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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담는 그릇

말과 글


글. 백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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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가 왜 민들레인지 아십니까? 옛날 사립문 둘레에 흐드러지게 피어 쉽게 볼 수 있는 꽃이라 하여 ‘문들레’가 ‘민들레’가 되었습니다.”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룬 영화 <말모이>에서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이 자신의 오해로 상처받은 김판수(유해진)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가 문을 사이에 두고 건넨 말이다. 이와 함께 류정환이 덤덤한 목소리로 전한 또 한 마디 말. 그 말이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는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큰 걸음이다.”


조선어학회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는 1921년 12월 3일 우리의 말과 글을 연구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로 현재의 <한글학회>다. <조선어연구회>로 시작됐으며 장지영(張志暎)·김윤경(金允經)·이윤재·이극로·최현배·이병기 등을 회원으로 해 연구발표회와 강연회 등을 갖고 한글의 우수성을 선전해 왔다. 1927년 2월부터 기관지 <한글>을 발간했으며,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에 착수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출판하지 못했다. 이후 1931년 학회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바꾸고 2년 뒤인 1933년에는 오늘날까지도 한글표기의 기준이 되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했다. 1942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될 위기를 맞기도했으나, 해방 이후 1949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사실 조선어학회의 역사는 주시경 선생 등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이전인 1908년 8월 창립된 <국어연구학회>를 그 시초로 볼 수 있다. 이후 <배달말글 몰음> <한글모> <조선어강습원> 등으로 그 명칭이 바뀌면서 1931년 1월 익히 잘 알려진 <조선어학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일제강점기 당시 민족 말살정책으로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1443년 한글이 창제되고 1446년 반포되긴 했지만 ‘국문’으로서 본격적으로 사용한 시점은 1894년 갑오개혁 때부터다. 당시 고종이 공문서를 국문으로 작성하라는 명령이 내려오면서 한글이 본격적으로 사용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강점기를 맞게 되면서 한글을 제대로 연구하거나 보급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말의 우수성을 알리고, 올바른 한글사용을 위한 맞춤법 통일안 마련에 힘쓴 조선어학회의 활동은 민족의 암흑기에 한줄기 빛과도 같았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일제의 통치와 핍박 아래 주권과 자유를 잃어버린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자주독립을 열망해 왔다. 일제는 밟으면 밟을수록 외려 더 분연히 일어나는 우리 민족의 정신과 독립의지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는 1919년 3월 1일 일어난 거국적인 만세운동에서도 엿볼 수 있다. 태극기를 손에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던 민중 앞을 총과 칼로 막아서던 그들이 아니던가. 무력만으로는 식민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낀 그들은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의 뿌리를 말살하기 위한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을 펼친다.

이는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는 것을 넘어 아예 일본의 일부로 만들려는 정책이었다. 이를 위해 1932년부터는 <조선사(朝鮮史)>를 간행하고, 한국인과 일본인이 동일민족이라는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을 주장하고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설을 내세웠다. 일본민족과 한민족은 시조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적자와 서자로서 하나의 조상을 가진 같은 민족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역사를 날조하기도 했다. 일제는 일본 왕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으며, 전국에 신사(神社)를 세우고 매일 정오에 신사를 참배토록 했다. 나아가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1939년부터 이른바 ‘창씨개명’을 강요, 이에 응하지 않으면 취학, 취업, 우편물 이용 등 공공생활을 규제하거나 학대를 가하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일제는 우리의 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철저하게 우리 민족의 정신을 말살시키려 했다. 학교에서는 한국어 교육을 폐지하고 일본어만을 가르쳤고, 일상생활에서도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다. 민간인의 민원서류 등에도 모두 일본어를 사용토록 강요했는가 하면, 한글로 된 신문(동아일보, 조선일보)과 잡지(신동아, 문장)를 폐간시키기도 했다.

조선어학회 사건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은 하나다), 일선동조론(일본과 조선은 조상이 같다), 황국 신민화(일본의 신민으로 만든다) 등 한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완전히 말살시키려는 일제의 억압 속에서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우리말, 우리글을 지키려는 의지는 더욱 커져갔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다.”

누구라도 같은 생각이었겠지만 우리의 말과 글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은 조선어학회 회원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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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김판수(유해진)가 받아쓰기를 하고 있는 모습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로 시작된 조선어 연구회는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조직해 우리말과 우리글을 정리하고 체계화시키는 데 뜻을 모았다. 이를 위해 통일된 표준법과 맞춤법 등이 필요했고, 1931년 조선어 연구회를 이윤재, 최현배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어학회>로 확대, 개편한다.

