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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의 광복

할 수 있다

역사를 바꿀 순 없어도

바로잡을 순 있다


글. 백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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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철거됐지만 일제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근정전 앞에 세워 우리 민족의 정기를 누르려고 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역사만큼 다분히 주관적인 것도 없다. 당시의 문화나 사회적인 배경이 역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역사를 ‘역사’로 인정하는 것은 그것이 또한 실제로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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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건물 첨탑 철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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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유달산 곳곳에 박힌 쇠말뚝과 바위에 새겨진 일본불교의 상징인 홍법대사상과 부동명왕상이 아직도 그대로 존치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시련과 수난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세력과 해양으로 뻗어나가고자 하는 세력이 교차하는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한반도는 동북아시아의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한반도를 점령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쪽도 자신들의 야망을 충족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남하하는 세력과 북진하는 세력에 마음 편할 날 없었지만 그 모든 역경을 이겨낸 민족이 또한 우리 민족이다. 시련 속에 더욱 단단해지고, 쓰레기통 속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민족이자 어두움 가운데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 비록 아직까지 그 숱한 시련의 상처는 남아있지만 이 또한 지혜롭게 치유해 나갈 것을 믿는다.

올해는 광복 73주년이 되는 해다. 빛 광(光), 돌아올 복(復). 우리는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은 것을 ‘빛이 돌아왔다’고 표현한다. 나라 없는 설움을 처절하게 느꼈기에, 주권 없는 나라의 국민으로 산다는 것은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기에 광복이라 불렀는지도 모른다.

1910년 8월 29일 우리는 나라를 잃었다. 경술국치(庚戌國恥). 나라를 잃은 수치를 당한 이때로 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기까지 우리 민족은 갖은 수모를 겪었다. 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의 풍습과 문화, 심지어 말(언어)과 문자까지 제약을 받아야만 했다. 1938년에는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모두 폐지하고 일어를 상용케 했으며,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민족의 뿌리까지 뽑으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항일운동은 더욱 거세져 갔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그토록 기다리던 광복을 맞았다.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았지만, 광복 73주년을 맞는 지금까지도 진정한 광복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는다.

아직 청산하지 못한 일제 잔재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의 정신과 문화가 온전히 회복될 때 비로소 광복을 맞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함께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우리 민족의 근대화에 대한 것이다. 일본은 아직까지도 자신들의 식민통치가 있었기에 조선의 근대화를 앞당길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한일강제병합 이전 이미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 철거 모습 은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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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화문 자리에 세워진 조선총독부(미니어처) 2. 대한제국 선포 재현행사 3. 현충사 본전 앞에서 기념식수하는 박정희 대통령 4. 고종황제 즉위식
 


조선의 근대화는 이미 시작됐다
일제가 한국 침략과 식민지배의 학문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조작해낸 역사관을 식민사관이라 한다. 식민사관은 한민족의 독자성을 부정하고 일본과의 합병이나 식민지배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위험한 역사관이다. 또한 한국이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데 필수적인 봉건사회가 형성되지 못해 사회경제적 낙후를 면치 못한다고 주장,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침략미화론으로 이어진다.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새빨간 거짓말들은 역사 앞에 주홍글씨처럼 선명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국내외에 독립국임을 선포했다. 비록 한일강제병합으로 13년밖에 지속되지 못했지만 대한제국은 그 짧은 기간 동안 수도 한성을 근대도시로 바꾸는 도시개조사업을 진행했다. 덕수궁 앞 도로가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이 바로 대한제국 때의 일이다. 또한 종로 한복판에 공원을 만들었으니 지금의 탑골공원이다. 워싱턴D.C.를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한다.

1899년 5월 4일에는 아시아 최초로 한성에 전차가 개통됐다. 일본 동경보다도 3년이나 앞선 것으로 전차 이용률이 높아지면서 발전소도 증설, 남는 전력으로 가로등 설치사업을 벌였다. 주로 종로거리와 진고개(현 충무로) 등에 가로등이 들어섰다.

“한성에 도착한 여행자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것은 전차였다. 완벽하게 관리된 전차는 한성주변의 성외곽까지 연결되고 있었다(깔를로 로제티 이탈리아 대사 <한국과 한국인> 저자).”

이 전차로 인해 한성은 근대적 교통수단을 갖춘 극동 최초의 도시라는 명예를 안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가장 지저분한 도시였던 서울이 이제는 극동의 가장 깨끗한 도시로 변모해가고 있는 중이다(비숍, <한국과 그 이웃 사람들> 저자).”
외국인에 눈에 비친 조선은 일제가 주장하는 것처럼 낙후되거나 그 문화 수준이 낮은 나라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전차 하나만 보더라도 일본보다 3년 앞서 개통될 정도로 고종은 근대화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1894년에는 근대경찰 제도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경무청(警務廳)을 창설했으며, 1895년에는 근대 소방시스템을 도입했다. 또한 1895년 전 국민 평등법이 제정되는 등 근대화의 물결은 이미 조선을 적시고 있었다.

무엇보다 의료 분야에서의 근대화도 눈여겨볼만하다. 1885년 서양의학을 도입했으며,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1877~1910)가 배출되기도 했다. 1903년에는 제네바협약에 가입해 적십자 활동을 시작할 만큼 근대화는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근대교육은 1883년 시작됐으며 1886년에는 여성교육이 실시됐다. 1899년에는 외국어 전문학교가 설립되기도 했다. 1883년 근대 언론이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1896년 4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 일간지인 <독립신문>이 발간됐다. <독립신문>의 경우 한글판과 영어판으로 발간됐다.

