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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군자 아닌 사람은 없더라


글. 이지수 사진. 김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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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본 군자마을(군자마을 제공)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의 뼈를 수고롭게 하며 그의 몸을 굶주리고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행하고자 하는 바를 어지럽게 한다. 이는 이 사람의 마음을 분발하게 하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

<맹자(孟子)>의 <고자(告子)>편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시련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발판이 되고 역경을 이겨내면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담겼다. 이러한 큰 사람을 두고 우리 선조들은 ‘군자(君子)’라 불렀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학문을 닦고 부단히 심신수양을 했던 이유도 군자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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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마을 여름 풍경(군자마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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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마을 가을 풍경(군자마을 제공)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조선은 많은 고귀한 유산을 남겼다. 그중 하나가 바로 선비 정신이다. 어느 시대에나 시대의 한계를 넘고자 한 선비들이 있었기에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선비 정신 그리고 그들의 문화는 어떠했을까. 선비의 숨결이 살아있는 안동 군자마을로 향했다.

군자만 사는 마을
일행을 태운 차는 안동시청에서 도산서원 방향으로 향했다. “저~기 보이는 산이 청량산이에요. 퇴계 이황 선생이 자주 오르내리던 산이죠.” 함께 동행한 김순화 문화해설사가 설명과 함께 청량산(淸諒山)을 가리켰다. 기자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퇴계 이황(退溪李滉, 1501~1570) 선생이 청량산을 무척 아껴 많은 시(詩)를 남겼다는 것을. 후대 사람들은 청량산이 퇴계와 닮았다는 이야기도 한다. 밖에서 보면 온화하고 포근한데, 안에서 보면 그 깊이를 알 수 없고 굽이굽이 기암절 경은 감탄마저 잊게 한다.

청량산은 안동과 봉화의 경계지에 있는데 원효, 의상, 김생, 최치원 등의 명사(名士)가 찾아와 수도했던 산으로도 유명하다. 그 청량산 중턱에 군자마을이 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한옥 기와지붕들이 일행의 시선을 끌었다. 마을 입구 좌우 기둥엔 ‘선경유방 유장백세(善慶有坊 流長百世)’라 쓰여있다. ‘선을 행하고 쌓음으로서 집안 경사가 있고 그 가풍이 영원히 이어진다’는 뜻이다.

군자마을은 광산 김씨 예안파가 약 20대에 걸쳐 600여 년 동안 살아온 마을로 ‘오천유 적지’라고도 불린다. 오천(烏川)은 우리말로 ‘외내’라고 하는데 마을 앞을 흐르는 물이 한줄기 맑은 개울을 이루면서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낙동강과 합류해 기인된 이름이다. 물이 맑을 때 멀리서 보면 물 밑에 깔린 돌이 검게 보인다고 해서 오천이라 했다. 그렇지만 지금 그 외내는 아니다. 안동댐 속으로 사라졌다.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한 문화재를 현재의 자리(와룡면 군자리길 29)로 옮겨 원형 그대로 보존했다. 낙동강은 도산에 와서 절경을 이루는데 이를 도산구곡(陶山九曲)이라 하며 그중 제1곡인 운암곡(雲巖曲)이 곧 군자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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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에 추대된 김해(1555~1593)의
의병부대 활동을 기록한 향병일기(광산 김씨 후조당종택 기탁, 뉴시스 출저)
 


광산 김씨 예안파가 오천에 들어온 것은 김효로(金孝盧, 1454~1534) 때다. 김효로는 슬하에 아들 김연과 김유를 두었다. 김연은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로 나갔고 김유는 형을 대신해 고향을 지키며 가풍을 확립했다. 김유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퇴계 이황과 가까이 지내면서 아들들을 보내 가르침을 받게했다. 김연의 두 아들도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김효로의 손자 김부필·김부의·김부인·김부신·김부륜과 외손자 금응협·금응훈이다. 이들 일곱 종형제는 모두 훌륭한 학자로 성장해 ‘오천 칠군자’로 불렸다. 이곳에서 당대의 도학군자가 줄줄이 나오자 정조 때 안동부사였던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이 마을을 둘러본 후 예안 읍지인 <신성지>에 “오천 한 동네에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 고 감탄하는 글을 남겨 군자마을로 불리게 됐다. 이곳을 ‘군자리’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군자의 마을’ 군자리. 정말 멋있는 이름이다. 모든 선비들이 군자가 되기 위해 수양하고 덕성을 함양하던 시절, 군자 이상의 존칭이 없던 그 시절에 ‘군자들이 사는 마을’이란 이름은 여간 영광스런 찬사가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군자가 되면 더는 바랄 것이 없다고 여긴 그때, ‘군자리’라는 아름다운 이름은 김효로의 예안 입향 이후 불과 3대 만에 듣게 됐다. 오천 칠군자, 그들의 삶이 어떠했기에 ‘군자’라는 존칭을 얻을 수 있었을까.