이후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를 제정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40년에는 <우리말 큰사전> 편찬에 노력을 기울여 1942년 원고를 출판사에 넘길 예정이었으나 조선어학회를 독립단체로 간주한 일제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일제는 이들이 힘들게 모은 원고 2만 6000여 장을 압수했으며, 1942년부터 1943년 4월까지 한글학자 33명을 체포하고 조선어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와 같은 사건의 배경에는 함흥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한국말로 대화하다가 조선인 경찰관인 야스다(창씨개명한 이름)에게 발각돼 취조를 받게된 사연도 깔려 있다. 취조 결과 여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지키도록 교육한 사람이 서울에서 사전 편찬을 하고 있는 정태진임을 파악하고, 1942년 9월 5일 정태진을 연행, 취조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운동을 하는 단체라는 억지 자백을 받아냈다.

일제는 이 사건으로 한글교육 폐지와 조선의 지식인을 모두 검거해야 한다는 자신들 나름대로의 당위성을 갖게 되고, 조선어학회 관련 학자들을 잡아들이는 구실을 삼았다. 이로 인해 1942년 10월 1일부터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고 증인으로 붙잡혀간 사람도 48명이나 됐다. 이들은 검거와 취조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며, 일본 검사가 정한 처벌 수준에 따라 분류돼 이극로・이윤재・최현배・이희승・정인승・정태진・김양수・김도연・이우식・이중화・김법린・이인・한징・정열모・장지영・장현식 등 16명은 기소 처분, 12명은 기소 유예됐다. 기소 처분된 16명은 <치안유지법>을 어긴 내란죄로 몰려예심재판에 회부됨과 동시에 함흥형무소 미결감에 수감됐다. 이들 중 1943년 12월 8일에는 이윤재가, 이듬해인 1944년 2월 22일에는 한징이 옥중에서 사망했고, 장지영・정열모 두 사람은 공소소멸로 석방돼 공판에 넘어간 사람은 12명이었다. 그 결과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정태진 징역 2년, 김범린・이중화・이우식・김양수・김도연・이인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장현식은 무죄가 선고됐다.

“고유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이다.” 유죄가 선고된 이들에게 내려진 결정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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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주도하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곤욕을 치른 생존자들이 1946년 6월에 함께 찍은 사진이다. 앞줄 왼쪽부터 김윤경, 정세권, 안재홍, 최현배, 이중화, 장지영, 김양수, 신윤국, 가운데 왼쪽부터 김선기, 백낙준, 장현식, 이병기, 정열모, 방종현, 김법린, 권승욱, 이강래, 뒷줄 왼쪽부터 민영욱, 박혁규, 정인승, 정태진, 이석린.
 

말과 마음을 모으다 ‘말모이’
영화 <말모이>의 제목 ‘말모이’는 주시경(1876~1914) 선생과 그의 제자 등 언어학자들이 1910년 무렵에 조선 광문회에서 편찬하다 끝내지 못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으로 조선어 사전의 밑바탕이 됐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말모이’는 ‘우리의 말을 모은다’는 뜻으로 일제강점기에 편찬하고자 했던 사전의 이름이자 ‘말을 모으는 운동’이었다.

‘문명 강대국은 모두 자국의 문자를 사용한다’는 생각으로 국어 연구에 박차를 가하던 주시경 선생은 “보아라. 지금 일본이 우리를 침략했으니 앞으로 우리의 근본을 무너뜨리려 할 것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문화요, 그 문화를 지탱하는 것이 언어다. 그러므로 저들은 제일 먼저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앗으려 할 것이다.”라며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를 위해 사전 편찬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말이 모이고, 말이 모이는 곳에 뜻이 모이면, 그 뜻이 모이는 곳에 독립의 길이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말과 글이 없었다면, 아니 이를 잊고 살다, 아예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곧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요, 생명을 잃고 어둠 가운데 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우리의 말과 글에서 나타나는 우리민족의 정체성은 다음과 같은 영화 속 대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외국에서는 나의 나라, 나의 가족, 나의 이웃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우리나라, 우리 가족,우리 이웃이라고 하잖아요. 그게 우리 민족정 신이에요.” 극중 김판수(유해진)가 왜 말을 모으냐는 질문에 조선어학회 회원인 구자영(김선영)이 ‘우리’라는 말에는 공동체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설명과 함께 건넨 말이다. 너와 내가 ‘따로’가 아닌 ‘하나’이며,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삶이자 세상이라는 것.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정신 또한 우리의 말과 글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다. 나 혼자 잘 살기 위한 ‘독립’이 아닌 당연히 우리 모두가 함께 잘 살고 자유를 누려야 하는 ‘독립’이라는 것을 또한 함축한 표현이 아닌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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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의하면 조선어학회가 사전 편찬을 위해 모은 원고는 2만 6000장에 이른다.
 

‘말모이’ 즉 우리말을 모아 사전을 편찬하는 것이 우리민족의 정신을 지키는 일임을 인지한 극중 김판수는 전국 팔도 출생의 깜빵(?)동기들을 모아 전국의 사투리 모으기에 힘을 실어준다. “한 사람의 열 발자국보다 열네 놈의 한 발자국이 더 낫지 않겠어?”라며…. 까막눈이었던 자신이 한 달 만에 한글을 다 떼고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밤새 읽으며 “설렁탕을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못해.

