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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그 멋에 빠지다


글. 이예진, 사진. 강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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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면이 바다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바다와 닿지 않는 충청북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단양. 소백산맥에서 뻗어 나온 도솔봉·국망봉·도락산 등 높은 봉우리들과 강원도에서부터 흘러온 남한강이 단양군을 관통하면서 단양은 예로부터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뜨거웠던 여름의 뙤약볕 아래 자란 곡식들이 결실을 맺는 추수의 계절 가을. 단풍이 찾아드는 10월 초, 탐방팀은 그 멋진 단양 속으로 들어갔다.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온달산성
북쪽으로는 강원도 영월, 서쪽으로는 충청북도 제천, 동쪽과 남쪽으로는 경상북도 영주와 문경 등 세 개의 도(道)를 끼고 있는 충청북도 단양군은 수려한 자연 경관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강원도 영월에서부터 단양을 감싸고 흘러나가는 남한강의 모습은 자연스레 카메라로 손을 옮기게 만든다.

이러한 남한강을 두고 옛날에는 치열한 전투를 했다. 그 증거로 단양군 영춘면에 있는 온달산성을 들 수 있다. 평강공주와 바보온달로도 유명한 온달장군은 고구려 평원왕 때의 장수로, 단양군에서는 온달산성 근처에 온달 동굴과 함께 온달관광지를 조성해놓고 축제를 하기도 한다.

드라마 태왕사신기와 연개소문 촬영지로 유명한 단양 오픈 세트장을 보면서 약 한 시간을 걸어 산에 올라가면 온달산성을 만날 수 있다. 사실 이 산성은 언제 나타났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온달이 배수진을 치고 신라군과 싸우기 위해 쌓았다고 전해오면서 ‘온달산성’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둘레는 683 로 크지 않지만 급한 비탈 위에 북쪽과 남쪽으로는 7~8.5 , 동쪽으로는 6 높이로 쌓은 이 산성은 삼국시대 영토확장이 치열했을 때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성 안에서 삼국시대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으며 조선초기의 기록에는 이미 산성의 역할을 상실한 옛 성으로 표현돼 있다.

온전히 돌로만 축조된 이 산성의 성벽 위로 올라서면 앞으로는 굽이굽이 흘러가는 남한강과 뒤로는 산맥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데 단양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 수 있게 한다. 현재는 치열했던 싸움의 흔적을 보기는 어렵지만 오래된 고목나무 밑에 있는 빨간 의자와 들에 핀 민들레와 들국화가 우리를 맞이하면서 오롯이 아름다운 단양을 한눈에 느끼도록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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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산성
 

퇴계가 심신을 씻은 탁오대
탁오대(濯吾臺)는 ‘나를 씻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원래 탁오대가 있던 암각자는 우화교 아래 맑은 계곡에 있었다. 한번은 당시 명종대에 단양 군수로 있던 퇴계 이황이 우화교와 남한강을 보며 심신의 피로가 풀리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 후 매일 이곳으로 와 손과 발을 씻으며 정무로 시달렸던 마음까지 정화시키면서 직접 친필로 ‘濯吾臺(탁오대)’라는 글씨를 써서 새겼다고 전한다.

충주댐 건설로 암각자가 수몰되면서 현재 단양수몰이주기념관 앞에 옮겨져 있는데 탁오대와 함께 복도별업 암각자도 함께 있어 눈길이 갔다. 복도별업 암각자는 원래 단양천 상류복도소 근처에 있던 바위였는데 이 바위에 적힌 ‘復道別業(복도별업)’ 또한 이황의 친필로 전해진다.

‘복도별업(復道別業)’은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의 산과 물을 찾아 도를 회복한다는 뜻이다. 이 바위가 있던 복도소는 논밭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들었던 저수지였는데 물이 맑고 깨끗하면서 주변 경관 또한 보기 좋아서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깨끗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탁오대와 복도별업 이 모두 깨끗한 물에 씻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를 보고 있으니 마치 기독교의 경서인 성경에서 말씀이 도(道)라고 하고(요 1:1~5) 말씀으로 마음의 옷을 빨아 입는다는 구절이 생각났다.

신은 자연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능력을 보여준다 한 것처럼 단양의 아름다운 이 풍광들에서도 조물주의 능력을 알 수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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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오대
 

神이 만든 액자, 석문과 도담삼봉
단양에는 8가지 명승지를 의미하는 ‘단양8경’이 있다. 모두 자연이 만들어 낸, 인간의 손으로는 만들 수 없는 곳들이다. 그중에서 도담삼봉과 석문은 지근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도담삼봉은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세 개의 기암으로 된 봉우리를 말한다. 푸르른 남한강 가운데 우뚝 선 3개의 기암괴석이 모두 남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데 가운데 봉우리가 가장 높다.

