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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면,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파노라마


글. 이지수 사진제공.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이한열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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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당시 ‘거짓없는 나라에 살고 싶어요’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아이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살아서 얻지 못한 것
인간·자유·해방
죽어서 꿈꾸며 기다릴 너를 생각하며
찢어진 가슴으로 네게 약속한다
거짓으로 점철된 이 땅
너의 죽음마저 거짓으로 묻히게 할 수는 없다
우리 모두가 해방 춤을 추게 될 그날
척박한 이 땅 마른 줄기에서 피어나는
눈물뿐인 이 나라의 꽃이 되어라

박종철 추도시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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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열사 영결식 모습(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제공)
 


1987년 1월 20일 오후 1시 40분. 앳된 한 학생의 영정이 서울대 언어학과 사무실에서 나와 학생회관 2층 라운지에 모셔졌다. 잠시 후 영정 속 학생의 추모제가 시작됐고 한 여학생이 추도시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를 낭독하자 추모제는 이내 울음바다가 됐다. 영정 속 앳된 학생은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당시 21세)이다. 그의 죽음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파노라마의 불씨가 됐다.

폭압과 독재로 물든 신군부 정권
길고 암울했던 유신 독재 정권이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사건으로 막을 내린 1979년 10월 이후, 오랫동안 바라던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박정희 암살 사건을 조사하던 수도경비사령부(현 수도방위사령부)의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일부 군인들은 국민들과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1979년 12월 12일 오늘날 12·12사태로 불리는 군부 내 하극상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들을 박정희 정권의 군 세력과 구분해 ‘신군부’라고 부른다.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은 ‘비상계엄령’을 내려 정치·사회·언론·노동·종교 등 모든 부문에 걸쳐 사찰을 강화하고 언론 통폐합 등 민주주의를 압살하는 조치들을 취했다. 전두환과 신군부의 군인독재체제의 탄압 정치는 국민들이 원하는 민주화의 염원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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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이 떨어지자 피하는 시민들(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제공)
 



부서진 ‘서울의 봄’
폭압과 군부, 독재에 짓눌린 1980년. 자유와 민주화라는 말조차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억압받던 그해 봄은 암울했다. 민주화를 위한 국민들의 몸부림은 처절했다. 1979년 10월 26일 부터 1980년 5월 17일까지 민주화운동이 대한민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를 일명 ‘서울의 봄’이라 부른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자유화운동 ‘프라하의 봄’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오면 꽃이 피는 법. 그러나 유신독재가 끝나고 민주주의가 오는 줄 알았던 국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당시 서울의 봄은 군사 독재정권의 군홧발과 곤봉으로 살기가 가득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대학생 10만여 명이 운집했다. 이들은 ‘전두환 사퇴’와 ‘비상계엄령 해제’를 목 놓아 외쳤다. 그러나 신군부가 공수부대 등을 투입한다는 얘기가 전해지면서 해산 여부를 두고 학생 지도부 사이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16개 서울 소재 대학교 총학생회장들의 격론 끝에 해산하게 되는 일명 ‘서울역 회군’ 사건이 있게 된다. 이는 예상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혹독한 결과로 이어졌다.

신군부는 ‘서울역 회군’ 이틀 후인 5월 17일 쿠데타를 감행,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 해산을 선포했다. 급기야 그 다음날인 5월 18일 전남 광주 일대에 공수부대가 투입돼 민주화를 외치는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로 죽이는 학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191명이 사망하고 852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5·18 민주화운동은 6월 항쟁으로 가는 길에 귀중한 디딤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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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열사묘역에서 박종철 열사영정사진에 비친 국화꽃(뉴시스)
 


6월 항쟁 도화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실권을 완전히 장악한 전두환은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 한 후 서울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선거에 단독 후보로 나서면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어 8차 개헌을 거친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1981년 2월 25일 치러진 제12대 대통령선거에서도 당선인은 전두환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전두환 독재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은 1980년대 중·후반으로 갈수록 극에 치달
았다. 그러던 중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시신 한 구가 실려 나갔다.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이었다. 경찰은 그의 죽음에 대해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전두환 정권의 은폐가 진행될수록 죽음의 진실이 수면으로 비집고 올라왔다. 고문치사였다. 이 사건은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전두환 정권이 몰락하게 된 기폭제가 됐다.

