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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天’

하늘이 열리고 세워진 나라


글. 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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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하늘은 신성시되어 왔다. 사람의 손으로 닿을 수 없는 곳이었고 그랬기에 사람이 아닌 초월적인 존재가 있는 곳으로 인식됐다. 그래서 인간은 문명이 발달하기 전인 선사시대부터 하늘을 두려워하고 무언가를 요청하기 위해 ‘의식’을 행했다. 처음에는 먹을 것을 찾기 위해서였고, 먹을 것이 조금 풍요롭게 되자 다산을 기원했으며 나중에는 ‘권력’까지 취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하늘이 열린 날’이라는 의미의 개천절(開天節)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며 왜 10월 3일에 기념하게 됐을까.

하늘에 기원하는 제천의식
제천의식이란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예법이라는 의미다. 이러한 의식은 수렵 활동 시기를 지나 농경과 정착생활이 이뤄지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물론 수렵생활 당시에도 안전한 수렵 활동과 풍부한 식량 채취를 위해 신에게 바라는 벽화를 그리는 등의 종교의식이 있었다.

고대국가는 제정일치 사회였고 제천의식은 농경사회의 일부분이었다. 이는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등으로 나타났다. 먼저 고구려의 동맹은 <삼국지> <후한서>등에 등장하는 데 “10월로써 하늘에 제사하고 대회하니 이름하여 동맹이라 한다. 그 나라 동쪽에 대혈이 있는데 수신이라 부르고 역시 10월로써 맞아서 제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위지> 동이전 한전에 “5월에 씨 뿌리기를 마치고 난 뒤와 10월에 농사를 마치고 나서도 귀신을 제사했다”는 기록이 있어 동맹은 농경 사회에서 추수한 후 하늘에 감사의 의미로 올린 제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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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 참성단
 



지금의 강원도 지역에 있었던 동예 또한 매년 10월에 제사를 지냈다. <위지> 동이전에 “항상 10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는데 이를 무천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동맹처럼 추수를 끝낸 후 하늘에 풍년을 빌며 추수를 감사하는 의식으로 보이며, 가무를 더한 것을 보아 부족의 친목도 다진 것으로 보인다.

반면 북쪽 지방에 있었던 부여는 12월에 의식을 지냈다. 추수가 끝난 후 진행한 것은 ‘동맹’ ‘무천’과 다를 바 없으나 원시시대 수렵사회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다른 곳보다 시기가 조금 늦어진 것으로 보인다. 부여에서 진행했던 ‘영고’는 흉노족 같이 제천행사와 제장회의를 함께 진행해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부여는 그 해의 농사가 잘되지 않으면 국왕이 책임을 졌기 때문에 국왕이 직접 제사를 거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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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천진(단군영정)
 


개천절, 민족을 모으다
결국 제천의식은 하늘에 풍요를 기원하면서 부족 간의 화합을 다지는 장(場)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구한말 우리의 민족의식을 하나로 모으는 또 하나의 수단이 됐다. 개천절의 개천에는 ‘하늘이 열리다’ 즉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단군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을 짚을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까지 단군이 우리 민족의 시조라는 인식은 적었다. 왕에서부터 평민 그리고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 핏줄이라는 의미는 봉건사회에 있어 매우 불편한 인식이었다. 그렇기에 단군이 우리나라를 처음 세운 국가의 시조로 여겼지만 한 핏줄로 났다는 인식은 적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분제가 폐지되고 나라를 뺏길 위기에 처하자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 마음으로 뭉쳐야 했고 이에 단군은 ‘국가의 시조’에서 ‘민족의 시조’로 변화됐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대종교를 중심으로 단군을 선양하는 운동이 진행됐고 1909년 음력 10월 3일 최초로 개천절 기념식이 거행됐다.