가장 높은 봉우리를 장군봉(남편봉)이라고 부르고, 왼쪽에는 첩봉(딸봉), 오른쪽은 처봉(아들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치 아들을 얻기 위해 첩을 둔 남편을 미워하여 돌아앉은 본처의 모습과 같다고 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퇴계 이황은 이곳에서 저녁 노을을 보며 “산은 단풍잎 붉고 물은 옥같이 맑은데 석양의 도담삼봉엔 저녁놀 드리웠네. 별빛 달빛 아래 금빛 파도 어울어지더라.”고 시를 읊었다. 퇴계 이황만이 아니라 조선의 개국 공신인 정도전도 가끔 찾아와 경치를 구경하며 풍월을 읊었다고 한다. 그는 장군봉에 있는 ‘삼도정’ 이라는 정자에서 경치를 즐겼다고 하며 자신의 호인 ‘삼봉’ 또한 도담삼봉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도담삼봉을 지나면 마치 무지개처럼 생긴 돌문을 볼 수 있다. <여지도서>에서 도담삼봉에 대한 기록과 함께 ‘석문(石門), 은주암이 마주 하고 있다.’고 적혀있는 것이 ‘석문’의 첫 기록이다. <대동지지>에서는 ‘바위에 구멍이 뚫린석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렇게 기이하게 생긴 석문은 아주 오래전에 석회동굴이 무너진 후 동굴 천장의 일부가 남아 지금의 구름다리 모양이 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정도의 규모는 동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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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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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락산 오르는 길
 

석문을 통해 바라보는 남한강과 건너편 마을의 모습은 마치 액자에 담긴 그림을 보는 듯하면서도 모두가 꿈꾸는 피안의 세계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아무리 인간의 손으로 만든 카메라로 좋은 구도와 보정으로 작품을 만든다고 하지만 신이 만든 자연의 산물 앞에서는 발끝 하나도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석문 주변으로 측백나무가 깎아지른 절벽 위로 자라고 있었는데 석문에 막혀 강으로 기울어져 있는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道를 즐기는 산, 도락산(道樂山)
우암 송시열이 ‘깨달음을 얻는 데는 나름대로 길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는 또한 즐거움이 뒤따라야 한다’라는 의미로 지은 도락산(道樂山)은 높이 965.3 로 1000 가 넘는 소백산과 월악산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도락산은 주로 화강암과 편마암을 볼 수 있으며 서쪽으로는 상·중·하선암과 북쪽으로는 사인암을 품고 있어 단양8경 중 5개를 볼 수 있다.

출발 지점부터 도락산 정상까지 약 3㎞. 시작부터 보이는 암릉들을 힘겹게 오르면 어떻게 깨달음을 즐겁게 깨달을 수 있을까 싶지만 허리를 펴고 맞은편을 둘러보면 엄청난 풍광이 기다리고 있다. 풍광을 바라보면서 절로 나오는 한 마디. “이 정도의 경치라면 도(道)를 깨닫기에 부족함이 없겠다.”
도락산을 오르면 거대한 암반들 위로 노송들을 볼 수 있다. 어떻게 저 바위를 뚫고 뿌리를 내렸을까 하는 노송들은 그 자태가 고고하다.

힘겹게 뿌리를 내려 지켜낸 생명력이란 저런것일까 할 정도로 보통의 길 위에 있는 소나무와는 다른 고고하고도 생명력이 강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돌과 흙 그리고 무수히 많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것이 산이라지만 도락산은 유독 바위와 함께 하고 있는 소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도를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의 신성스러운 모습마냥 도를 즐겁게 깨닫는 도락산에는 이러한 나무들이 그 깨달음을 주고 있었다.

‘도(道)’라는 것은 이 세상만물을 깊이 깨친 이치다. 그 도를 깨닫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과 수많은 시간을 쏟는다. 짐승과 다르게 이성을 가진 인간은 본능이라는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해, 훨씬 강한 짐승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힘을 가진 신을 찾았고 수 천년 겹겹의 시간동안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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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락산 소나무
 

결국 도는 신에게로 향하는 길이며 그 길을 깨달은 사람은 얼마 없었다. 불교의 석가모니도 생로병사의 해결을 위해 수행을 떠났으나 결국 깨닫지 못한 채 죽었다. 공자 또한 수많은 가르침을 남겼지만 그로인해 얼마나 많은 정치적 희생들이 뒤따랐던가. 참 이치였다면 그러한 역사적인 죽음들은 없었을 것이다.

