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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전

백제 무왕을 찾아서


글. 백은영 사진. 글마루 답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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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 가람배치 모형 일부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사귀어 맛동(서동薯: 童)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향가 <서동요>의 내용이다. 비록 서동요가 지어졌을 당시 백제와 신라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더라도 서동과 선화공주에 얽힌 이야기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만큼 대중적이다.
<서동요>는 신라 진평왕 때 백제 무왕이 지었다는 4구체 형식의 향가로 향찰(鄕札)로 표기된 민요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2 무왕(武王)조에 수록돼 있는 서동설화(薯童說話)에 끼어 전한다.

서동설화의 주인공이 백제 무왕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왕족과 평민의 귀천을 넘은, 그것도 국경을 넘은 러브스토리가 지금에 와서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백제 무왕이 서동으로 불리던 소년시절 신라 서울에 들어가 선화공주를 얻으려고 지어 부르던 노래 서동요. 그 노래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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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지 동원 구층석탑과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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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 익산 쌍릉 대왕릉 발굴 작업 중인 모습, 오른쪽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백제 무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뼛조각과 3D 복제품을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다.
 

익산 쌍릉, 대왕릉서 발견된 인골함
지난 4월 전북 익산의 쌍릉(대왕릉, 소왕릉)중 대왕릉에서 108개의 뼛조각이 담긴 나무 상자가 발견됐다. 백제 고분 중 가장 크고 정교해 왕릉으로 추정됐던 곳에서 발견된 인골함은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됐다.

이번에 발견된 인골함은 1917년 일본 학자가 처음 조사한 뒤 100년 만에 다시 발굴해 얻게된 성과 중 하나로 왕릉에서 발견된 인골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법의학 분석 결과에 따르면 뼈 주인은 서기 620년에서 659년에 숨졌고, 무릎 근처 뼈 너비로 미루어 키가 161~170㎝로 평균 이상인 남성이다. 무왕에 대해 “풍채가 훌륭하다”고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또한 연골 등이 굳는 정도로 봤을 때 최소 50세 이상, 60~70대의 노년층 남성이라는 점 등이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등을 통해 드러났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무왕이 서거한 641년과도 비슷하다.

쌍릉의 구조와 규모, 유물의 품격 그리고 국가 위상이나 시대 상황 등을 고려했을 때 왕릉의 주인을 무왕으로 보는 학설에 힘이 실리고 있는 것이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진 소왕릉 발굴도 곧 진행할 계획으로 백제 무왕과 그의 부인이 1400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 만나게 될지에 이목이 집중된다.

이번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표는 관련학계 외에도 일반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워낙 유명한 서동요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믈론 역사적인 배경을 놓고 보면 서동요에 나오는 선화공주는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서동요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흠모한 서동(무왕)이 밤마다 공주가 몰래 나와 자신을 만난다는 내용이지만, 진평왕은 딸만 둘이다. 큰딸이 그 유명한 선덕여왕이고 둘째 딸은 태종무열왕(김춘추)을 낳은 천명 부인이다. 무엇보다 서동설화 속 서동은 과부의 자식으로 신분상 왕이 되기 어려운 위치에 있었다. 또한 서동요의 배경이 진평왕과 무왕시기란 점에서도 서동요의 내용은 의미심장 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이 신라와 백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게 싸우던 시기였다. 서동요의 내용대로라면 장인과 사위가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단 말이 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서동요는 천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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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봉영기(앞면). 백제 무왕 40년 기해년(639)에 사택적덕의 딸인 왕후가 미륵사를 건립하고 탑을 조성 발원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인골함 발견이 주는 의미
“제대로 알아야 한다”

백제 무왕으로 추정되는(거의 확실시 되는)인골의 발견은 이슈가 되기에 충분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저마다 이야깃거리가 됐다. SNS나 블로그 등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만 봐도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를 찾았다.

