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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어린용사는

총을 들었다


글. 이지수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고 자랑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누구를 원망하거나 후회해본 적은 더더욱 없다. 우리는 그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그렇게 했다. 내 살던 나라여 내 젊음을 받아주오. 나 역시 이렇게 적을 막다 쓰러짐은 후배들의 아름다운 날을 위함이니 후회는 없다.” -6·25전쟁에서 전사한 한 무명 학도병의 일기 中-

6·25전쟁이 터지자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펜 대신 총을 들고 ‘학도의용군(학도병)’으로 나섰다. 방방곡곡 ‘조국이 부른다’는 격문이 붙었고 새파란 청춘, 파닥이는 목숨을 걸고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다. 피가 흙이 돼 들꽃을 피우고 지기를 반복한 지 68년. 전장을 누볐던 어린 용사들 중 살아남은 이들은 어느덧 백발노인이 됐다. 그들이 지켜낸 조국은 그동안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분단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상당수는 죽어서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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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건너는 피난민들
 


작전명‘ 폭풍’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모두가 잠든 그 시각 북한군은 ‘폭풍’이라는 명령으로 전쟁을 개시하며 38선을 넘어 남쪽을 공격해왔다. 개전 3일 만인 28일, 수도 서울이 함락됐다. 북한군은 10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1개 기계화 부대 등 총 19만 8380명의 병력과 150여 대의 T-34 탱크, 200여 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남한은 무기와 병력 모두 열악했다. 당시 대한민국의 병역법은 만 17~28세까지 군사교육이나 청년단체에서 훈련을 받은 자를 병사로 모집하게 돼 있었다. 게다가 미군정청이 정한 국군 10만 명 정원제에 묶여 징병제가 지원제로 바뀌었다. 병역업무를 담당하던 육군본부병무국과 병사구사령부도 해체돼 병사를 징집할 기구가 없어졌다. 정치, 경제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10만의 병력을 갖추긴 했지만 8개 사단 중 4개 사단은 38선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공산당 게릴라를 척결하는 군사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무기도 고무 타이어로 된 경장갑차 27대와 포 700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정부는 기한 없이 피난길에 올랐다. 국군은 급기야 한강 인도교를 끊고 한강 방어선에서 1주일을 버텼다. 하지만 북한의 탱크를 막아내지 못했고 연이어 남쪽으로 밀려 내려갔다. 이러한 국가의 존망이 일각에 놓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분연히 일어난 이들은 어린학생이었던 학도병이다.

“오늘부터 펜을 총으로 바꾸어 대한민국의 초석이 되겠다.”

-제1차 지원병 입대 축하식
학도병 대표 선서문 중에서-


학도의용군의 모태, 비상학도대
학도병은 개전 3일 만에 탄생했다. 1950년 6월 28일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을 받은 ‘비상 학도대’가 200여 명의 인원으로 수원에서 조직됐다. 이들은 주로 후방에서의 선전활동과 피난민 구호, 피난 학생들의 규합 등의 임무를 맡았지만 일부 인원은 총과 실탄을 지급받고 노량진 방어선 실전에 투입됐다. 학도병들의 첫 전투 투입이었다. 이로써 학생들의 종군이 시작됐고 이는 학도병의 모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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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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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법정대학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7월 4일 대전에서는 700여 명의 ‘의용학도대’가 편성됐으며 학도병 모집 등 선전활동에 주로 투입됐다. 이들은 정부와 아군을 따라 대구로 이동했고 이곳에서 ‘비상학도대’와 ‘의용학도대’ 두 조직이 만나 하나로 합쳐 ‘대한학도의용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비슷한 시기 부산에서도 ‘대한학도의용대’가 생겨났는데 두 조직은 서로 관계가 없고 이름만 같았다. 그러다 정부가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두 대한학도의용대가 통합되면서 본격적인 학도병들의 출정이 시작됐다.

일본에서도 대한민국거류민단 재일 한국인청년들을 한국전쟁에 참전시키기 위해 ‘자원병 지도본부’를 설치했다. 지원자가 1000명이 넘었고 이들 중 642명이 선발돼 5차에 걸쳐 대한민국으로 들어왔다. 학도병들은 국군 10개 사단 및 예하부대에 배속돼 미숙한 군사적 숙련도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전쟁의 고비마다 놀라운 성과들을 만들어냈다.

71명이 지켜낸 11시간
전쟁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북한은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남한 90%를 점령했다. 한반도의 10%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면 북한군이 부산까지 진격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 낙동강을 진입하는 요충지가 포항이다.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 사수를 위한 포항전투는 큰 규모의 교전 중 하나다. 이 포항전투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들이 있다. 바로 71명의 학도병이다.

