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 | GEULMARU

로그인 회원가입 즐겨찾기추가하기 시작페이지로
글마루 로고


 

조선 성리학의 꽃
‘한국의 서원’
‘천인합일(天人合日)’을 꿈꾸던 곳

글, 사진. 이지수


01.jpg
돈암서원 홍살문과 하마비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을 학습하고 선배들을 따라 배우던 공부의 전당이었다. 성리학은 사람의 본성을 찾아 선한 마음을 기르고자 했던 공부 방법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이 펴낸 책 <도산
서원>은 지난 7월 6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서원(書院)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 책에서 철학자인 최진덕 한중연 교수는 “주자학(성리학)이라는 이념이 서원의 영혼이라면, 서원이라는 제도는 그 이념을 역사 안으로 실어 나르는 몸이었다”고 주장했다. 불교와 사찰, 기독교와 교회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처럼 서원은 성리학이라는 학문이 철저하게 구현된 공간이었다.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은 우리나라에 자리 잡
은 수많은 서원 중에서도 16~17세기 설립돼 역사적으로 가치가 크고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된 서원 9곳을 지칭한다.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북 경주의 옥산서원,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 경남 함양의 남계서원,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 전북정읍의 무성서원,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이 바로 그 곳이다.

서원으로 가는 길
국가문화재를 넘어 세계인의 유산이 된 우리나라의 서원. 그중 한 곳을 정하고 직접 가보기 위해 지난 8월 2일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충남 연산역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돈암서원’이다. 여름의 한 가운데, 초록 잎 무성한 풍경 속을 기차는 달리고 또 달렸다. 출발한 지 2시간 좀 지났을까. 푸르디 푸른 산천과 새하얀 뭉게구름들이 떠다니는 파란하늘. 차창 밖 아름다운 자연 경관에 흠뻑 빠져있을 때쯤 연산역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기차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10분 정도 이동한 후 서원 입구에 다다랐다.

   


02.jpg
돈암서원 산앙루 



홍살문과 하마비. 이곳이 돈암서원의 시작점이다. 서원뿐 아니라 향교 등에서도 볼 수 있는 홍살문(紅箭門)은 악귀를 물리치고 나쁜 액운을 막는 것을 의미한다. 신성한 영역의 경계인 셈이다. 하바미(下馬碑)란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비석이다. 이 하마비는 보통 궁궐이나 왕릉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 서원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부분의 서원 입구에는 이러한 의미들이 담겨 있다. 공부하러 올 때 긴장하고 들어오라는 의미로 옥산서원 입구에는 외나무 다리가 놓여져 있고 소수서원 앞 연못 바위에는 붉은 글씨로 공경할 경(敬)자가 적혀 있어 학문을 대하는 선비의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병산서원 입구에는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낮은 문이 있는데 이 문의 이름은 복례문(復禮門)이다. 이는 “자신을 극복하고 예(禮)로 돌아가라”는 <논어>의 ‘극기복례(克己復)’에서 따온 말이다.

전인교육에 적합한 환경
성리학에서 성인을 본받는다는 것은 자기 마음 속의 사욕을 다 버리는 것이었다. 유생들은 인간 내면에 있는 자기를 위한 감정을 버리고 공(公)으로 나아가는 태도를 가지길 원했다. 그들은 지식만 쌓는 것이 아닌 지덕체(智德體)를 고르게 성장시키는 ‘전인교육(全人敎育)’을 통해 생각이 바르고 사함이 없는 사무사(思無邪)의 경지까지 이르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소학>부터 차근차근 공부해서 자기를 이겨내는 공부가 쌓이고 쌓이면 나중에는 도의 세계에 이르게 되고 그것이 사무사의 세계 곧 완전히 자기를 이겨내고 ‘참’자아를 찾는 것이라 여겼다.

이를 위해 대부분 서원은 자연 속에 지어졌고 오로지 배움과 수양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어졌다. 도산서원, 병산서원, 옥산서원 등의 경우 앞쪽에 맑고 깨끗한 계류와 긴여울이 감싸고 산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언제라도 누각에 오르거나 창문만 열어도 아름다운 산수를 감상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서원의 입지 선정에 심신 수양의 환경을 첫손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돈암서원 입구를 지나 제일 먼저 만나는 산앙루(山仰樓)에도 자연과 인간이 하나된 환경에서 전인교육을 실현하고자 했던 선현들의 염원이 담겨져 있다. 이러한 염원은 서원의 이름에도 얽혀있다. 돈암서원(遯巖書院)은 율곡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잇는 예학(禮學)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의 학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서원이 처음 입지한 산기슭에 큰 바위를 ‘돈암(遯巖)’이라고 불렀는데 돈암의 돈은 원래 ‘둔(遯)’자로 세상을 피해 숨어 산다는 은둔(隱遯) 혹은 둔세(遯世)를 뜻한다.