어쩐지 운수가 좋더니만….”이라며 흐느껴 울던 장면은 다시 봐도 웃음과 동시에 감동을 선사한다.

“10년 동안 돈을 모아야지, 말은 모아 뭐해요?” “도시락이든 벤또든 배만 부르면 되지 뭐가 중요하냐”던 그가 말과 글이 ‘정신을 담는 그릇’임을 알게 된 후에는 말을 모으는 일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을 내게 된다. 영화는 이렇듯 곳곳에서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으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에게도 우리의 말과 글이 소중한가요?”

본래 말이라는 것은 뜻을 가지고 있고 그 어원이 있으며, 때에 맞게 사용돼야 한다. 그럼에도 어떤 말들은 알아듣기 어려운 형태로 줄어들거나 아예 새로운 말로 탄생하기도 한다. 이 어려운 말들을 알아들어야 요즘 말로 ‘인싸’가 된다. 인싸는 인사이더(insider)의 줄임말로 무리에 잘 섞여 노는 사람들을 말한다. 물론 ‘인싸’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아싸(아웃사이더)’가 되는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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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화 <말모이>에서 까막눈이었던 김판수가 한 달만에 한글을 깨우치고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읽으며 우는 장면.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지금 들어도 가슴 먹먹해지는 말이다. 2. 극중 김판수(유해진)가 전국의 사투리 모으는 일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전국 팔도 출신의 깜빵(?) 동기들과 함께 조선어학회로 가는 모습. “한 사람의 열 발자국보다 열네 놈의 한 발자국이 더 낫지 않겠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3.영화 <말모이>에서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이 김판수(유해진)의 딸 김순희(박예나)에게 “호떡이 왜 호떡인지 아니? 옛날 오랑캐가 쳐들어왔을 때 그들이 먹던 떡이라고 해서 오랑캐 ‘호’자를 써 호떡이라고 하는 거야”라며 설명해주는 장면 4.영화 <말모이>에서 표준어 제정 공청회를 여는 장면
 


한민족을 한 민족이 되게 하는 힘. 그것이 말과 글에 있음을 알기에, 그 말과 글에 정신이 깃듦을 알기에 목숨까지 바쳐가며 우리의 말과 글을 지켰던 이들. 우리 또한 그 말과 글을 지키고 우리의 정신까지 지켜가는 현대판 ‘말모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말이 오르면 나라가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가 내린다.” 한글 연구의 기초를 세운 주시경 선생의 말이다. 36년의 일제강점기 아래에서도 우리민족의 얼과 정신을 지켜낼 수 있었던 데에는 우리의 말과 글을 지켜낸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조선어학회를 비롯해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려 했던 그 수많은 민중들. 실제로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민중이 말을 수집해 학회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영화에서처럼 사전 원고가 든 가방이 1945년 9월 8일 경성역(서울역) 창고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됐는데, 이는 광복 이틀 전조선어학회 사건 상고심 재판의 증거물로 운송됐다가 방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원고의 발견으로 사전 편찬 연구를 계속 진행할 수 있었고 1957년 6권 발간을 마지막으로 <조선말 큰 사전> 편찬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우리말의 탄생>의 저자 최경봉 교수는 이와 관련 “이 원고를 찾지 못했으면 우리말 사전의 출판까지 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더 길어졌을 문화적 정체로 해방의 의미가 퇴색됐을 수도 있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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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중에 수정한 조선말 큰사전 제5권(1953년). 한글학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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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에서 <조선말 사전> 편찬을 위해 1929~1942년까지 작성한 원고. 조선어학회 사건의 증거물로 일본 경찰에 압수됐다가 1945년 9월 8일에 경성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발견됨. 이 원고를 바탕으로 한글학회에서는 1947년 <조선말 큰 사전> 2권을 간행했으며, 3권부터는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1957년까지 총6권을 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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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발간 한글 제6권 제10호와 11호(1938)
 




“말은 사람의 특징이요,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다. 조선말은 우리 겨레가 반만 년 역사적 생활에서 문화 활동의 말미암던 길용, 연장이요, 또 그 결과이다. 그 낱낱의 말은 다 우리의 무수한 조상들이 잇고 이어 보태고 다듬어서 우리에게 물려준 거룩한 보배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곧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및 물질적 재산의 총목록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 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때라도 살 수 없는 것이다.”


- <우리말 큰사전> 머리말

한편, 한국어는 현존하는 3000개의 언어 중고유의 사전을 가지고 있는 단 20여 개의 언어중 하나이며,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식민지 국가들 중 거의 유일하게 자국의 언어를 온전히 회복한 나라이다.


엉덩이와 궁둥이의 차이를 아시나요?

엉덩이, 엉뎅이, 응디 ≠ 궁둥이, 궁디, 궁뎅이
궁둥이는 엉덩이의 아랫부분으로 앉으면 바닥에 닿는 부분이고 엉덩이는 볼기의 윗부분, 볼기는 뒤쪽 허리의 아래, 허벅다리의 위 좌우쪽으로 살이 두두룩한 부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