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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대로 산다

과천(果川),

열매 맺는 맑은 내


글. 백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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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대로 산다.’는 말이 있다. 이름이 그 사람의 삶에 상당 부분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이유로 옛날에는 가족 외에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자(字)나 호(號)를 만들어 불렀다. 그만큼 귀하고 소중하게 다뤘던 것이 바로 이름이다. 비단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만물에 붙는 그 이름 하나 하나가 바로 만물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어느 하나 허투루 지어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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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 참성단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있는 ‘참성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단군왕검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고려 및 조선 시대에도 이곳에서 하늘에 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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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청계산
 



풍수지리와 이름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풍수지리를 중요하게 생각해 산세(山勢)·지세(地勢)·수세(水勢) 등을 판단해 이것을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연결시켰다. 풍수의 자연현상과 그 변화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영향을 미친다는 설(設)로 풍수지리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묘(墓)자리를 잘 써야 후손이 잘된다.’는 말이 생긴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여기서 ‘풍수’란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로 장풍은 감출 장(藏)을 써서 바람을 ‘갈무리한다’ ‘저장한다’ ‘막는다’ 의미를, 득수는 얻을 득(得)을 써서 ‘사람에게 생명이 되는 물을 얻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풍수지리는 바람을 감추고 물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 문헌에서 풍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탈해왕에 관한 대목이다. 왕이되기 전 호공(瓠公)으로 있을 때, 산에 올라 현월형(弦月形: 활시위 모양)의 택지(宅地)를 발견하고 속임수를 써서 그 택지를 빼앗아 후에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외에도 백제가 반월형(半月形)의 부여(扶餘)를 도성(都城)으로 삼은 것도, 고구려가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도 모두 풍수사상에 의한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것도 개경(개성)은 이미 지기(地氣)가 다해 왕업(王業)이 길지 못할 것이라는 풍수가들의 의견에 따른 것이다.

이처럼 풍수와 지리, 이름 등을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던 만큼 각 지명이 갖는 이름의 의미 또한 각별하게 여겼다. 주변의 지세와 풍광에 따라 고개나 산, 천(川)의 이름이 지어졌으며, 시대에 따라 부르는 이름은 변해도 그 의미는 크게 변하지 않는 것이 지명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해 뜨는 곳‘ 동방’
“무릇 사람은 맑고 밝은 기운을 받아서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맑고 밝은 빛이어야 하고, 만약에 하늘이 조금만 보이는 곳은 결코 살만한 곳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들이 넓을수록 그 터는 더욱 좋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해와 달과 별빛이 항상 환하게 비치고, 바람과 비와 차고 더운 기후가 고르게 알맞은 곳이면 인재가 많이 나고 병 또한 적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1690~1756)이 저술한 <택리지>에 나오는 말이다.
해와 달과 별이 항상 환하게 비취는 곳이야 말로 항시 밝은 빛이 있는 곳이니 굳이 설명을 더하지 않아도 살기 좋은 곳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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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혜화동 대학로에 설치된 타고르의 흉상
 



예로부터 ‘동방(東方)’이라 불리는 나라가 있다. 동방의 하얀 나라로 불리는 곳, 바로 대한민국이다. 동방이란 지리적으로 ‘동쪽에 있는 나라’ ‘우리나라를 스스로 이르는 말’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갖고 있지만, 보통 ‘해가 뜨는 곳(나라)’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다시 말해 ‘인류의 희망’ ‘새로운 시작’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의 시인이자 사상가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는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를 통해 조선(이 또한 ‘해가 뜨는 이른 아침의 나라’라는 뜻)은 일제강점기의 암흑 속에서도 다시금 빛을 발하게 될 거라는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

