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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원했고
우리가 누리는 것
‘자유민주주의’

글, 사진.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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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민주묘지 전경


지금으로부터 58년 전, 혁명의 날로 기록된 1960년 4월 19일. 일제강점기와 6·25 동족상쟁의 전쟁이 끝나고 회복기에 들어선 대한민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군가는 기억하고 누군가는 벌써 잊었을지 모른다. 기억하는 이들은 그날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피의 화요일’이었다고. 그래서 몰라서도, 잊어서도 안 된다고.

서슬 퍼런 독재 권력에 맞서던 친구, 형제, 부모가 무자비하게 날아오는 총탄
에 죽어갔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피 흘려 죽어야 했나, 또 살아남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넋이 잠든 곳, 국립 4·19민주묘지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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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민주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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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성역 4·19묘지
봄의 기운이 움트는 3월 7일 오전 10시. 지하철에서 내려 10여 분간 걸어 올라가니 어느새 4·19민주묘지 정문에 다다랐다. 입구에서 길 끝에 위치한 4·19기념관에는 당시 긴박했던 혁명의 전개과정을 연표에 따라 사진과 영상을 통해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특히 기념관 2층에는 당시 독재를 위해 부정선거에 쓰였던 투표용지와 투표함, 어느 고려대생의 빛바랜 수건 그리고 그들을 향해 겨눴던 총기가 전시돼 있어 가슴 아픈 그날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기념관 밖으로 나오면 광장 중앙에 고인의 넋
을 기리는 사월 학생 혁명 기념탑과 분향소가 있고 그 뒤에 묘역이 있다. 4·19혁명 희생자 224명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비석마다 붙어 있는 희생자들의 사진 중 교복 입은 어린 학생들의 사진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꽃다운 학생들의 희생이 컸던 4·19혁명이었
다. 이들의 묘역 한쪽, 바람에 나부끼는 태극기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독재의 질곡을 물리치고 승리한 그들의 이야기를. 

4는 버리고 5는 올린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대한민국 국민이 국회의원을 선출했고 같은 해 7월 20일 제헌국회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돼 8월 15일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하지만 이승만이 이끌던 제1공화국은 점점 독재정권으로 변질돼 갔다. 이승만은 재선을 원했다. 그를 지지하는 국회의원 수가 적었기 때문에 재선을 위해선 대통령 선출 방식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꾸는 헌법 개정이 필요했다. 1952년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폭력을 동원해 야당 국회의원들을 감금하는 등 반강제적으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 덕분에 제2대 대통령에도 이승만이 당선됐다.

재선에 성공하고 국회권력까지 장악한 이 전 
대통령은 내친김에 대통령을 계속 하기로 마음먹는다. 당시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은 재선까지만 할 수 있다’는 규정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앤다’는 문구로 바꿔 1954년 다시 한 번 헌법 개정을 시도했다. 법안 통과를 위해선 당시 국회의원 203명 중 2/3 이상인 136명의 찬성이 필요했으나 개표 결과 찬성 135명, 반대 60명, 기권 7명으로 개헌안이 부결됐다. 이에 집권당 자유당은 ‘사사오입(四捨五入)’ 원리를 내세워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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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화가 놓인 4.19혁명 희생자 학생 묘지 2. 4.19민주묘지 유영봉안소 3, 4. 3・15 부정선거 당시의 투표용지와 투표함 



사사오입은 넷 이하는 버리고 다섯부터는 윗단위로 끌어올려 수를 단순하게 만드는 반올림의 일본식 표현이다. 자유당은 135명이 203명의 2/3에 해당하는 정족수라고 주장했다. 203명의 수학적 2/3은 135.333…인데 0.333…은 0.5미만으로 사사오입의 원칙에 따라 버릴 수 있다는 논리였다. 이것으로 이승만은 3선에도 성공한다.

이승만은 멈추지 않았다. 4선을 원했다. 그러
나 1958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의석수가 불어나면서 이승만의 4선은 위태해졌다. 곧바로 자유당은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계획한다. 그러던 중 이승만의 상대 후보인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선거를 한 달가량 앞두고 신병으로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단독 후보가 된 이승만의 4선은 기정사실화 됐다.

선거의 초점은 86세 노령이었던 이승만의 유
고시에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선거에 집중됐다. 실제 싸움은 현직 부통령이었던 민주당 장면과 자유당 후보인 이기붕 사이에 전개됐다. 자유당은 당초에 짜놓았던 부정선거 계획을 부통령 당선을 위해 그대로 밀고 나갔다.

