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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대한민국,

더 나은 미래로 향하다


글. 이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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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한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으로 한다.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언론·저작·출판·결사·집회·주소이전·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한다.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와 피선거권이 있다…(하략).”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29명이 모였다. 비록 모습은 남루했으나 눈빛 만큼은 빛나는 이들은 어두운 조국에 빛을 되찾고자 모인 애국지사들이자 대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비록 고국이 아닌 남의 나라, 그것도 프랑스 조계내 한 구석이었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격변의 1919년, 정부의 수립
1919년 3·1운동을 전후로 국내외에서는 정부수립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1919년 3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건립한 대한국민의회를 시작으로 줄줄이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4월에는 서울에서 조선민국임시정부와 한성정부,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평안에서 신한민국정부, 기호지역에서 대한민간정부, 간도에서 고려임시정부 등이 세워졌다. 그중 중심점이 됐던 임시정부가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였는데, 후에 서울의 한성정부와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와 통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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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회복합시다.”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모인 이들은 정부를 움직이기 위한 의원들이었다. 하지만 정부 수립전이었기에 ‘임시의정원’이었고 이들은 먼저 국호부터 논의했다. 처음에는 조선을 유지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마지막으로 있었던 ‘대한제국’의 ‘대한’을 유지하자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체제를 민주공화제로 채택하면서 ‘제국’이 아닌 ‘민국’으로 결의하게 됐다. 그렇게 지어진 국호가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국호 다음으로 정부를 수립할 것인가, 정당을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논하였다. 다수는 “민심을 강화시키는데 정부는 필요하다” “일본에 대한 반항의 의미가 크다”며 정부조직을 주장했다. 하지만 여운형이나 이회영은 회의적이었다. 여운형은 “정부의 체면 유지가 어렵다”며 정부조직 보다는 당조직을 주장했다. 이회영은 정부를 조직하게 되면 지위와 권력을 두고 분열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 단일의 정부기관보다 독립 단체가 참여하는 독립운동총본부를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조직으로 임시정부를 구성한 것은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고, 또 제1차 세계대전을 지켜보면서 망명 지사들이 민주공화제의 국가와 정부를 세우겠다고 다짐한 의지가 관철된 것이었다. 그렇게 국호와 정부 형태를 의논한 이 회의가 ‘임시의정원 제1차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발표하고, 임시정부를 조직해 관제를 발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걸음이었다. 이때 임시의 정원 의장으로는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신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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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사진(1919. 9.17)
 


시들어가는 임시정부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와 서울의 한성정부와 통합한 상하이 임시정부는 초기 외교에 주력했다. 일제로부터 당하는 국내 상황을 국외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보내고, 7월에는 스위스 만국사회당대회에 조소앙을 파견하는 등 서구 열강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강대국들은 이를 외면했다.

그러면서 1920년 말 이후 점점 침체되기 시작했다. 이유는 다양했으나 일제가 연통제와 교통국을 끊으면서 국내와의 연결을 차단시켰고, 임시정부 내부에서도 잡음이 나기 시작했다. 임시정부가 1919년 9월 15일 대통령중심제로 체제를 바꾸면서 초대대통령으로 선출됐던 이승만은 위임통치 발언으로 탄핵에 이르렀고, 1923년 임시의정원은 이승만 대통령 탄핵안을 제출해 1925년에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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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창 의사 동상                                                             위)윤봉길의사
                                                                                                                                         아래)김구 시계와 교환한 윤봉길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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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정부는 이러한 갈등들을 극복하고자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그중 하나가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국민대표회의는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상황을 점검하고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는 것에 초점을 뒀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독립운동 단체 대표 약 140명이 모였다. 의장은 김동삼, 부의장은 안창호와 윤해로 정하고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에서 논의한 것은 임시정부의 조직과 체계를 개조해 임시정부를 활성화 시키자는 것(개조파)과 새로운 조직체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창조파)이었다. 하지만 4개월이 넘는 기간 회의를 진행했음에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창조파가 연해주로 이동하고 개조파가 탈퇴하면서 해산되고 말았다.

활력이 된 한인애국단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대통령에서 탄핵하고 1925년 2차 개헌을 단행해 국무령을 수반으로 하는 의원내각제를 택했다. 1925년 9월 초대 국무령으로 이상룡을 임명했으나 임시정부 내분에 환멸을 느낀 이상룡은 상하이를 떠났고 1926년 2월에 면직됐다. 이후 양기탁, 안창호, 홍면희 등 취임을 거부하거나 스스로 사임하면서 국무령은 계속 교체됐고 임시정부 내부의 분열은 더욱더 심각해지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1927년 3차 개헌을 단행하면서 행정부를 의정원에 예속시키고, 행정원의 수장을 주석으로 하는 집단 지도체제를 채택했다. 그러함에도 분위기가 개선되지 않자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한다. 독립투쟁을 통해 불을 붙이고자 한 것이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다음해인 1932년 1월 이봉창이 도쿄에서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4월 윤봉길이 상해 홍코우 공원에서 열린 일왕의 생일축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지면서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됐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와 반격이 더욱 심화되면서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뒤이어 일어난 중일전쟁(1937)으로 인해 1932년 항저우,1935년 전장, 1937년 창사, 1938년 광둥·류저우, 1939년 치장, 1940년 충칭 등을 이동하게 됐다.

