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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대로

생각한 대로


신조어, 시대의 거울


글. 이지수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다고
될 수 있다고 그대 믿는다면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그대 생각한 대로 도전은 무한히
인생은 영원히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이적의 <말하는 대로> 가사 일부




변화무쌍한 신조어
언어는 변하고 또 변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롭게 생겨난 단어들은 ‘신조어’라는 이름 아래 사회변화와 시대상을 반영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시대별 신조어의 변화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영역에 걸쳐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광복 직후부터 1950년대 말까지는 38따라지(38선 이북에서 온 피난민들), 골로 간다(죽을 수도 있다), 급행료(일을 빨리처리해 달라고 건네는 돈), 국물(돌아오는 몫이나 이득) 같은 말이 회자됐고 1960년대에는 사쿠라(사기꾼), 낮엔 야당 밤엔 여당(기회주의), 자의 반 타의 반(내 뜻이기도 하고 상대방의 뜻이기도 한 상황) 같은 말이 돌았다.

1970년대엔 뺑뺑이 세대(평준화 이후 고교생), 치맛바람(엄마들의 뜨거운 교육열을 지칭하는 말) 같은 말이, 1980년대엔 큰손(한분야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 심증은 가나 물증은 없다 같은 말이 등장했다.

1990년대에는 신토불이, 신세대, 쉰세대 같은 말이 눈길을 끌었다. 1997년 외환위기 때는 조기(조기 퇴직), 명태(명예퇴직), 황태(황당하게 퇴직), 사오정(사오십대 정년퇴임), 오륙도(오십 대 육십 대에 계속 회사에서 근무하면 도둑놈) 등의 단어들이 등장했다.

지난해는 헬조선(한국 사회 부조리한 모습을 지옥에 비유), 흙수저/금수저(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富)가 사회의 계급을 결정한다는 표현),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청년실신(청년실업자+신용불량자), N포세대(어려운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취업이나 결혼 등을 포기하는 세대) 등 청년실업 등의 문제에 시달리는 20~30대 젊은이들의 암울한 현실을 반영하는 신조어가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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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일자리센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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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어가 가장 활발히 생산된 시기는 2000년대 초반부터다. 인터넷, SNS(Social Network Services, 사회관계통신망) 등을 주로 사용하는 젊은 세대들이 더욱 빠른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또는 마땅히 표현할 말이 없어서 만들어졌다. 신조어가 만들어지는 원리는 다양하지만 주로 줄임말, 초성, 단어 합성과 같은 과정을 통해 탄생한다. 줄임말은 기존의 문장이나 단어를 줄이는 것으로 최근 신조어에선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해진다), TMI(Too Much Information) 등이 그 예다.

초성이란 음정의 처음 소리인 자음을 말하는데 최근 자주 쓰이는 단어의 초성만 떼서 만든 ㅇㄱㄹㅇ(이거 정말), ㅇㅈ(인정), ㅁㅈ(맞아) 등의 신조어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단어 합성은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단어를 합친 것인데 최근 합성어로 이루어진 신조어로는 호캉스(호텔+바캉스, 휴가를 호텔에서 보냄), 톤그로(톤(tone:색조)+어그로(aggro:분쟁), 얼굴에 안 맞는 톤의 화장품을 써서 어색함) 등이 있다.

갈수록 진화하다
“오늘 영화 갓띵작 완전 롬곡 ” “남자주인공 솔까 낫닝겐이야”

한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10대 소녀들의 채팅 대화. 풀이하면 “오늘 영화 신이 만든 명작이야. 완전 폭풍 눈물 흘렸어” “남자 주인공 솔직히 사람 아닐 만큼 잘생겼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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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어는 인터넷, SNS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신조어는 점점 진화하고 있다. 복잡한 구조로되어 있기에 그 뜻을 유추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매일 새로운 단어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해 조금만 소홀해도 따라가지 못한다. 불과 몇 개월 전에 신나게 외치고 다녔던 말도 또 다른 신조어가 나오면 금세 시들해져 잘 사용하지 않는다. 자칫 유행이 지난 단어라도 쓰게 되면 ‘옛날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1020세대 위주로 쓰이지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회 전반적으로 다양한 계층의 신조어들이 등장하면서 하나의 언어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프로야근러(야근을 자주 하는 사람), 직장살이(직장 생활을 시집살이에 빗댄 말), 급여체(급여자들이 사용하는 말), 월급 로그아웃(통장에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카드 값, 세금등으로 다 빠져나간다) 등은 직장인들의 애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신조어들이다. 육아중인 엄마들 사이에서 등장한 ‘맘조어’도 있다. 우래기(우리 아기), 갤(개월), 문센(문화센터), 키카(키즈카페), 얼집(어린이집), 윰차(유모차), 영유(영어유치원), 일유(일반유치원), 남의 편(남편), #G(시아버지), 셤니(시어머니) 등이 있다. “8갤 우래기 문센 추천해주세요” “셤니랑 #G 오셔서 윰차 태우고 키카가요” 등 엄마들 대화는 10대들의 대화 못지않은 해석이 필요하다.