음력 10월 3일은 대종교에 있어 단군이 세상에 출현한 날이며 나라를 처음 세운 날이다. 상원 갑자년(BC 2457) 10월 3일에 하늘에서 단군이 내려왔고, 무진년(BC 2333) 10월 3일에 나라를 세웠다. 그렇게 정해진 음력 10월 3일 개천절은 대종교라는 한 종교의 행사일 수 있겠으나 당시에는 대종교만의 행사가 아니었다. 대한의학교는 휴교까지 하며 학생들을 행사에 참여시켰고 <황성신문>에는 “기념식을 통해 시조의 공덕을 기념하면서 민족의 단결을 도모해야 한다”는 논조의 사설이 실리기도 했다.

결국 종교적인 행사가 아닌 민족적 행사로 진행됐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첫 기념행사 다음해에 일제에게 나라를 뺏기고 말았지만 대종교를 중심으로 매년 음력 10월 3일에 개천절 행사를 가졌다. 기념식 때마다 강연회·연극·음악회 등이 열렸고 수천 명의 참가자들이 모일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매년 개천절 기념행사는 독립운동을 위한 발판이 됐고 일제는 항상 예의 주시했다.

단군이 내려온 곳, 마니산 참성단
강화도에 있는 마니산 참성단은 오랜 시간 전부터 단군과 관련된 유적지로 유명했다. 고려 충렬왕 대에 마리산이 무너졌다는 내용이 가장 오래된 자료인데 이후 조선시대에도 참성단이 무너졌다는 기록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참성단의 형태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돌로 쌓아 위는 모지고 아래는 둥근 형태이며 단의 높이가 10척, 단위의 4면이 각각 6척 6촌, 아래의 너비는 각각 15척이었다고 적혀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온 곳은 크게 두 군데로 볼 수 있는데 태백산의 천제단과 마니산의 참성단이다. 태백산은 조선시대 때 국가 행사를 지내지 않게 되면서 민간에서 제사를 진행한 반면 마니산은 조선시대에도 일 년에 두 번씩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그래서 해방 이후 진행된 개천절 경축식을 마니산 참성단에서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의 첫 개천절 기념식은 서울운동장에서 진행됐다. 하지만 다음해인 1946년에 진행된 개천절 경축식에서는 서울에서 참성단까지 성화를 봉송했다. 이때부터 개천절 경축식은 참성단에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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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천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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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 전통제례
 


4대 국경일로 지정된 개천절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고 그해까지는 음력 10월 3일에 개천절을 기념했다. 하지만 다음해인 1949년 10월 1일에 공포된 법률 제53호에 의해 개천절이 4대 국경일로 포함되면서 음력이 아닌 양력 10월 3일로 지키게 됐다.

그러면서 행사에 국가의 개입이 커지면서 참성단의 경축식이 정부의 공식행사로 진행됐고 서울에서는 더 이상 개천절 공식행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참성단에서 행사가 진행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1951년과 1952년에는 경남도청에 마련된 임시 국회의사당에서 개천절 기념식을 진행한 것을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참성단에서 개천절 기념식이 진행됐다. 1953년부터다. 하지만 공식적인 행사는 서울의 중앙청에서 진행됐고 이후 참성단의 행사는 강화군 자체의 행사로 진행됐다.

하늘이 열려 나라를 세운 날을 기념하는 개천절. 오늘날 그 의미는 많이 퇴색됐지만 100여년 전 우리 민족이 어떤 의미로 개천절 기념식을 지켜왔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느 누군가는 신화와 같은 인물이 나라를 세운 그 날을 굳이 기념해야 하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 개천절은 단순히 나라를 세운 날을 떠나 민족의 정신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우리의 소망을 드러내며 조금의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은 날이기도 했다.

단군이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 즉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이치로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건국이념으로 만든 고조선. 그리고 그 이념을 이어 다시 하늘을 열었던 조선.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한반도는 여러 왕조를 지내왔음에도 결국 ‘이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우리 선조들을 생각하면서 앞으로 우리가 지켜야 할 이 나라의 신념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