이미 발표되긴 했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진짜 백제 무왕의 인골이 맞는지, 인골함을 발견했을 당시의 모습은 어땠는지에 대해 말이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이성준 학예연구실장은 “일본은 1910년대 우리의 유적을 ‘갑-을-병-정-’ 순으로 나눠 조사했다. 일본인들이 관광으로 찾기 좋은 곳을 우선순위로 정한 것이다. 쌍릉은 그 기준으로 봤을 때 ‘을’에 속했다”며 “발굴 조사 결과 ‘백제왕릉이라고 믿어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기록했다. 쌍릉이 고조선 준왕의 것인지 아니면 무왕의 것인지에 대한 이견은 이미 100년 전에 정리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7세기 전반 대 무덤 중 가장 크고 가장 공력이 많이 들어간 무덤이다. 7세기 전반에 이런 형식의 무덤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무왕밖에 없다”며 “이번 인골 조사를 통해 역사적으로 (무왕의 것일) 개연성을 더 높였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일제가 발굴 조사 당시 뼛조각을 챙겨가지 않고 인골함에 넣어둔 것이 쌍릉의 주인을 추정하는 데 도움을 준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이성준 학예연구실장은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며 발견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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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작업 중인 미륵사지 석탑의 하단부 모습
 

“일본인들이 뼈를 ‘봉안했다’ ‘안치했다’는 이야기가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발견 당시의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인골함이라는 것이 합판을 잘라서 만든 목재함이었고, 판자에는 연필로 그은 흔적이 있다. 무덤을 발굴하면서 무엇이 나올지 모르니 판자를 준비해서 가지고 다닌 것 같다. 유물을 발견하면 판자를 짜서 반출하려는 목적이었다.

인골함도 자투리 판자를 대충 못질을 해서 만든 것이다.” 애초에 남의 나라 유적을 함부로 반출해 간 것도 잘못이지만, 유적 조사를 했다면 보고서 등으로 상세히 남겼어야 하는데 쌍릉에 대한것은 도면과 사진 2개가 전부다. 인골함이 남아 있다는 것도 최근 발굴 조사 때 알게 된 사실이다.

실제로 발굴된 인골함을 보니 나무판자에 연필로 그은 흔적이 선명했다. 무엇보다 그렇게 대충 만든 인골함에 뼛조각이 담겨 있었다는 것은 뼛조각을 ‘쓸어담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시신이 어떻게 매장되고 안치됐는지 알 길이 없다.

직접 눈으로 보니 누군가 ‘인골함을 두고 가서 다행’이라는 말이 더욱 허망하게 다가 왔다. 일제에 의한 수난의 역사에는 ‘다행이다’라는 말이 절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성준 학예연구실장은 이미 10년 전에가야 순장 인골을 복원한 이력이 있던 터라, 이번에 발굴된 뼛조각을 어떻게 연구하고 조사해야 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덕분에 보다 빠르게 연구 결과가 발표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번에 발견된 인골은 항원, 항습을 위한 별도의 시설에 최고급 재질의 인골함을 만들어 보관할 예정”이라며 “소왕릉까지 다 조사를 마친 후 무왕과 무왕비의 무덤으로 확실히 되고 공감대가 형성되면 그때 다시 안치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 이는문화재청과 협의해서 국민적 관심을 얻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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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던 도중 발견된 사리장엄구 중 청동합의 일부, 오른쪽 - 사리를 담은 그릇(금동제 사리외호와 금제 사리내호)보물 1991호로 지정됐다.
 

백제 최대의 사찰 미륵사지
사찰 발원의 주인공은 누구

우리나라 백제 최대의 사찰로 알려진 미륵사지는 백제 30대 무왕(600~641)에 의해 창건됐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무왕이 왕후와 더불어 익산 용화산(미륵산)의 사자사에 있는 지명법사를 만나러 가는 길에 갑자기 연못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현신하여 이를 본 왕후가 무왕에게 그곳에 큰 사찰을 세워줄 것을 청한 것이 계기가 됐다. 무왕은 연못을 다 메우고 그 터 위에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을 세웠으니 바로 미륵사지다.

미륵삼존을 위해 세 동의 금당, 세 개의 탑을 세웠다. 백제시대의 미륵사는 동서 길이 160m, 남북 길이 150m가 넘는 거대한 규모였다. 금당터에서 출토된 금속 공예품들은 대부분 불교 관련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백제금속 공예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중원 금당터에서 발견된 벽화편들은 백제의 절터에서 벽화가 발견된 매우 드문 사례이며, 연못 터 바닥에서 출토된 목간은 고대 국어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높이 14.24m의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큰 탑으로 국보 제11호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서쪽 면이 무너져 내려 현재 6층까지만 남아 있으며,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석탑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최대 사찰이었던 미륵사지의 3원(三院) 가운데 서원의 금당 앞에있는 탑이다.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던 도중 석탑 1층 가운데 기둥돌(심주석)에서 완전한 형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돼 이목을 끌기도 했다. 사리장엄구에는 금제사리호, 유리사리병, 청동합 6점, 은제관식 2점, 은제과 대장식 2점, 금동덩이(金銅鋌) 3점, 금제 족집게 1점, 유리구슬 외 다수 유물이 있었다.