전두환 정권 말기였던 1980년대 후반,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을 조사 중이었다. 주동자로 몰렸던 박종운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그 후배인 박종철을 경찰이 불법 체포한 것이다. 경찰은 박종철에게 폭행과 전기 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며 박종운의 행방을 캐물었고 그는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우연히 이를 알게 된 기자가 신문에 2단짜리 기사를 실었고 의혹이 커질 것을 우려한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이 박종철의 사인은 단순 쇼크사라고 발표했다.

강 본부장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신문을 시작했다. 박종철에게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졌다. 중앙대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박종철의 시신 부검의는 그가 고문을 당했다고 확언했다. 큰 용기였다. 나라가 박종철을 죽인 것 아니냐는 의혹이 들불처럼 피어오르자 치안본부는 사건 발생 5일 만인 19일, 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했다. 박종철 고문치사와 은폐 조작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에 흠집을 냈고 탄압에 분노하던 국민들은 규탄 시위를 준비했다. 이어 1987년 6월, 항쟁이 시작됐고 민주화운동의 촉매제가 됐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고 여기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자 전두환은 ‘4·13 호헌조치’라는 중대 발표를 하게 된다.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시키고 1988년 2월 정부를 이양하겠다는 것이 요지였다. 이는 군사정권을 이어가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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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열사 피격직전(Nathan Benn촬영,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한열아, 한열아…”
여론은 점점 더 들끓었고 6월 9일, 전국 대학교 학생들은 다음날 예정된 ‘국민평화대행진(6·10대회)’을 위한 사전 시위를 시작했다. 이때 시위 도중 연세대 정문 부근에서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당시 22살 청년 이한열이 뒷머리에 맞아 앞으로 고꾸라졌다. 최루탄을 피해 달아나던 학생들은 그가 나뒹구는 모습을 보고 발길을 다시 돌려 부축해 병원으로 옮겼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이한열은 27일간의 의식불명 상태 끝에 결국 7월 5일 새벽 2시 5분경 세상을 떠나므로 6월 민주항쟁에 꽃다운 젊음을 바친 희생자로 기록됐다.

이한열의 영결식은 사후 5일 후에 열렸고 학생·시민·재야단체·정치인 등 7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연세대 본관 앞에서 장중하게 거행됐다. 영결식에서 그의 어머니 배은심 씨는 단상에 올라가 “여기 모인 우리 젊은이들이여! 불쌍한 우리 한열이가 못다 이룬 민주화를 꼭 성취해주세요”라고 울먹이며 “우리 한열이는 이 세상에 없다. 살인마 물러가라. 한열아, 한열아”라며 오열해 영결식장은 눈물바다를 이뤘다.

6월 10일, 항쟁의 막이 오르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6월 항쟁이 불붙고 있는 상황에서 이한열의 사망은 타는 불길에 휘발유를 끼얹는 격이었다. 6월 10일 예정대로 서울을 비롯, 전국 주요 도시에서 일제히 규탄 집회에 들어갔다. 각 대학은 출정식을 갖고 도심으로 몰려들었다. 이날 오후 6시 정각, 국민대회가 열리는 대한성공회 종탑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성당의 종이 42번 울리는 것을 신호로 성당 구내에 있는 차량들이 경적을 울리니 도심을 지나던 차량들도 일제히 따라 경적을 울렸다. 이로써 6·10대회, 더 나아가 6월 민주항쟁의 막이 올랐다. 시장 상인들도 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을 숨겨주며 정부를 비난했고 학생들과 함께 야당 의원들은 여기저 기서 노상 약식 규탄대회를 열었다.