아는 것을 행하다
오천 칠군자의 행적은 이렇다. 김부필은 호가 후조당(後彫堂)으로 생원급제 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서 생애를 마쳤다. 벼슬 지상주의 시대에 벼슬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퇴계는 자신의 애제자 김부필을 생각하며 시 한편을 짓는다.

後彫主人堅素節 (후조주인견소절)
除書到門心不悅 (제서도문심불열)
坐對梅花氷雪香 (좌대매화빙설향)
目擊道存吟不輟 (목격도존음불철)

‘후조당 주인 본래 절개 굳어
벼슬 내려와도 즐거워하지 않네
눈 속에 매화향기 맡는 모습
마치 온백설자 같은 도인일세.’


퇴계는 ‘목격도존(目擊道存)’이란 시어를 사용하며 김부필의 인품에 대한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목격도존’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목격한 어떤 수사적 설명도 필요없는 그냥 바라보기만 하여도 도가 가득찬 인물 ‘온백설자’를 지칭하고 있다. 퇴계가 자신의 제자인 김부필을 온백설자와 같은 사람으로 평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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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청정
 



<장자>의 <우화(寓話)>에 따르면 공자는 그토록 만나보고 싶어 했던 도인 온백설자가 그의 앞을 지나가자 반기기는 커녕 그냥 지나쳤다. 제자들이 궁금하여 물으니 “그에게 어떤 수사적인 설명도 필요 없이 전신에 도가 가득하여 나타나니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도가 가득하여 굳이 만날 필요가 없어졌네”라고 했다. 이러한 최고의 찬사를 퇴계가 김부필에게 썼다 하니 그가 얼마나 공리(公理)에 초연(超然)하고 깨끗했던 인물인가를 짐작케 한다.

김부필은 역동서원과 도산서원 건립을 주도했다. “스승의 강학터전을 생존하실 때처럼 잘 보존해야 한다”며 편지를 써서 동료들을 독려하고 자신이 먼저 많은 재산을 내놓았다.

김부필이 죽고 율곡 이이는 “1558년 가을 후조당을 도산에서 뵙고 며칠 동안 도학을 토론했는데 그 의리는 정통하고 인에 대한 설명은 원숙했다. 이제 그분이 돌아가심에 도가 없어지고 정의가 사라지게 되었으니 이점을 나는 탄식하고 마음 아파하는 바입니다”라고 했다.

생원시험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양정당(養正堂) 김부신은 44세에 죽었다. 그는 ‘묻혀 있는 학자’라 불렸다. 칠군자 중한 사람으로 존칭을 얻은 것은 결국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점’이 그 주요한 요인이다. 읍청정(挹淸亭) 김부의도 생원시험에 합격하고 벼슬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무슨일에 의문이 있으면 반드시 퇴계 선생에게 묻고 결정했다. 어떤 사람이 퇴계에게 “김부의는 왜 어릴 때부터 과거를 보지 않습니까”하니 답하기를 “그는 아주 착실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역동서원 건립에 적극적이었고 완공후 초대 원장이 됐다. 스승 퇴계가 지명했다.

‘역동서원 초대원장’이라는 명함은 김부의의 인품과 학식을 방증한다. 김부륜의 호는 설월당(雪月堂)이다. 그는 생원시험에 합격해 관직에 나아갔고 훌륭하게 봉직했다. 동복현감으로 있을 때 사비로 800여 권의 책을 사서 학생들을 공부시키는 등 직책에 충실해 주민들이 송덕비를 세워주기도 했다. <성리대전>을 읽고 16세에 퇴계를 찾아가 배움을 청했고 <퇴계언행록>의 기초가 된 <퇴계선생언행차록>이란 책을 남겼다.

산남공(山南公) 김부인은 오천 광산 김씨 최초의 무과급제자로 아버지 김유의 호협한 기상을 물려받았다. 퇴계 제자 가운데 유일한 무과급제자이기도 하다. 그는 특천으로 선진관을 역임하고 1554년 밀명을 받고 북방의 오랑캐를 섬멸했다. 평생 관직생활을 한 그는 무관이면서 언제나 학문에 뜻을 굽히지 않고 퇴계 문하에서 경학을 연구했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아버지로부터 적지 않은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형제, 이웃에 나눠 주고 자신은 청빈한 생활을 한 담백한 인물로 알려졌다. 저서는 <산남집>이 있다. 일휴당(日休堂) 금응협은 진사시험에 합격해여러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서애 류성룡은 아들들에게 “너희들이 <소학>을 실천한 인물을 보려면 금응협을 보라. 그 사람은 <소학> 그대로이며 일언일행이 후세 모범이 되고 용모 단정함과 자품의 순수함과 학식이 뛰어남은 내가 본 바로는 제일이다”라고 했다.