‘거시기’의 반전
당당히 표준어로 인정받은 신조어들도 있다. 스마트폰, 딴지, 개기다, 도긴개긴, 굽신,글발 등이 그렇다. 언어의 변화는 그만큼 빠른 우리 사회의 변화를 말해준다. 복수 표준어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도 중요한 변화 중하나다. 한 가지 뜻을 지닌 다양한 표현을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면 혼란을 일으키기 쉽다는 이유로 단수 표준어만 인정해왔었다. 그러다 2011년 8월 31일 국립국어원이 ‘자장면’만 표준어로 삼는다는 원칙을 바꿔 ‘짜장면’도 복수 표준어로 인정했다. 1986년 외래어 표기법 고시 이후 25년 만에 바뀐 것이다. 인터넷상에서 ‘짬뽕’은 표준어로 인정되는데 왜 짜장면은 안 되냐는 질타가 이어졌고 온라인 청원방까지 생겨 국립국어원이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신조어는 아니지만 사투리가 표준말이 된 경우도 있다. 귀신도 모르지만 전라도 사람들은 다 알아먹는다는 ‘거시기’란 말이 바로 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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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 안 신조어들
 


“계백아, 니가 거시기 해야겄다”(의자왕이 계백에게)
“우리의 전략 전술적 거시기는 한마디로, 머시기할 때까지 거시기한다”(계백의 작전 명령)
“니들 다 들었제? ‘거시기’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할 때까지 총공격은 절대 몬한다카이!”
(첩자의 보고를 들은 김유신)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맞선 최후의 전투를 코믹하게 그린 영화 <황산벌>의 대사 일부다. 이 영화에서 신라군은 백제군의 암호 같은 작전 용어 ‘거시기’를 해독하느라 골머리를 앓는다. 신라군도 해석하느라 애먹었던 그 ‘거시기’는 원래 대표적인 전라도 사투리였지만 온 국민이 즐겨 쓰면서 지금은 당당히 사전에 정식 대명사로 등재돼 우리말을 풍성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신조어이든 사투리이든 결론은 국어의 전통성과 합리성을 지키는 범위에서 어떤 말이 실제로 자주 널리 사용된다면 표준어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글파괴 vs 시대의 흐름
신조어 사용을 두고 ‘아름다운 한글’을 망친다는 우려와 함께 ‘시대의 흐름’이자 우리 사회 현상을 알아볼 수 있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는 의견으로 갈린다. 해마다 생기는 ‘신조어’를 두고 ‘언어파괴’인지 ‘언어진화’인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뜨겁다. 무엇보다 일부 방송에서도 신조어의 남용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능 프로그램은 굳이 음량을 높이지 않고 화면만 봐도 전체 내용의 90% 이상을 이해할 수 있다. 이유는 친절하게도 화면이 바뀔 때마다 출연진의 발언과 행동을 자막으로 고스란히 표기되기 때문. 이 과정에서 출연자가 말하는 신조어와 줄임말, 은어는 고스란히 자막으로 표현된다. 대부분 온라인에서 시작된 신조어들이다. 이것이 쉬지 않고 방송자막으로 이어지면서 오타와 비문이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국민권익위원회가 2014년 7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국민신문고에 접수된 우리말 사용 관련 민원 325건을 분석한 결과 대중매체가 102건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권익위 관계자는 “다수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방송 및 인터넷 등에서 올바른 우리말 표기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016년 발행한 ‘미디어新문맹: 국민의 신조어에 대한 인식 및 수용 행태’에 따르면 미디어에서 사용되고 있는 신조어 100개에 대한 이해 정도는 전체 평균 45.1%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결과는 대중이 TV나 신문, 미디어 매체에 등장하는 신조어에 대해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신조어의 사용은 인터넷과 SNS 사이에서 사용하는 비율이 53.7%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인터넷과 SNS사용률이 적은 노년층과 SNS 사용률이 높은 청년층 사이에서 신조어에 의한 의사소통의 문제는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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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활용법을 배우고 있는 어르신들
 