당시 UN 연합군이 도착할 때까지 낙동강을 수사해야 했던 국군은 포항여자중학교에 71명의 학도병을 두고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피난민도 군인들도 모두 떠나버린 텅 빈 포항에서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이들은 3사단 소속 학도병들이었다. 7월 말 대구에는 ‘조국을 사랑하는 학도여! 조국의 운명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 가자! 김석원 장군 휘하로!’라는 학도병을 모집하는 격문이 곳곳에 나붙었다. 이를 보고 16세의 중학생에서 24세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87명이 자진 입대했다. 이들 가운데 71명은 김석원 장군이 수도사단장에서 3사단장으로 전보된 사실을 알고 경북 의성에서 포항으로 이동했다. 당시 북한군 5사단과 766유격대는 포항 공격을 위해 남하하고 있었다. 국군 3사단은 이 같은 긴박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전방지휘소를 장사동으로 철수하고 8월 10일 학도병들을 M1 소총으로 무장시켜 독립중대로 편성하고 후방 지휘소인 포항여중으로 이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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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은 다음 날 새벽에 시작됐다. 학도병 71명은 스스로 2개 소대를 편성해 11시간 동안 북한군 766유격대 수백 명의 침공을 저지했다. 무려 네 차례의 파상공격을 막아내는 사이 실탄은 바닥났고 이들은 마지막 수류탄을 던진후에 적들과 치열한 백병전(白兵戰)을 벌였다. 48명 전사, 4명 실종, 13명이 포로가 됐다.

결국 포항은 북한군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영일만에 접근 중이던 미 군함 헬레나의 함포사격과 미군기들의 공습으로 북한군은 포항 점령 3시간 만에 퇴각했다.

이후 포항은 아군과 적군의 치열한 격전장소로 바뀌었다. 이러한 혼란이 있기 전 학도병들이 적의 포항 침입을 막아냈기에 3사단은 철수를 완료했고 포항시민들은 700여 척의 선박을 통해 안전하게 영일만에서 철수할 수 있었다. 8월 14일 포항 수복 후 간부 3명과 민간인 5명이 현지에 도착해 5시간 동안 시신을 수습하고 임시로 매장했다. 이들의 주검 앞에는 다음과 같은 표지판이 붙었다.

“여기 장렬히 싸우다 잠든 48구의 학도병이 있음. 후일 다시 찾을 때까지 누구도 손을 대지 말 것”
-국군 제3사단장 백-

당시 포항여중 전투에서 전사한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도병의 시신을 수습하던 중 그의 품에서 발견된 편지 속 구구절절한 내용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눈시울을 적신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 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어머니!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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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산호 2. 1950년 학도의용군(영덕군청 제공) 3. 6・25전쟁 시 장사상륙작전(영덕군청 제공)
 


편지에는 당시 16세의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해 동족에게 총구를 겨눠야 했던 아픔과 인간애, 죽음에 대한 공포,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또 편지를 쓴다던 그는끝내 펜을 다시 들지 못하고 포항여중 앞 벌판에서 전사했다.

작전명‘제174호’
1997년 3월 6일 경북 영덕군에 장사리 앞 해안을 수색하던 해병대가 배 한 척을 발견했다. 2700톤의 거대한 선박이었다. 배 이름은 문산호. 그 안에는 이름 없는 부식된 유골들이 가득했다. 문산호가 발견되면서 세상에 비밀 하나가 공개된다. 동해 연안 자그마한 갯마을에서 68년 전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1950년 8월 대적 공작대장 임무를 수행하던 이명흠 대위(육사 5기)는 유격대를 미리 후방에 침투시켜 전선을 교란하는 북한군의 전법을 염두에 두고 국군도 이러한 유격대를 조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대위는 육본 작전교육 국장인 강문봉 대령을 찾아가 겨우 허락을 받고 700명이 넘는 부대원을 모았다. 이 중 90%가 학도병들이었다. 이 부대 명칭은 독립 제1유격대대. 처음에는 부대장인 이명흠 대위의 이름 중 ‘명’ 자를 따서 ‘명부대’로 불렸고 현재까지도 이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제1유격대대는 8월 31일 부산에 도착해 10일 간 훈련을 받았다. 단순히 군사학, 병기 조작, 사격술 등 유격 전술훈련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이념이나 민족문화사 등 정신교육도 받았다. 엄청나게 급박한 전황을 생각한다면 상대적으로 매우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셈이다. 이들이 이런 고강도 훈련을 받은 이유는 명백했다. 매우 중요한 임무에 이들을 투입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바로 ‘장사상륙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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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꼭 잡은 생존 학도병들
 

전쟁 판도를 바꾸다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생각해낸다. 성공률 1/5000이라는 도박과도 같은 작전이었다. 작전 성공을 위해 먼저 교란작전을 펼쳤다. 원산, 군산, 주문진 등에 상륙한다고 거짓 정보를 흘렸다.