특히 이 가운데 기해(己亥)년명 탑지를 통해 당시 왕비가 639년(무왕 39)에 탑을 건립하면서 사리를 봉안했음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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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작업 전 익산 쌍릉 대왕릉의 모습
 

사리 구멍의 맨 위쪽에 놓인 사리봉영기의 앞쪽에는 99자, 뒤쪽에는 94자가 새겨져 있는데 앞쪽의 글자에는 주사(朱唦)를 사용해 글자를 더욱 선명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사리 봉영기의 내용은 크게 세 문단으로 이루어졌다. 첫째 문단에는 석가모니와 그가 남긴 사리의 신묘한 힘에 대한 공경을, 둘째 문단에는 기해년(639)에 백제 왕비가 절을 세우고 사리를 맞아들여 모신 내용을, 마지막 문단은 무왕과 왕비의 안녕과 모든 사람의 성불(成
佛)을 기원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바로 여기(사리봉영기)서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가 반전을 맞게 된다. 서동설화에 따르면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미륵사지가 창건된 것이지만, 사리봉영기에 따르면 그 주인공은 선화공주가 아닌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다.

사리봉영기 둘째 문단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서 오랜 세월 동안 선인(善因)을 심으시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를 받으셨다. (왕후께서는)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三寶)의 동량이 되셨다. 때문에 삼가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을어 맞이하셨다.”

이 명문을 두고 많은 학자들은 ‘사택적덕’을 <일본서기>나 부여에서 벌견돼 현재 부여박물관에 보관된 사택지덕비와 연계해 백제 8대 성씨의 하나로 해석했다. 반면 ‘사택(挱宅)’을 사씨(挱氏)가 아닌 사택(挱宅)씨로 봐야 하며, 이는 신라 6부의 하나였던 사탁(挱啄) 혹은 사택(挱宅)과 연관이 있다고 보는 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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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작업 중인 미륵사지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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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 익산 쌍릉 대왕릉 석실 내부, 오른쪽 - 익산 쌍릉 대왕릉 석실 내부에서 발견된 인골함의 모습
 


익산 쌍릉의 주인을 찾아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국립미륵사지유물 전시관을 들러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에 대한 이야기에 흠뻑 취한 뒤 무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나온 익산 쌍릉으로 향했다.

더위가 한풀 꺾인 줄 알았건만 쌍릉으로 올라가는 그리 멀지 않은 길에 벌써 땀이 흥건해 진다. 대왕릉이 보여야 할 곳에 높은 가림막이 세워져 있다. 아직 발굴 조사 중인 터라 무덤 위에도 비닐이 둘러쳐져 있다. 뙤약볕에 발굴 중인 인부들과 조사팀의 얼굴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발굴 조사팀이 나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해 미처 연락을 못한 것이 죄송하던 참이었는데 친절히 맞아주는 모습에 마음 한켠이 뜨거워졌다.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발굴 과정에 인부로 참여해 역사의 진실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모습에도 가슴이 뭉클해 졌다.

“이렇게 큰 돌을 어디서 갖고 왔는지 참말 신기해. 어떻게 여기까지 갖고 왔는지도 볼수록 신기하다니까.”

무덤 속으로 들어와 보라며 손짓하시는 어르신을 따라 살펴본(비록 윗부분만 살짝 보았을 뿐이지만) 것만으로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인골함이 발견된 곳을 볼 수는 없었지만 추가적인 발굴 조사와 더불어 무왕비로 추정되는 소왕릉까지 발굴 조사가 이뤄지고 나면 1400년 전 무왕과 무왕비의 진실에 한발짝 더 다가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비록 무왕비의 주인이 선화공주인지 사택적 덕의 딸인지는 알 수 없겠지만 역사를 찾아나선다는 것은 그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신비롭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