도락산의 정상으로 향하면서 보이는 즐비하게 서 있는 나무들이 그러했다. 힘겹게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은 영광도 있었겠으나 어느 순간 어떤 이유로 죽어버린,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고목이 있었고 그와 반대로 옆에서 푸르르게 생명력을 발휘하는 나무도 함께 있었다.

마치 참 이치를 향해 많은 사람들이 좇아갔지만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해버리는 사람, 다양한 환경에 부딪혀 의지를 꺾여버린 사람, 참 이치가 아닌 다른 것을 좇아가는 사람 등 결국 참 이치를 깨닫지 못해 스러져간 사람들이 고목에 투영돼 보였다.

나 자신도 그러했다. 제봉을 지나 도락산 정상으로 가는 길. 수많은 암릉을 지나가는 길이 힘들어 정상을 앞에 두고 만난 삼거리에서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 마음을 이겨내고 정상에선 순간. 눈앞에 펼쳐진 풍광은 이전의 고생을 깨끗이 씻어주듯 뽐내고 있었다.

도락산은 상선암에서 시작해 제봉, 도락산 정상, 채운봉을 따라 내려와 다시 상선암 마을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산행이다. 그래서 제봉을 올라가면서 내려올 채운봉을 볼 수 있고, 채운봉을 내려오면서 올라갔던 제봉을 다시 볼 수 있다.

도락산 정상을 찍고 채운봉으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험해서 주의가 필요하다. 대신 능선을 따라 만들어진 계단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도락산 주변을 다 볼 수 있는데 마치 산수화 안에 내가 들어간 기분이 든다. 물론 능선을 따라 만들어진 계단이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내려가다 보면 제봉을 향해 올라갔던 암릉들과 마치 누가 깎아놓은 듯 있는 절벽들을 볼 수 있는데 사람의 손으로는 절대 만들지 못할 자연 앞에서 그저 작아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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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은 큰 물줄기인 남한강을 끼고 있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산 것으로 보인다. 특히 수양개 지역은 원시 혁명의 도구인 석기 제작소가 50군데나 발견돼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그러면서 삼국시대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 순으로 삼국의 모든 지배를 받으면서 많은 전투가 있었고 이는 예로부터 이 지역이 얼마나 중요한 지역인지를 알려주는 부분이다.

이와 함께 ‘단양’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부터 처음 시작됐다. ‘연단조양(鍊丹調陽)’에서 유래된 단양은 신선이 먹는 환약을 뜻하는 ‘연단’과 골고루 따뜻하게 해가 비춘다는 의미의 ‘조양’을 합쳐 ‘신선이 다스리는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그래서일까. 단양은 김홍도·정선·최북·이방운 등 조선시대 유명한 화가들이 단양의 멋진 풍경에 반해 그린 그림들이 많고 정도전·이황·이이·김정희 등 많은 문인들도 즐겨찾아 풍류를 즐겼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단양은 퇴계 이황과 인연이 깊다. 명종 대에 단양군수를 지냈던 퇴계는 “비록 청송의 흰학과 연분이 없더라도 단산의 푸른 물과 실로 인연이 있구나”라며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백성들의 구제를 위해 고을 하나하나를 다니면서 궁핍한 백성들의 삶을 살폈는데 당시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된 단양향교를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기도 했다. 현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된 단양향교가 소장하고 있는 <서재유안> <향계절목> <청금록> 등은 지방 향토사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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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많은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많이살고 있다. 높은 빌딩 숲, 쉼 없이 다니는 자동차, 바쁘게 앞만 바라보며 걸어 다니는 사람들. 이러한 각박한 삶 속에서 가끔 마주하는 자연은 언제나 새롭기도 하고 마음 속 안식을 주기도 한다. 단양은 그런 곳이었다. 아침 무렵 자욱하게 끼는 운무부터 푸르고 높은 산봉우리, 햇빛을 받아 반짝이면서 잔잔하게 흐르는 남한강, 붉은 저녁 노을,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은 별빛까지. 모든 것들이 도심 속 바쁘게 살아가던 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모습들이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이들이 찾았던 곳이지 않았을까.

지금은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되어 탁오대와 복도별업 암각자의 원래 위치를 보지 못해 퇴계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하지만 자연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그의 마음을 생각해보며 변함없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 깃들인 신의 마음 또한 생각해보는 단양 탐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