호가 면진재(勉進齋)인 금응훈은 진사시험에 합격해 관직에 나아가 1601년 의흥현감등을 역임했다. 조선 중기 학자 이준(李埈)이 쓴 묘갈명에 “당시 퇴계 문하에 재덕을 겸비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후인들이 깊이와 정확한 지식의 학문을 가진 사람을 논한다면 공을 추대해 앞줄에 세울 것”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소학> 그대로의 인물이란 시대 최고의 찬사였다. ‘동방5현’으로 불리는 인물 가운데 김광필, 정여창, 조광조가 일생동안 소학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고 했으니 당시 소학은 필독의 행동지침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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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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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이 쓴 후조당 현판(군자마을 제공)
 


국난 앞에선 목숨 바쳐
광산 김씨 예안파 사림은 학문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국난 앞에서는 목숨도 바치며 나라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다. 오천 칠군자의 명맥은 그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밖으로는 왜란과 호란을 겪고 안으로는 광해군의 난정(亂政)과 인조반정으로 당쟁이 격화되는 등 나라가 어려울 때 선비들은 학문에만 전념할수 없었다. 김해와 김기는 전쟁터로 나갔고 김령은 불사이군(不事二君,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음)하기도 했다. 특히 김해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의 병대장으로 추대돼 안동, 예천, 군위 등지에서 활약하다 39세 나이로 경주에서 전쟁 중 병사했다.
이러한 가풍은 항일 우국지사 김남수까지 이어졌다.

이들의 활약은 김해와 김령, 김광계와 김염, 김선 그리고 김순의까지 4대에 걸쳐 120년간 기록된 일기에 남아 있다. 일기에는 전쟁, 당쟁 등 대내외적 격동기 사회를 산 선비의 일상이 담담하게 녹아있다. 후대에 퇴계 이황의 9세손인 이야순은 이들을 가리켜 ‘오천25현’이라 명명하고 이 가문이 쌓아온 업적과 적선의 미덕을 높이 평가했다.

전통 고택과 정자들
군자마을은 일행의 시간을 수백 년 전 조선시대로 돌려놓았다. 오래된 정자와 고택의 정취가 포근하게 사람을 감싸 안는다. 한옥의 날렵한 처마 곡선이 맑은 여름 햇살을 받아 빛나면서 한층 운치가 더해졌다. 안동댐 건설로 운암곡에 정착하면서 예전 풍광은 사라졌지만 한옥을 거의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옮겨와 오히려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멋이 느껴진다. 이곳에 가장 대표적인 건물로는 국가지정 문화재인 후조당과 탁청정을 꼽을 수 있다.

군자마을 가장 높은 곳에 후조당이 자리하고 있다. 16세기 중엽 김부필은 조부의 낡은 집을 고쳐 공부할 공간을 만들고 자신을 호를 따서 이름을 붙였다. 퇴계는 자신이 아끼는 제자를 위해 손수 후조당의 현판을 써줬는데 별당 대청에는 퇴계의 친필 현판이 아직도 당시 모습 그대로 걸려있다. 후조당 툇마루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오천리 마을이 한눈에 들어와 전망이 탁월하다. 또 하나의 백미는 탁청정(濯淸亭)이다. <수운잡방>의 저자 김유가 1541년에 세운 정자로, 영남지방의 개인 정자로는 구도가 가장 웅장하고 우아하다는 평이다. 편액 글씨는 한석봉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한호(韓濩)의 작품이다. 현재 걸려 있는 편액은 복제품이고 원본은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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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마을 봄 풍경(군자마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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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마을 겨울 풍경(군자마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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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당 올라가는 계단
 


군자가 되는 길
주자(朱子)는 “선비란 학자를 일컫는 말”이라고 했고 다산은 “선비란 도(道)를 배우는 사람”이라 했다. 선비가 학문을 닦는 이유는 곧 유교에서 말하는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격자의 모습을 갖춘 군자가 되기 위해서다. <예기(禮記)> <곡례(曲禮)>편에서는 군자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선한 행동에 힘쓰면서 게으르지 않은 사람’ 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에서는 ‘군자는 식사하는 데 배부
르기를 바라지 않고 거처하는 데는 편안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일에 민첩하고 말에 조심스럽고 인격을 갖춘 사람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로 잡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묵자(墨子)의 <수신(修身)>편에는 ‘군자는 신변을 잘 정리하고 실행에 힘쓰며 늘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정리하고 있다.

퇴계에게서 전수받은 학문은 광산 김씨 예안파 가학(家學)의 기반이 됐다. 충효를 바탕에 두지만 벼슬에 연연하기보다 자연과 하나 돼명예와 이익을 멀리한 처사형(處士型) 사림(士林, 성리학자)이었다. 충효정신을 바탕으로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자기 수양에 골몰한 오천 칠군자의 삶. 그들이 ‘군자’의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벼슬과 부귀에 집착하기 보다는 학문에 정진하며 배움을 쉬지 않고 무엇보다 배움을 실천하는 삶
을 살았기에 가능했다.

지이행난(知易行難). 아는 것은 쉬워도 실천이 어렵다는 의미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것. 학문을 통해 얻은 수많은 가르침과 자신이 하나가 되기까지 노력을 쉬지 않았던 오천 칠군자. 그들의 모습은 실천하는 지성인을 찾기 어려운 오늘의 현실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