부정선거 지령서
1960년 3월 15일 선거 당일 새벽, 일정 비율의 표를 투표함에 채워 넣는가 하면 세 사람이나 일곱 사람씩 짝을 지어서 투표소에 들어가 서로 확인을 받게 한 후 투표하는 등 비밀투표 원칙을 훼손했다. 죽은 사람을 선거인 명부에 올려 자유당 표에 추가했다. 심지어 미리 이기붕 표로 가득 찬 투표함을 만들어놓은 뒤 투표소 시계를 몇 십 분 빨리 가게 조작해놓고 시간이 다 됐다며 민주당의 선거관리인을 쫓아낸 후 투표함을 바꿔치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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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기념관 내 마산의거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
 


개표할 때도 다른 후보를 찍은 표 뭉치 위아래에만 이기붕의 표를 씌운 후 모두 이기붕의 표라 집계하거나 아예 검표하지도 않고 몽땅 이기붕의 표로 집계하는 일명 ‘샌드위치 개표’까지 사용하는 등 부정이 극한으로 치달았다. 개표가 시작되면서 자유당 이기붕 후보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한 결과가 나와 득표율을 조정할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모든 것은 계획적이었다. 자유당은 선거 1년
전 ‘부정선거 지령서’를 최인규 내무부 장관을 통해 각급 기관장에게 극비리에 하달했다. 이러한 그들의 음모는 어느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 지령서 사본을 민주당에 공개하면서 백일하에 폭로됐다.

세상을 깨운 고교생들
그들의 간계는 학생들도 알았다. 이미 선거 보름 전인 2월 28일 대구 소재 8개교에서 1200여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자유당 횡포에 항거했다. 학생들이 야당의 집회에 참가할 것을 우려한 정부가 시험,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의 핑계를 대며 일요일 등교를 강요한 것이 발단이 됐다.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학생들은 대구 중앙통으로 나아가 어깨동무를 한 채 자유와 정의를 부르짖으며 경북도청으로 향했다. 구름떼 같은 함성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경찰이 총출동했고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했다. 경찰의 진압으로 끌려가면서 피투성이가 된 학생들이 넘쳐났다.

학생들의 뜨거운 외침은 어른들의 마음을 뒤
흔들기 시작했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거대한 절벽 같은 부패한 독재 권력을 상대로 어린 학생들이 먼저 나서는 모습을 보며 용기내기 시작했다. 엄혹했던 상황, 바위에 계란치기 같았을 최초의 저항.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존재가 다름 아닌 고교생들이었던 것이다. 이는 한국 민주화 운동의 시초가 됐다. 큰 바다를 이루는 것은 작은 실개천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2·28민주화 학생 운동은 3·15의거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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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4.19혁명 당시 거리로 나온 건국대 학생들 3. 사월 학생 혁명 기념탑 비석 4. 4.19혁명 당시 중.고등학생 대표였던 조지현 목사가 4.19혁명기념관에 기증한 조사
 


16세 소년의 처참한 죽음
부정선거에 대한 첫 울분이 터진 곳은 마산이었다. 선거 당일 오후 마산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선거 무효를 외쳤다. 이때 경찰의 발포로 마산중학교 3학년 최영호 군을 비롯해 7명이 사망하는 등 8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자유당은 이날 시위를 공산당이 사주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다 시위에 참여했던 마산상업고등학교 입학생 김주열 군이 실종된 지 27일 후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부산일보를 통해 보도됐다. 사람들은 경악했고 격분한 마산 시민들이 2차 의거를 일으켰다. 이날 12명이 사망하고 250여 명이 체포 구금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정부는 4월 12일 전국 등교 중지령을 내리고 이 사태도 공산계열의 책동으로 몰아갔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가던 길도 돌아와야 한다’는 말처럼 오래전에 멈췄어야 했을 일이었다. 자유당은 12년간 계속된 장기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온갖 술수로 불의를 저지르고 역사상 유례 없는 부정선거까지 자행하는 등 자멸의 길로 가고 있었다.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릴수 없는 법, 공산당 폭동이라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그들 거짓말에 넘어갈 국민들이 아니었다. 김주열 군의 죽음과 제1공화국의 독재에 항거하는 불길은 더욱 거세졌다. 4월 13일에는 마산 해인대학교(현 경남대) 학생 100여명이 시국선언 후 시위에 들어갔다. 고등학생 중심이었던 시위에 대학생들이 본격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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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당시 총기
 


피의 화요일, 가자! 경무대로
이미 상황은 정부가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급변했다. 4월 18일에는 서울에서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이 당시 태평로에 있던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하며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재선거를 요구했다. 하지만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대한반공청년단의 정치깡패들이 고대생들을 습격해 수십명의 학생들과 몇 명의 기자들이 부상을 당했다. 부상당한 학생들이 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진이 다음날 조간신문으로 보도되자 이를 본 국민들은 더욱 격분했다. 이 참혹한 사진 한 장이 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전국은 이승만 정권을 규탄하는 성난 데모 대열로 들끓었다. 억눌렸던 분노가 활화산이 분출하듯 그 어느 때보다 격렬했다. 시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거리로 나와 경무대(현 청와대)로 향했다. 선두에는 대부분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었다. 이를 본 시민들도 대열에 합류해 참여 수가 10만 명을 넘어갔다. 시위대 중에는 국민학생(초등학생)들도 있었다.