동방의 등불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등불이 되라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롭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는 곳
무한히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
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동방의 등불>은 1929년 4월 2일자 <동아일보>에 발표된 것으로 처음에는 4행만이 발표됐다. 이후의 구절들은 타고르의 서정시집 <기탄잘리>에 실린 35번째 시이다. 이 시는 한국 민족문화의 우수성과 강인하고도 유연한 민족성을 ‘동방의 등불’로 표현해 당시 일제 식민치하에 있던 한국 민족에게 큰 격려와 위안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편에는 고조선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위서(魏書, 중국 고문헌)에서 말하기를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아사달 산에 도읍을 세우고 개국을 하니 이름이 조선이요, 중국의 요와 같은 시대이다. 옛 기록에 말하되 ‘옛날 하느님(환인)의 서자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가고자 하므로 아버지가 자식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홍익인간을 할 만하므로 하늘 도장 세 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환웅은 3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 내려왔으니 이것이 신시요 이분이 환웅 천황이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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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이형 토기
산동반도에서 발굴된 고조선족의 팽이형 토기와 아사달 모양(네모 안). 아침 단(旦)을 나타내는 그림 아래 산(당시에는 '달'이라고 불렸음)이 그려져 있다. 중국 측은 기원전 4300년 ~ 기원전 2200년의 유물로 추정한다. (사진. 신용하 교수)
 



단군이 처음 도읍을 정한 아사달(阿斯達)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設)이 있는데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먼저 이병도 박사는 ‘조선(朝鮮)’의 뜻을 ‘아사달(아사: 아침, 달: 땅)’의 뜻과 같은 ‘아침 땅’으로 봤다. ‘조선’을 ‘아사달’의 한자 번역으로 본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중국 발해만 연안의 홍산 유적지에서 원과 삼각산과 파도문의 그림이 그려진 토기와 관련된 것으로 이를 아사달의 그림 글자로 보는 설이다. 이 설에 의하면 원은 해, 삼각산은 사람(생명이 있는 모든 것), 파도문은 땅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 아사달은 ‘하늘, 사람, 땅’ 즉 천지인(天地人)을 의미한다.

노대홍 천지인문화연구원 원장은 아사달을 ‘처음 땅, 새 땅, 처음 산, 새 산’을 뜻하는 고대어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 이유로 아사달의 ‘달’이 고대어로 땅이나 산을 뜻한다고 본 것이다. 양달이나 응달이 그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또한 ‘아사’는 일본말의 아사(アサ)와 같은 말이기도 하고 국호인 조선의 ‘朝’와 관계되는 말이므로 한때 굉장한 설득력을 가진 해석으로 유력했지만 일본말 아사(アサ)가 우리의 고대어 ‘시(아시: 애벌, 애초의 뜻)’에서 나온 말이므로 우리 고대어의 어원을 일본말에서 따왔다는 말은 본말전도라고 주장했다. 여러 설이 있긴 하나 종합해보면 아사달은 순우리말로 ‘처음 땅’ ‘으뜸가는 땅’ ‘새로운 땅’ 이라는 신성한 종교적 의미를 품고 있다.

해 돋는 고을‘과천(果川)’예로부터 과일나무 잘돼
‘조선’처럼 ‘해 돋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지명을 찾아보니 그 대표적인 곳이 지금의 경기도 과천이다.

과천은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의 영역이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역이었다가, 장수왕의 남하로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고구려 당시(475~551년)에는 ‘동사힐(冬斯 )’ 또는 ‘율목(栗木)’으로 불렸는데 <삼국사기>지리지에 나오는 이 지명들이 문헌에 나타난 가장 오래된 지명이다.

‘동사힐’에서 ‘힐’은 고구려 때의 지명들을 보면 그 뜻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당시 고을 이름들의 끝 음절이 홀(忽)인 것을볼 수 있는데 이는 ‘고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고을 이름에 ‘을’ ‘힐’ 등이 들어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역시 ‘고을’이라는 뜻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또한 ‘동사힐’을 ‘돗골’로 보기도 하는데, 여기서 ‘동사(冬斯)’를 ‘돗(돋)’의 음차(音借)로 보고, ‘힐’을 고구려말의 ‘흘(고을)’로 보아 ‘골’로 취해 ‘돗골(돋골)’ 즉 ‘해 돋는 고을’이라는 뜻을 가진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해’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예로부터 우리 민족에게 있어 밝은 해는 대우주와 하늘 그리고 더 나아가 천제인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뜻을 대행해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를 상징하곤 했다. 이러한 사실은 환인과 환웅, 단군이 등장하는 건국시조 이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먼저 환(桓)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명’을, ‘단(檀)’은 ‘땅의 광명’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외에도 천제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햇빛을 받아(알에서) 태어났으며, 붉고 큰 알에서 태어난 신라 시조 박혁거세까지 모두 다 ‘해’를 상징했다.