1939년 치장으로 옮긴 임시정부는 전시체제로 정비하면서 정상적으로 운영을 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옮긴 충칭에서는 광복군을 창설하고, 태평양전쟁(1941)이 발발하자 일본과 독일에 각각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에 군대를 파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도 얻고, 1945년 미국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불완전한 독립 그리고 분열
일제가 항복하면서 36년의 식민통치는 끝이났다. 미국의 전략첩보기구인 OSS와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던 김구는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김구뿐만이 아니라 임시정부 요원들의 같은 마음이었다.

임시정부의 우려와 같이 연합국은 한국의 독립투쟁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미국은 임시정부가 정부로서 환국하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고, 임시정부는 개인 자격으로 국내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것마저도 29명의 국무위원이 한 번에 들어올 수 없었고, 제1진과 제2진을 나누어야 했다. 주석인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 등이 포함된 제1진은 11월 23일에, 외무부장 조소앙과 의정원 의장 홍진등이 포함된 제2진은 12월 1일에 환국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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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장에 전시된 국무회의 모습(1945.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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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김구 혈의, 우)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환국 기념 서명
 

1945년 12월 28일, 경교장에 모인 임시정부는 긴급 국무회의를 개최했다.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관한 내용이었다. 임시정부는 긴급 국무회의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결의하고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의 명의로 4개국 원수에게 결의문을 발송했다. 또 정당·종교·언론의 대표들을 모아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국민들도 임시정부의 뜻에 함께했다. 12월 31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결사반대시민대회’에는 3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삼천만은 죽음으로써 즉시 독립을 쟁취하자’ ‘외국군정의 철폐를 주장한다’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진행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파 진영은 점점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반대하는 우파진영은 반탁보다는 공산주의와 소련을 반대하는 양상이 더 커 점점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 나의 유일한 염원은 통일된 조국 건설”

신탁통치를 두고 갈라진 임시정부는 과도정권을 수립하고자 했다. 1946년 2월 1일 명동천주교회당에서 결성한 비상국민회의는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것으로, 과도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좌우합작을 추진했다. 그렇게 1947년 2월 국민의회가 결성이 되고, 3월 과도정권을 수립했다. 이어 9월에 국민의회는 대한국민회로 개편되지만 주석으로 추대된 이승만이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제적으로 발언권을 취득하자는 생각이니 일반 동포들은 양해해 달라”며 사임했다.

임시정부는 통일된 정부가 수립되기를 바랐지만 북쪽에서는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해 정부수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남쪽에서도 이승만이 정읍에서 남한 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면서 남과 북에서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기 이르렀다.

이에 김구는 통일된 정부수립을 끝까지 주장하며 남북협상을 진행했다. 남북협상에서 남북지도자들은 남북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이 철수한 후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 직접 비밀투표로 통일된 민주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5월 10일 남한에서는 유엔의 감시 하에 총선거가 진행되고 8월 15일에 정부가 수립됐다. 이어 9월 9일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결국 분단되고 말았다.

이렇게 분열된 나라는 6·25전쟁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낳았고, 70년이 넘도록 대립의 각을 세우고 있다. 최근 들어 북미정상회담이 진행되며 평화의 분위기가 불어오는 듯 했지만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되면서 원상복귀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때에 임시정부의 시기를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까. 임시정부를 세웠을 때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마음에 모였다. 하지만 여전히 신분에 사로잡혀 상민출신이었던 김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김구를 도와준 이가 석오 이동녕 선생이다. 전통 명문가인 연안 이씨 집안에서 자란 그는 유학자였음에도 시대에 따라 깨어있는 정신으로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YMCA운동도 전개하는 등 개화론자의 모습으로 개혁에 발맞춰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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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 선생 생가
 

그런 그는 임시정부의 터줏대감이었다. 그에게 “양반이 어떻게 상민(김구)과 교류하겠냐”는 질문에 이동녕 선생은 “백범은 우직하다. 나를 보고 믿어달라”고 말했다. 그가 바라는 조국의 독립 앞에서는 양반, 상민과 같이 이미 철폐된 신분제는 전혀 필요 없었다. 그리고 그가 믿어 달라고 했던 김구는 오늘날 우리에게 임시정부의 상징이 되지 않았는가.

이들 외에도 폭탄 의거로 목숨을 바친 윤봉길과 이봉창, 가진 재산을 다 처분하고 식솔들과 함께 독립에 투신했던 우당 이회영, 신민회 활동을 했던 도산 안창호 그리고 이름을 남기지 못한 채 조국의 독립 앞에서 스러져간 목숨들이 있다. 그들이 바라고 염원했던 나라를 우리는 제대로 만들어 가고 있는가. 바람 앞에 등불 같았던 그 시기에도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그들을 생각하면 시끄러운 지금의 우리나라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무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김구가 <나의 소원>에서 말했던 높은 문화의 힘은 독립군들이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보여줬던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정신과 더 나은 세상을 후대에 주기 위한 그 마음을 통해 알 수 있지 않을까. 지난 100년의 대한민국을 생각하면서 앞으로의 대한민국을 생각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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