‘돈암’은 김장생이 젊어서는 과거에 응하지 않고 인조반정 이후에는 왕의 부름도 사양한 채고향에서 은둔하며 학문과 후진 양성에 침잠(沈潛)하면서 산림(山林)으로 살고자 한 일생을 상징하는 상징적 기호이다. 김장생은 자신이 은둔한 돈암서원의 입지 경관을 보며 “산을 우러르며 즐기고 시내를 내려다보면 물을 살피며 자연 경물을 접하는 대로 이치를 깨닫는다”고 <양성당기(養性堂記)>에 기술했다.

‘산을 우러러 바라보는 즐거움’에 대해 공자는 <시경(詩經, 유교경전)>의 “높은 산을 우러르고 큰 길을 가야 한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높은 산을 우러르는 것을 높은 덕행을 본받는 것에 비유했다.



03.jpg
돈암서원 정의재에서 바라본 양성당



유생들의 기숙사 생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곳에서 유생들은 공동기숙생활을 했다. 산앙루 뒤편 돈암서원의 외삼문이자 서원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입덕문(入德門)으로 들어가니 강당으로 사용했던 응도당(凝道堂)이 나오고 그 옆에는 김장생의 서재로 쓰이던 양성당(養性堂)이 있다. 양성당 양쪽으로는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정의재(精義齋, 서재)와 거경재(居敬齋, 동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이렇듯 대부분 서원의 외문이나 누문을 지나면 유생들이 학문을 닦고연구하던 강학(講學) 공간인 강당과 재사(기숙사)가 나온다. 일반적으로 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돼 있는데 강당에서 볼 때 왼쪽은 동재, 오른쪽은 서재라 칭한다.

재사의 건물은 강당보다 한 단 낮은 곳에 최소 3칸부터 5칸까지 규모는 다양하다. 다양한 규모와 형태에도 마치 ‘공자가 제자를 거느리듯’ 강당이 높고 커야하며 양쪽 재사는 강당에 딸린 제자와 같이 낮고 작아야 한다. 지붕도 강당이 팔작지붕인데 비해 격이 낮은 맞배지붕이 되도록 해 성리학적 위계질서를 반영했다. 강당은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기에 대청 앞에 그 서원의 현판이 걸린다. 예를 들면 병산서원 강당의 명칭은 입교당(立敎堂), 좌우 온돌방 명칭은 명성재와 경의재다.

‘교육을 세운다’는 뜻의 입교(立敎)라든가, 명(明), 성(誠), 경(敬), 의(義) 등 성리학적 가치와 명분들로 가득한 명칭들이다. 공동 기숙생활을 원칙으로 하며 성리학적 예법을 준수해야 하는 서원생활이란 매우 긴장된 생활이었다. 원장, 상·하급생간이나 동기간에 예를 갖추며 의관을 정제해야 하는 엄격한 수련이었다. 그렇기에 어디선가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도 필요했으리라. 그러한 용도로 마련된 것이 누각이다. 보통 경치 좋은 곳을 감상할 수 있는 누각 위에서는 때때로 시회를 열어 서원 구성원들이 풍류를 겨루기도 하고 손님들을 맞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 대학으로 말한다면 학생회관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누각은 보통 3칸 규모지만 병산서원이나 옥산서원은 7칸까지도 확장됐다. 특히 옥산서원은 2층 누각에 온돌방을 들여 겨울에도 기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누각이 없는 서원은 강당 대청을 넓게해 누각의 연회기능을 담기도 했고 소수서원 처럼 서원 바깥의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만들어 대신하기도 했다.


 
04.jpg
돈암서원 입덕문에서 보이는 양성당



스승을 부모처럼
서원의 양대 기능은 강학과 제향(祭享)이다. 보통은 앞쪽에 강학공간으로 강당과 기숙사를 두고 뒤쪽에 선현을 위한 사당(祠堂)을 지었다. 사당은 제향공간의 중심이며 사림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선현의 위패나 영정을 모시고 춘추로 제향을 베푸는 곳이다. 돈암서원양성당을 지나 안쪽으로 몇 걸음 더 옮기면 예쁜 담벼락 하나가 눈길을 끈다. 자세히 보니 무언가 글씨를 새겨 넣었다. 지부해함(地負海涵) 박문약례(博文約禮) 서일화풍(瑞日和風). 뜻은 이렇다. ‘땅이 만물을 짊어지고 바다가 만천을 수용하듯 넓은 아량을 함양하고 학문을 넓고 깊이 익혀서 예를 실천하며 아침 햇살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품성을 길러라.’ 글의 뜻과 관련해서는 김장생의 인품을 일컫는 내용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일부 유림사회에서는 그의 가르침을 축약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 담장 너머 높은 곳에 돈암서원의 사당인 ‘숭례사(崇禮祠)’가 있다.