이윽고 시위대와 경찰의 간격이 10m 정도 좁혀졌을 때 시위대를 향해 사정없이 총탄이 날아왔다. 누가 명령한 총탄인가. 무차별 발포가 시작됐다. 앞서가던 학우가 총탄을 맞고 쓰러져도 죽음조차 초월한 그들은 앞으로, 앞으로 경무대를 향한 전진을 계속했다.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몰린 정부는 오후 3시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좀처럼 사태는 수습되지 않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겨우 평온이 찾아왔다. 거리에는 꽃다운 젊은 목숨들이 사방에 쓰러져 있었다.

희생자 가운데 심지어 초등학생도 있었다. 이때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훗날 이날을 ‘피의 화요일’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다. 183명의 사망자와 6259명의 부상자. 3·1정신을 시작으로 이제 막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정신이 또다시 독재를 만났을 때 이를 이겨내기 위해 치른 희생의 숫자였다.

4월 25일 시위의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다. 각 대학교 300여 명의 교수들이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며 서울 시내를 행진했다. 학생을 중심로 시작된 시위가 사회 전 계층까지 확산되자 주한 미국대사였던 W. P. 매카나기가 이승만 전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할 것을 권유했다.

장시간 여러 사람의 설득 끝에 이승만은 하야를 결정하고 4월 26일 오후 1시에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하야 후 하와이로 망명, 1965년 망명생활 중 사망했다. 부정선거 총 책임자 최인규는 법의 심판을 받아 1961년 12월 21일 사형에 쳐해졌다. 2인자를 꿈꾸며 권력을 휘두르던 이기붕 일가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 외 부정선거의 원흉들은 모두 재판을 거쳐 징역에 처해졌다.



4.19혁명 희생자 한성여중 3학년 진영숙 양의 유서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구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고결한 희생이 잠든 곳
4·19혁명의 주체는 학생들이었다. 그 사실을 선명하게 나타내는 장소가 바로 4·19민주묘지다. 잠든 영혼들은 제각기 가슴 아픈 사연을 품고 있다. 단발머리에 교복을 입은 소녀 고(故)진영숙 양. 당시 한성여중 2학년이던 진양은 동대문에서 옷 장사를 하는 어머니가 집에 오지 않자 메모를 남긴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니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저는 부정선거 규탄을 위해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친구,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어머니 저를 책하지 말고 건 강하게 계세요.”

이 메모가 유서가 될 줄도 몰랐던 진양은 미아리 고개에서 ‘부정선거는 옳지 못하다’며 외치다가 경찰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묘지 안장자 중 가장 어린 희생자는 종암초등학교 4학년 임동석 군이다. 당시 만 10세였다. 흑백 초상화 속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보는 이를 숙연케 한다.

임군과 같은 초등학생 중 수송초등학교 6학년생이었던 전환승 군도 가까이에 묻혀 있다. 전군은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는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다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4·19혁명 당시 사망한 초등학생은 6명, 중학생 17명, 고등학생과 대학생은 각각 40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
대한민국 헌법의 시작은 이렇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 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중략).” 헌법 전문 가장 첫 머리에는 나라의 근간이 되는 정신을 3·1운동과 4·19혁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살아가며 수많은 일 중에 잊혀지지 않는,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분명 존재한다. 3·1운동으로부터 이어진 나라의 근간이 되는 정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4·19혁명은 잊지 말자, 잊어선 안 된다를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 것이 분명하다. 지금 우리는 자유롭게 우리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와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하나의 투표를 할 수 있는 선거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유는 과거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수많은 이들의 피 흘린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자유 민주주의. 58년 전 그들이 목숨을 바칠 만큼 간절히 원하던 것이지만 누리고 있는 이들은 정작 그들이 아니라 우리다. 민주화는 어느 한 시점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할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몫은 그들의 정신을 본받아 민주화를 온전히 완성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꽃 한번 피워보지 못하고 스러져간 값진 피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는 것이라 묘역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