오후 6시가 넘자 시민들의 합세로 시위 대열은 점점 늘어났다. 서울역, 만리동입구, 신세계백화점 앞, 서부역 등에는 최루탄과 돌멩이가 난무했고 가두시위를 벌이던 학생 1000여명은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 안으로 들어가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멈추지 않고 더 들불처럼 번져갔다. 야당 정치인과 시민단체, 학생운동권,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민운동본부)’는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하고 대대적으로 최루탄 추방 운동을 전개했고 이날 전국 14개 도시에서 20만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제5공화국의 종말
국민운동본부는 D-day를 6월 26일로 잡고 이날 평화대행진을 강행할 것을 결정했다. 6월 26일, 드디어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이 시작됐다. 서울에서는 학생·재야·야당·시민 등이 국민운동본부의 행동지침에 따라 탑골공원 일대와 시청 앞, 광화문 등 7개 집결지로 진출하려 했으나 경찰의 3중 제지로 처음에는 산발적인 시위를 벌었다. 오후 7시가 넘자 시민들이 가세해 대규모 군중 시위가 됐다. 전국 33개 시와 4개 군에서 180만여명이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고 참가한 국민들은 ‘호헌철폐’ ‘민주쟁취’ ‘독재타도’를 외쳤다. ‘6·26대행진’은 철저히 평화주의를 원칙으로 진행됐고 최루탄에 쫓기면서도 시위대들은 ‘질서’를 지켰다. 제5공화국 이래 최대의 인파가 참가한 6·26대행진에 전두환 정권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되고 막다른 골목에서 돌파구를 찾은 것이 ‘6·29선언’이었다. 마침내 6월 민주항쟁이 제5공화국 군부 독재의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차기 대통령 후보에 지명된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6월 29일 기자회견을 갖고 대통령직선제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8개 항의 ‘6·29선언’을 발표했다. 6월 항쟁 중 최대 규모의 6·26시위가 있은 지 3일 뒤였다. 이로써 정부의 ‘4·13호헌조치’는 철회되고 직선제 개헌론이 관철됐다. ‘6·29선언’으로 여야합의 하에 국회에서 개헌안이 의결되고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에서 찬성률 93.1%로 확정돼 29일 공포됐다. 제9차 개헌으로 헌법 개정이 이루어지고 이후로 우리나라는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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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6월 7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서 열린 ‘故 이한열 열사 26주기 추모제’에 학생들이 헌화하는 모습(뉴시스)
 


평화를 위해 흘린 피
역사를 돌이켜보면 자유와 민주주의는 피 없이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동서가 다르지 않았고 한국의 경우는 특히 더 그랬다. 어렵게 싹 튼 민주주의가 독재자들의 사나운 칼날에 잘리고 국민은 그때마다 피를 흘려가며 지키고자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숨 가쁠정도로 격랑(激浪)의 역사를 헤쳐 오면서 나라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피 흘린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마다 그랬다. 빼앗긴 나라를 도로 찾고자 했던 3·1운동의 사상과 정신은 3·15의거로 이어졌고 3·15의거는 4·19혁명이 됐다. 4·19혁명은 1979년 10월 유신독재에 맞선 부마민주항쟁으로, 1980년 5월에는 신군부 야욕에 맞선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부활했다. 이는 1987년 6월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이 켜켜이 쌓인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겠는가. 피의 희생 정신은 바통을 넘겨받듯이 그 다음 세대로 이어져왔고 오늘날 우리는 그들이 원했지만 누리지 못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한껏 누리며 살고 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자유와 민주주의, 정의가 살아있는 ‘평화로운 세상’이었으리라. 지금, 세상이 평화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을 마무리 짓고 완성해야할 몫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결국 평화를 위해 흘린 그들의 피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유언이 되고 당부가 된다. 그 피의 유언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평화의 세상’이 이루어지는 ‘그날’은 머지않아 도래할 거라 믿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1987년 당시 대표적인 민중가요였던 <그날이 오면>의 한 대목을 떠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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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통령 선거 직선제 외치는 시민들(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제공), 2.이한열 장례행렬-교문앞 만장(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3.6월 항쟁 당시 경찰과 시위대(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제공), 4. 5월 18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유족들이 희생자들의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오랜 고통 다 한후에
내 형제 빛나는 두눈에 뜨거운 눈물들
한줄기 강물로 흘러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노래를 찾는 사람들 <그날이 오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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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열사 피격직후(Nathan Benn촬영,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