숭례사는 김장생을 주향으로 그의 아들 김집과 제자 송준길, 송시열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제향을 베푸는 사당은 서원 경내 가장 뒤편,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지존한곳이다. 주로 ‘OO사(祠)’라는 명칭이 붙지만 옥산서원의 ‘체인묘’와 같이 묘(廟)라는 명칭이 붙기도 한다. 이곳에는 성균관이나 향교의 문묘에 공자와 그 제자들을 모시는 것과 달리, 안향이나 이황 등 각각의 서원이 배향한 도덕과 학문이 높은 인물들을 모신다. 스승을 제사 지내는 이유는 육신을 낳아준 부모가 있듯 정신을 낳아준 존재는 스승이라 여겼기 때문에 스승을 부모처럼 받들었다. 사당의 의미는 교육공간보다 높은 위상을 갖는다. 그렇기에 제향공간은 보통 교육공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높은 곳은 낮은 곳보다, 동쪽은 서쪽보다 높은 위계를 갖는 게 서원의 건물의 핵심이며 이런 사방의 위계 관계는 유교적인 것이다.



05.jpg
돈암서원 숭례사 꽃담



“하늘과 사람은 본래 하나이니라”
성리학의 근간인 유교의 핵심 사상은 천지무간(天地無間) 천인합일(天人合一)이라할수 있다. 이는 ‘하늘과 땅이 사이가 없이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여기서 땅은 ‘사람’을 의미한다. 이 사상은 주자학(성리학)이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이 수용한 사상이다. 목은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자연계의 운행을 하늘의 일로 간주했다. 이 같은 자연계의 운행이 일정하게 진행되는 것은 이를 주재하는 존재가 있기 때
문이며 그 주재를 하늘이라 했다. 본래 하늘과 하나였던 사람은 하늘의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데 현재 그렇지 못한 자신을 직시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 하늘과 하나인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방법인 수양철학이었다.


 
06.jpg
돈암서원 거경재에 놓여진 하얀 고무신들
 



목은 철학의 바탕은 ‘천인무간설(天人無間說)’로 집약되어 있다. 천인무간(天人無間)이란 ‘하늘과 사람이 다른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으로 이는 대종교 경전 <천부경(天符經)>에 나타나고 있는 ‘한사상’의 요체이다.

한사상에 정통했던 목은은 그 사상의 전개를 천부경 첫머리에 등장하는 ‘일석삼(一析三,하나가 셋으로 나뉜다)’의 가르침에 따라 다음의 세 갈래로 구현된다고 가르쳤다. 첫 번째는 하늘과 사람이 원래 하나였기에 그렇지 못한 현실 세계에서 본디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지극한 수양철학을 내세웠다. 그 다음엔 수양철학(修養哲學)으로부터 본디 모습인 한님의 나라, 즉 현실세상을 이상향으로 만들려는 열망을 갖는 정치실천철학(政治實踐哲學)을 내보였다. 이어 목은이 살고 있던 시대의 사상적 배경을 이룬 불교와 도교 등의 모든 종교를 하나로 융합하는 초탈원융철학(超脫圓融哲學)을 역설했다.



07.jpg
필암서원 제향소
 


이 목은철학의 세 가지 모습으로부터 조선의 성리학은 뚜렷한 흐름을 형성하며 전개됐다. 수양철학의 흐름은 양촌 권근(陽村權近, 1353~1409),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을 거쳐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에 이르러 꽃을 피웠고 정치실천철학은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1482~1519)를 거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에서 정점에 이르렀고 초탈원융 철학은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 화담 서경덕(花潭 徐慶德, 1489~1546)을 거쳐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08.jpg
좌) 조선 중기 대표적인 유학자 사계 김장생의 영정, 우)목은 이색



세계인이 인정한 서원의 가치
서원 건축에는 성리학적 가치관, 세계관, 자연관이 반영됐다. 산수가 수려한 곳에 서원을 앉힌 것도 유교적 천인합일(天人合一)사상이 크게 지배했던 이유다. 서원이 들어선 장소는 그들이 최고의 덕목으로 여긴 천인합일을 체득하는 경관이었다. 따라서 서원의 배치도 주변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사례가 많다. 도산서원이나 필암서원, 병산사원 등은 중심건물들이 주변의 자연 지형이나 경관과 잘 조화되기 때문에 남향으로 건물을 배치했다. 옥산서원은 중요한 건물들을 서향으로 배치해 서원 앞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건너 자옥산을 바라보며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게 했고 도동서원은 서원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도록 자리를 잡았다. 돈암서원 역시 서원 앞으로 펼쳐진 넓은 들판을 내다보게 배치해 서원도 자연의 한 부분이 되고 있다.

성리학이 만들어낸 조선 시대 가장 대표적 산물 서원은 공립학교인 향교(鄕校)와 달리 지방 지식인이 설립한 사립학교로 성리학 가치에 부합하는 지식인을 양성하고 지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를 배향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에 서원에 대해 “오늘날까지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하는 한국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라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따라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세계유산 필수 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 OUV)’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 이로써 한국의 서원은 세계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 세계기록유산을 통틀어 유네스코가 인정한 우리나라의 50번째 유산이 됐다.


<참조: 목은이색연구집, 한국철학사전>


09.jpg
소수서원 선비수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