가 더 이야기 할 것을 요청했고 그들은 밤이 깊도록 서로의 학문을 나눴다. 아마 다산이 깨달았던 서학과 혜장의 불교 경전 그리고 공통적으로 심취해있던 주역까지 하룻밤에 서로의 학식을 다 나누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이후 다산과 혜장은 각자의 종교와 학문을 뛰어넘어 벗이 되었고 언제든지 왕래하며 교류를 했다. 특히 다산은 초당에 은거하면서 항상 문을 열어놓고 혜장이 지나가길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지 않았을까. 혜장이 오는 발걸음 소리에 문을 열고 나가 동백나무와 대나무가 있는 길을 함께 발을 맞춰 걸으면서 학식을 논했던 그들의 모습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다산은 혜장선사에게 ‘아암(兒庵)’이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했다. 의외로 급한 성품을 지녔던 혜장에게 ‘부드럽기를 어린아이 같이하라’는 노자의 가르침을 인용해 붙여준 것이었다. 또 혜장은 다산에게 초의선사를 소개해줬다. 차에 많은 관심이 있었던 정약용을 위한 것이었다.

모든 도(道)는 하나로 통한다고 했던가. 우리는 깨달음을 ‘道’라고 하며 걷는 길 또한 ‘道’라고 한다. 결국 혜장과 도산이 함께 길(道)을 걸으며 나눴던 깨달음(道)은 그저 글에 적혀 있는 학식이 아니라 모든 우주 만물을 통달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백련사로 향하는 길을 걸으면서 그때 그들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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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작산 갈대숲
 

봉황의 날개를 오르다
강진만을 한눈에 보기 좋은 곳이 있다. 바로 주작산(朱雀山)이다. 산세가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듯 하다고 해서 붙여진 주작산은 475 높이의 낮은 산이지만 긴 바위능선이 수려하게 펼쳐져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설악산과 지리산을 합친 산세’라고도 말했다.

탐방팀은 도암면 석문리 도암 중앙초등학교에서 봉황천을 따라 떨어져있는 소석문에서 등산을 시작했다. 12월 겨울 산행이었지만 다행히 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낙엽으로 인해 미끄러운 구간도 많았고 험준한 바위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구간이 많아 등산 내내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시작부터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얼마 오르지 않아 탁 트이는 곳이 나타나 바라보면 맞은편에 있는 석문산이 웅장하게 바라보고 있다. 등산로에서 바라본 석문산의 모습 또한 절경이어서 한동안 눈을 떼기 힘들었다. 힘껏 다리를 옮겨 등산로를 올라가니 낮은 산이라고 쉽게 보지 말라는 듯 암벽과 밧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밧줄이 있는 아찔한 암벽을 바라보니 이번 산행 또한 만만치 않겠구나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전날까지만 해도 비바람이 불었던 날씨(日氣)가 아주 고요해졌다는 점이었다. 끙끙거리며 암벽을 넘고 넘었다. 사실 산을 다 오른 뒤에 생각해보니 동봉을 오르기 전까지는 그저 평탄한 길이었음을 나중에 느꼈다. 동봉까지 가는 길은 밧줄 구간도 적었으며 강진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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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작산 서봉

 


보통 산행을 하면 산을 오르는 반대편이 한,두 장면으로 정해져있기 마련인데 주작산은 달랐다. 산의 뒤쪽으로 오른다 싶으면 고요한 마을과 함께 저수지를 볼 수 있었고, 산의 앞쪽으로 오른다 싶으면 강진만의 탁 트인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석문산, 반대편 기기괴괴한 암릉을 바라보며 올라가는 그 길에서 주작산의 다양한 얼굴들을 느낄 수 있었다.

힘껏 밧줄을 타고 동봉을 오르니 이제 반기는 것은 공룡능선. 정말 설악산의 공룡능선을 능가할 만큼의 암릉 구간들이 펼쳐져 있었다. 12월의 눈 대신 바위들이 마치 꽃(石花)처럼 화려하게 수놓아져 아름다움을 뽐냈다. 봉우리 하나하나가 꽃망울같이 피어 능선 하나가 마치 꽃다발마냥 어우러져 있었다. 마치 석화산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동봉에서 서봉으로 가는 길은 바로 눈앞에 있듯 가까워 보였으나 산세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역시 사신(四神) 중 하나인 주작의 날개를 오르는 일은 험하고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다.

소석문에서 동봉과 서봉을 지나 바위능선을 따라 작천소령을 지나면 머나먼 길의 끝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사실 주작산은 덕룡산과 함께 붙어있어 정상을 함께 하는데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장관이다. 산의 이름과 같이 주작의 날개처럼 보이는 바위 능선이 양쪽으로 펼쳐져 있으며 이 모습은 마치 주작이 금방이라도 날개를 쳐 하늘로 올라갈 것만 같다.

거기다 탁 트인 강진만을 보고 있노라면 높고도 무수히 많던 암릉들이 생각났다. 귀한 진주를 얻기 위해 조개가 까끌까끌한 모래를 참고 견디는 것처럼 피안의 세계로 향하는 인생들의 걸음 또한 그렇지 않을까. 높고 영화롭지만 좁고 협착한 피안의 세계.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지 않으면 그 문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주작산은 우리에게 그 이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전라남도에 위치한 강진은 남쪽으로는 바다인 강진만이 있고 동·서·북으로는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지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맥들이 험하다 보니 예로부터 다른 지역과 교류하기가 힘든데다 서울과 멀리 떨어져있는 탓에 유배지로도 많이 이용됐다.

하지만 천혜의 자연은 으뜸이어서 유배를 온 선비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정약용이 학문을 탐미하며 실학을 집대성하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벗으로 혜장선사까지 만났으니 유배가 풀린 후에도 강진을 그리워한 것은 힘든 기억만 있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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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화산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