갈등 부추기는 혐오 신조어
언어의 변화는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필연적일 수 있겠지만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는 의미있는 신조어가 아닌 혐오감을 주는 ‘혐오 신조어’들은 한글 파괴와 오염에 대한 우려를 낳는다. 맘충(아이를 이유로 주변에 피해를 주는 젊은 엄마), 급식충(학교에서 급식 먹는 중고교생들), 틀딱충(틀니를 착용한 노인을 모욕적으로 깎아내리는 말), 지방충(서울 아닌 지방에 사는 사람들) 등은 나와 다르고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벌레로
표현하고 있다.

느개비·느금마(너희 아빠, 엄마를 조롱하는 말), 숨쉴한(한국 남자는 숨 쉴 때마다 맞아야 한다), 한남또·한여또(한국 남자·여자가 또 문제를 일으켰다), 꽁치남(공짜 좋아하고 가성비 따지는 치졸한 남자), 개저씨(개+아저씨, 약자에게 횡포를 부리는 중년 남성), 김치녀(몰상식하고 이기적인 한국 여성) 등 특정 대상을 비하하는 표현이 거리낌 없이 쓰이고 있다.

국립국어원 연구원으로 우리말의 실태를 조사한 허철구 창원대 국문과 교수는 저서 <국어에 답이 있다>를 통해 “여성과 남성이, 노년 세대와 젊은 세대가 서로 공존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경쟁 상대로만 인식하는 결과”라며 “공격적인 혐오 발언 이면에는 어쩌면 경쟁에서 낙오하는 것이 두려운 자신을 지키려는 심리가 깔렸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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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힘
조선의 왕 세종이 우리글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래로 한글은 살아 숨 쉬는 생물처럼 진화를 거듭해 왔다. 예컨대 창제 당시에는 중국어와 비슷한 ‘성조’가 존재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라져갔다. 또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이전에는 없었던 개념이 새롭게 탄생하면서 새로운 단어들이 만들어지고 언어적 개념이 확대되거나 축소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의 ‘혐오 신조어’처럼 부정적인 성향을 가진 단어와 표현을 만들어 내는 일이 얼마나 있었을까.

누군가를 조롱하고 분노를 폭발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신조어가 위험한 까닭은 소통의 수단으로 활용되어야 할 언어가 ‘폭력’이라는 목적성을 띠기 때문. 언어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면 신조어는 그 시대 어떤 갈등이 불거지고 사람들이 어디에 관심을 두는지 보여준다. 패배주의, 타인에 대한 열등감을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가 부정적 신조어를 생산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아닐까.

몇 해 전 <MBC>에서 ‘말의 힘’에 대해 실험한 내용을 방영한 적이 있다. 금방 지은 밥을 유리병에 담은 후 한쪽 병에는 “고맙습니다” “아이~ 이쁘다”라는 긍정의 말을 하고 한쪽 병에는 “냄새날 것 같아” “짜증 나” “미워”라며 부정의 말을 하는 실험이었다. 4주 후 결과는 두 눈을 믿기 힘들 정도로 차이가 분명히 나타났다. 붙은 이름대로 따라간 것이다. 긍정의 말을 들려준 병의 밥은 구수한 누룩 냄새가 났지만 부정의 말을 들려준 밥은 까맣게 썩어버렸다.

사람은 말한 대로 된다. 말은 없어지는 바람소리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생각, 영혼에 화살처럼 꽂힌다. 부정적인 말은 자신과 타인을 어둠에 가둔다. 내일에 대한 희망도, 현실을 극복할 용기를 상실케 한다. 간과해선 안될 것은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처럼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일을 만들며 긍정적인 말은 긍정적인 일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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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MBC>에서 방영한 한글날 특집 실험다큐-말의 힘의 한 장면. 두 유리병에 각각 ‘고맙습니다’ ‘짜증나’라는 단어를 붙이고 4주간 실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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