즉 우리 민족에게 해는 천제의 뜻을 받아 모든 생명을 살리는 이상적인 지도자의 상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해 돋는 고을’이라는 과천은 천제 즉 하나님의 뜻을 받아 천하를 다스릴 지도자의 출현을 고대했던 선인들의 지극한 바람이 담긴 지명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과천의 옛 지명으로는 ‘율목(栗木)’이있다.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밤나무’로 이를 근거로 과천의 옛 이름을 ‘밤나뭇골(밤나모골)’로 보는 이들이 많다. 언어학자 서정범 박사는 ‘율목’의 ‘목(木)’을 ‘걸’ 또는 ‘글’로 해석해 동사힐의 ‘힐’, ‘율진(栗津)’의 ‘진(津)’과 대응된다고 봤다. 그 이유는 ‘진(津)’을 ‘천(川)’과 ‘양(梁)’의 훈(訓)으로 보면 ‘걸(거랑)’이고, 이것이 ‘글·그루’의 음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율목(栗木)’을 ‘밤나미’의 훈차로 보는 학자도 있다. 그리고 그 ‘밤나미’는 ‘받나미’의 전음(轉音)으로 보고, 이를 ‘산 넘음’의 뜻으로 보았다. 즉 ‘율목’은 산을 넘어간다는 뜻인 ‘받남이’에서 온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다수의 학자들은 이를 과천 고을이 남태령과 같은 큰 고개를 넘어 들어오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여기서 ‘받남이’란 받(山: 뫼 산)과 남이(踰: 넘을 유)로 ‘받남이>받나미>반나미>밤나미’로 전음된 것으로 본 것이다.

과천은 신라 35대 경덕왕 때에 율진군(栗津郡)이 되고 고려 초(940)에 이르러는 과주군(果州郡), 이후 조선 3대 태종 13년(1413)에 지금의 이름인 과천(果川)이 된다. 관악산과 청계산에 감싸인 아늑한 분지에 자리한 과천은 그 지형적인 좋은 조건 때문인지 예로부터 과일나무들이 잘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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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군명(郡名)은 율목군(栗木郡), 동사힐(冬斯肹)이라고 한다.” 권8. 1530년),
<동국여도> 중에서 경기전도. 1800~1822년에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천과 청계산이 표기돼 있다. (사진: 고려대학교박물관)
 



이외에도 흥미로운 이름을 가진 마을이 몇 있는데 그중에는 ‘글의 바탕’이 되는 문원동(文原洞), 청계산 정상에서 맑은 시내가 흘러내린다고 해서 ‘맑은내’로 불리던 ‘막계천(莫溪川)’과 이 내(川)의 이름을 따서 ‘막계’로 이름 붙은 막계동, 과거 막계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으나 서울랜드가 들어서면서 없어진 갱맹이(光明, 광명) 마을 등이 있다.

험하지만 아름다운 관악산
효령대군 수행했던 연주암

“산은 관악으로 이어져 평야를 둘렀고 물은 청계로 내려가 큰 하수로 들어간다.”

<여지승람>에 실린 변계량의 시다. 변계량은 과천에 있는 산천의 풍기를 보고 그 수려함에 심취해 문장을 지었다. 선인들은 산천의 맑고 수려함 어둡고 흐린 정도에 따라 사람의 품성에 차이가 난다고 생각했다. 우리 민족에게 산은 민족의 발생 즉 새로운 민족의 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기를 베풀고 만물을 새로나게 한다는 의미로 ‘베풀 선(宣)’ 또는 ‘낳을 산(産)’ 이라는 음을 취해 썼던 한자 ‘산’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험하고 아름다운 산은 예로부터 신성시되었다. 관악산 역시 ‘악(岳)’자가 들어간 산답게 그 높이에 비해 온갖 모양의 바위들이 많아 오르기는 험한 산이다.

