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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초당동,

허균·허난설헌

문학 품다


글, 사진. 장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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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들과 호수와 강과 바다를 한꺼번에 품고 있는 강릉. 그 푸릇함은 어느 도시에 뒤처지지 않을 만큼 매력 있었다. 특히 이곳의 초당 솔밭 안에는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이 있으니, 강릉이 과연 역사의 도시라는 것을 실감케 해줬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최초의 여류문인으로 인정받았던 허난설헌 두 남매를 기념하는 공간이다.

부친인 초당 허엽은 조선 선조 때 사림파인 동인(東人)의 우두머리가 된 인물이다. 슬하에 첫째 부인 청주 한씨 몸에서 두 딸과 허성을 두었고, 첫째 부인과 사별 후 정실로 들어온 강릉 김씨의 몸에서 세 자녀를 두었으니, 허봉과 허난설헌, 허균이었다. 이들은 모두 학문과 시문에 뛰어나 ‘허씨 5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허균과 허난설헌은 조선시대에 손꼽히는 도가풍의 학자 화담 서경덕과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던 아버지 허엽의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으며 성장했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장차 훌륭한 대문장가로서의 소질을 발휘했다. 허균은 둘째 형 허봉에게 고문(古文)을 익혔으며, 뒤에 영남학파의 거두 유성룡에게 글을 배웠다. 허난설헌은 오빠 허봉의 도움으로 학문을 배웠다. 특히 이들 남매의 일생에서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이 있었다. 서얼 출신으로 삼당파(三唐派) 시인의 한 사람인 ‘이달’이었다. 그는 신분제도의 모순과 유교사회의 행동규범을 비판하던 인물이었는데, 남매는 이달의 사상을 고스란히 체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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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허난설헌 영정
 


자유인 허균의 삶
허균은 황해도 도사(都事)라는 높은 벼슬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파란만장한 벼슬살이의 시작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오십 평생 여섯 번이나 벼슬에서 쫓겨났고 세 번의 유배 생활을 하며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허균은 성리학 이외의 다른 학문이나 사상이 설 자리가 없었던 조선시대에 사회의 규율을 무시했다. 그러면서 사명당대사나 서산대사 등의 승려들과 가까이 지냈다. 중국에 세 차례 다녀왔고 천주교 서적을 들여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며,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허균이 고서를 전송하는 것을 들었는데 유불도 3가의 책을 닥치는 대로 시원하게 외워내니 아무도 그를 당할 수 없었다.
-유몽인 <어우야담>

불여세합(不與世合)의 풍운아 허균은 주변을 의식하지 않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특히 학문과 사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성리학뿐 아니라 불교, 도교, 서학에 두루 관심이 깊었다.

허균은 형조참의와 좌참찬 등 높은 벼슬을 역임했으나 기준격의 상소와 이이첨의 흉계에 의해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기존의 사회윤리에 구속받지 않은 자유로운 삶과 새로운 개혁사상의 실천을 추구했던 그였기에 조선 사대부들에게 이단아로 취급당했다.

‘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살아생전 허균은 저서들을 통해 그의 사상을 펼쳤다. 임진왜란을 피해서 강릉에 머물던 허균은 첫 저서인 <학산초담>을 저술했다. 1604년 수안군수가 되어 바쁜 가운데 작은 형 허봉의 글을 <하곡집>으로 엮어 출간했다. 특히 그의 대표작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이다.
내용은 이렇다. 양반과 노비 출신에서 태어난 길동은 비범함이 남달라 영웅호걸이 될 만한 아이였으나 천한 종의 몸으로 태어나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다. 그야말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었다.

자신의 신세를 인식한 길동은 산속으로 들어가 세상 명예나 수치를 잊고 살기로 결심한다. 그의 나이 열한 살. 길동은 유교 경전과 천문, 지리, 주역을 통달하고 바람과 구름을 부릴 수있게 된다. 그때 길동의 모자를 질투하던 홍판서의 첫 번째 첩이 보낸 자객을 잡고 그 길로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집을 떠난다. 길동은 도적 떼의 우두머리가 되고 ‘활빈당’을 만든다. 그리고 못된 벼슬아치들이 힘없는 백성에게 빼앗은 재물을 훔쳐 굶주린 백성에게 돌려준다. 흉년에는 관아의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을 살렸다. 홍길동이 팔도를 누비고 다니며 소동을 피워도 잡을 재간이 없었다.

이처럼 소설 <홍길동전>은 당시 봉건체제의 모순과 부당성을 폭로한 그의 개혁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독창적인 우리 문학을 주장했으며 억압받던 하층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글을 남겼다.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류시인의 한 사람인 허난설헌. 어릴 때부터 재주가 비상하고 출중했으며 아명을 ‘초희’라고 했다. 허난설헌은 화담 서경덕의 문인인 허엽의 딸이자, 미암 유희춘의 문인인 허성과 허봉의 동생이며, 유성룡과 이달에게 문장과 시를 배운 허균의 누이였다. 이런 가정환경과 문학교육은 허난설헌 시문학의 뿌리가 됐다.

허난설헌이 어린 나이에 지은 <광한전백옥류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은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중국 <양조평양록>, 김만중의 <서포만필>에서도 허난설헌의 재능을 격찬한 바 있다. 오빠 허봉도 “난설헌의 시는 배워서는 그렇게 될 수 없다”라고 할 만큼 허난설헌의 재주가 천부적이라고 표현했다.

허난설헌의 남편은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나갔으나 풍류를 즐겼으며 고부간의 갈등도 심했다.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 배 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삶의 의욕을 잃은 허난설헌은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했다.

허난설헌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시작(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고,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의 세계를 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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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초당동 고택
 


허난설헌 생가터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안에는 허난설헌 동상이 있다. 한복을 입고 책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 금방이라도 입에서 책의 내용을 술술 외울듯했다. 살아있는 듯, 그러면서도 그에게 느껴지는 강한 아우라는 과연 허난설헌이 어떤 인물이었을 지를 짐작케 했다.

경포호 정자-교산 허균

연기 안개 푸른데 호수 빛 넘실거려
가을 꽃 밟고서 죽방으로 들어가네
머리 희고 팔 년 만에 다시 와보니
그림배에 홍장 싣고 갈 뜻이 없구나
- 엄창섭 역

공원 안에는 ‘허씨 5문장 시비’도 있다. 시비에 담긴 아련한 문장들. 잠시나마 지은이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글귀였다. 길을 따라 걸으면 한옥으로 지어진 건물이 보인다. 이곳은 허난설헌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는 ‘강릉 초당동 고택(강원도 문화재자료 제59호)’이다.

현재 가옥의 모습은 1912년 초계 정씨 후손인 정호경이 가옥을 늘리고 고쳐 지으면서 갖추었다.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가 ‘ㅁ’ 자로 배치돼 있으며, 바깥과 구분하는 담이 있다.

푸른 하늘을 이고 있는 고택. 그 고즈넉함과 꼿꼿한 풍채는 허균과 허난설헌의 강인한 정신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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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초당동 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