그리고 작전 하루 전날, 북한군의 시선을 완전히 돌리는 양동작전으로 ‘장사상륙작전’을 개시한다.

이 양동작전 임무가 독립 제1유격대대에게 하달됐다. 매우 중요한 작전이지만 10일간 훈련 받은 학도병들을 데리고 상륙작전을 감행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전력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투입된 상황. 이들 외에 투입할만한 독립부대가 없었다.

770여 명의 제1유격대대 소속 10대 소년들은 장총과 단 3일간의 보급품을 받은 채 LST(상륙함) 문산호에 올랐다. 작전명 제174호. “동해안 영덕군 남정면 장사동 해안에 작전 상륙을 감행해 북한군 제2군단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 후방을 교란하라.”

작전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9월 15일 새벽 5시 문산호는 포항 장사리 해변 앞바다에 도착하지만 갑작스런 태풍 ‘케지아’의 영향으로 좌초돼 많은 학도병이 배와 함께 수장되고 만다.

나머지 학도병들은 10시간 고군분투 끝에 간신히 육지에 도착했으나 북한 2개 사단 정예부대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돌아갈 배도 없고 뒤로는 바다, 앞으로는 북한 정예부대.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고 끝끝내 고지를 탈환, 북한군의 보급로와 퇴각로를 차단했다. 극한상황에서 출정 당시 받은 3일치 식량인 건빵 한 봉지와 미숫가루 세 봉지로 8일간 버텼다. 학도병들이 얼마나 열심히 싸웠던지 북한군은 대규모 부대가 상륙한 것으로 오판해 장사리로 병력지원을 요청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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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화하는 생존 학도병
 

희생은 컸다. 임무를 모두 마친 학도병들은 배가 없어 장사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고립된 이들을 구하기 위해 구조선을 보냈지만 북한군의 총공세에 승선을 완료하지 못한 채 배는 회항해버렸다. 그 결과 총 772명 중 139명 전사하고 92명이 부상을 입었고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행방불명 됐다. 다음 날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고 수도 서울을 되찾게 되면서 전쟁의 판도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결정적 계기를 만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는 양동작전에 투입된 학도병들의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비밀작전이라는 이유로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장사상륙작전. 1997년 3월에서 갯벌에 묻힌 문산호가 발견되면서 알려졌고 장사 해안에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이 조성됐다.

“역사는 우리를 기억해 줄 걸세”
6·25전쟁으로 남한과 북한에서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산업시설과 건물, 도로, 교량 등이 거의 파괴돼 온 국토는 초토화돼 큰 피해를 입었다. 모든 것을 잃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다. 동족끼리 총칼을 겨눴던 비극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한 비극의 한 가운데 10대 소년들은 겨우 총 쏘는 법만 익힌 채 전장에 투입됐고 많은 이들이 희생됐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당시 17세 이하의 나이로 현역 정규군에 편성돼 전쟁에 참전한 소년병은 2만 7030명으로 이 가운데 2573명이 전쟁 중 사망했다. 현재 생존자는 약 5천여 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 전사자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많은 학도병이 군번 없이 학생 신분으로 전장에 나갔기 때문에 파악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참전 당시 기록이 부족하다는 이유다. 그러나 역사는 단지 과거가 아니다. 역사는 오늘을 있게 하고 또한 우리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그러하기에 그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알아내려고 하는 노력은 치열할수록 의미 있는 일이다. 하루빨리 더 많은 자료를 발굴하고 정리하는 데 힘써 아직도 어딘가 차가운 흙 속에 묻혀 있을 학도병 전사자들의 유해를 찾아내고 생존자들에 대한 예우를 강화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닐까.

68년이 지났지만 생존한 학도병들의 기억은 마치 어제와 같다. 김영택 대한민국학도의용군회 회장이 어느 책에 남긴 서평 몇 줄이 가슴을 울린다.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학교 운동장에 말뚝처럼 결연한 자세로 서 있던 학우들을…. 모두의 표정에는 비장미가 흐르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슬프기까지 했던 나의 전우들. 이 보게들 나만 살아남아서 미안하네. 너무 슬퍼하지는 말게. 사람들이 모두 잊어버리더라도 역사는 우리를 기
억해 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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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을 찾은 한 시민이 참배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