하지만 산이 험하기만 하면 어디 산이라 할 수 있겠는가. 산이라면 모름지기 오르는 맛, 구경하는 맛 즉 풍광이 좋아야 한다. 관악산이 딱 그런 산의 면모를 갖췄다.

변계량이 심취해 문장을 지었던 관악산(冠岳山)은 개성 송악산(松岳山), 가평 화악산(華岳山), 파주 감악산(紺岳山), 포천 운악산(雲岳山)과 함께 경기도 오악(五岳)의 하나로 불렸다.

빼어난 수십 개의 봉우리와 바위들이 많고 오래된 나무와 온갖 풀이 바위와 어우러져 철따라 변하는 산의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고 해서 소금강(小金剛)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西金剛)이라고도 불린다.

관악산의 줄기는 과천 청계산을 거쳐 수원의 광교산에 이르며, 관악산의 정상이 마치 큰 바위 기둥을 세워 놓은 모습처럼 보여 ‘갓 모습의 산’이라는 뜻의 ‘갓뫼(간뫼)’ 또는 ‘관악(冠岳)’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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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연주대
 




관악산에는 죽순이 솟아오른 듯한 모양을 한 기암절벽 위에 석축을 쌓아 만든 연주대(戀主臺)라는 암자가 있고, 또 관악산 연주봉 남쪽에 자리 잡은 연주암이라는 사찰이 있다. <연주암 중건기> 등의 자료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677년 의상대 아래 관악사를 창건했으며, 조선 태종 11년 동생인 충녕에게 왕위를 양보한 양녕 대군과 효령대군이 이곳에 머물며 현재의 위치로 관악사를 옮기고 연주암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설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연주대는 조선 초기에는 ‘염주대(念主臺)’로 칭했는데 ‘군주를 생각한다’는 의미다. 대웅전 앞에는 높이 4m의 고려시대 양식을 한 연주암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 104호)이 있는데 효령대군이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효령대군(1396~1486)은 동생인 충녕대군(세종)만큼 학문적 깊이와 인격을 갖춘 인물이었지만, 아버지인 태종의 결정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동생인 충녕대군이 국왕이 되어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격려했다고 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왕위를 탐내기보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연주암에 머물며 수행을 했던 효령대군은 91세까지 장수하며 조선 초기 불교를 부흥시키는 데 이바지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효성이 지극했으며 불교에 독실해 불경을 간행하고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연주암으로 가는 길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1호로 지정된 효령대군의 영정을 모시는 효령각(孝寧閣)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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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의 차남인 효령대군 이보의 초상화(모시에 채색, 71cmx98cm).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1호, 조선시대의 대군 초상화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과천시 문원동 연주암 효령각에 소장돼 있다.

 




관악산의 줄기가 닿은 청계산(淸溪山)은 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맑아 ‘청계’라는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이다. 이 산의 주봉인 망경대(望京臺)에서 흐르는 물줄기 하나가 서쪽 막계동 골짜기를 이루는데 이것의 한자식 표기가 막계청계(莫溪淸溪)인 점으로 미루어 내(川) 이름에 따라 붙여진 산 이름일 것으로 본다.

철마다 과일을 많이 내고, 맑은 내가 흐르는 고을 과천은 예로부터 행실이 바르고 어진 인물들이 많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충신으로는 오랑캐와 싸우다 생포됐으나 나라에 절개를 지켜 죽음을 맞았던 충신 최몽량이 있다. 또한 중종 때 효행으로 참의로 증직될 만큼 마을에서 그 덕을 인정받은 효자 최사립이 있으며, 열녀로는 조선 초기의 봉금을 들 수 있다. 예명의 처인 그는 남편이 나쁜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 병을 낫게 했다고 전한다.

산수 좋고 풍수 좋으며, 과실을 많이 맺는 맑은 내가 흐르는 고을 과천(果川)과 청계(淸溪). 그 이름처럼 만물이 고대하는 바 각자 원하는 열매를 가득히 맺는 계절이 되기를 고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