1888년에는 미국 워싱턴 주재 영사관 업무가 시작됐으며, 1907년에는 네덜란드에 특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바로 헤이그특사다. 헤이그특사 사건은 1905년 일본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고종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1907. 6. 15)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을 특사로 파견해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고 국제 사회에 도움을 요청하도록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사건이다.

이외에도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의 <혈의 누(1906년)>가 출간됐으며, 1908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사설극장이자 연극 상연 전문 극장인 원각사(圓覺社)가 창설되기도 했다. 원각사는 그해 11월 이인직의 신소설 <은세계>를 처음으로 신극화해 상연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단인 YMCA야구단이 1904년(2013년 대한야구협회(KBA)는 한국야구 도입 원년을 1905년에서 1904년으로 정정했다)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에 의해 창설됐다. 이정도만 보더라도 조선의 근대화는 식민 통치 이전 이미 충분히 진행되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시작에 불과하지만 1904년 현재 성취된 것만 보더라도 대한제국이 진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열강이 대한제국을 강점해야 한다는 주장을 논박할 수 있다(미국인 선교사 할버트, <한국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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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개통식 모습
 


일제 잔재, 청산 그리고 보존
일제강점기의 잔재라고 무조건 다 청산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조심스럽다. 분명 일제 잔재는 청산해야 하고, 왜곡되고 잘못된 것은 그 뿌리까지 뽑아야 한다. 그 첫째가 식민사관이요, 친일파에 대한 청산일 것이다. 또한 민족의 혼을 말살시키기 위해 퍼뜨린 허황된 소문과 잘못 형성된 문화와 풍습은 타파하는 것이 마땅하다.

일제는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해 전국의 유명한 산이면 산마다 커다란 쇠말뚝을 박아 민족정기를 끊으려 했고, 백의민족이라 불린 우리 민족의 뿌리를 흔들기 위해 흰 옷 입은 사람들에게 먹물을 뿌리기도 했다. 일제의 계속되는 방해에도 우리 민족은 꿋꿋하게 흰옷 입기를 고집했다. 어쩌면 그 시절 일제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요, 민족의 뿌리와 자존심만은 기필코 지키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명은 아니었을까.

일제는 식민통치 시절, 조선의 곳곳에 천 개가 넘는 신사(神社)를 세우고 강제로 참배하게 했다. 신사는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神道)의 사원으로 그들의 신, 한마디로 이방신에게 절하게 한 것이다. 당연히 반감은 컸다. 광복과 함께 대부분의 신사는 불에 타거나 파괴됐지만,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 위치한 ‘고흥 구 소록도갱생원 신사’는 살아남아 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했다.

문화재로 등록된 신사 얘기에 앞서 소록도와 한센인에 얽힌 가슴 아픈 이야기를 먼저 짚어보자. 조선총독부는 1916년 소록도에 자혜의원의 설립해 한센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에 대한 차별과 탄압은 극에 달했다. 1933년 소록도에 격리된 한센인의 수는 천명을 넘겼고 1940년에는 6100명에 달했다. 이들은 관리 인력 부족과 의약품, 식량 부족에 항상 시달려야 했다. 당연히 제대로 된 치료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강제노역에 동원됐으며, 폭행과 감금을 당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강제 단종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강제 신사참배는 기본이었다. ‘죽어서라도 나가고 싶은 소록도’에서 강제로 이방신에게 참배해야 했던 이들. 그들의 한(恨)이 서린 이 신사가 지난 2004년 등록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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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충원에 심겨진 가이즈카 향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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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공된 조선총독부
 



물론 문화재 지정을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거셌다. 반면 보존해서 교육자료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사람의 생각이 모두 같을 수는 없기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에 대한 판단을 쉽게 할 수는 없다.

비단 이 문제뿐만이 아니다. 한반도에 남아 있는 일제의 잔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논쟁거리다. 일제강점기, 그 수난의 시절 우리 민족과 우리 강산이 겪어야 했던 이 뼈아픈 역사를 과연 어떻게 치유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문제는 아직도 국민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할 시대적 사명으로 남아 있다.

이토록 모호한 문제 외에 명확하게 ‘청산’해야 할 잔재들도 있다. 그중 하나가 국립현충원에 심겨진 일본 가이즈카 향나무에 제거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곳은 시민단체인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혜문)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지난 2013년 일제에 항거했던 애국지사 묘역에 다수 식재된 일본 원산 가이즈카 향나무와 노무라 단풍 등을 제거하고 우리의 전통 수종으로 교체해줄 것을 요청했다.

국립현충원 식재현황에 의하면 가이즈카 향나무 846그루, 노무라 단풍(홍단풍) 243 그루, 화백나무 431그루, 일본목련 7그루 등 총 1527그루의 일본 특산 나무가 식재돼 있었다.

문화재제자리찾기에 따르면 이들 대부분의 나무가 애국지사 묘역, 대통령 묘역에 식재돼 있었으며, 경찰 충혼탑으로 가는 길에는 아예 가이즈카 향나무(왜향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었다. 한 시민단체의 문제제기로 시작된 국립현충원 일본 가이즈카 향나무 제거 청원은 2014년 국회에 채택됐고, 지난 2017년 드디어 그 결실을 맺었다. 국립현충원은 이 문제를 받아들여 일본 특산종인 가이즈카 향나무 등을 제거하고 소나무와 무궁과 등 전통 수종으로 교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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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대제 봉행 위한 어가행렬 재현
 



이외에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충남 아산 현충사에 있는 일본 특산종 나무인 ‘금송(金松)’도 사당 영역에서 기념관과 사무실이 있는 건물 옆으로 옮겨질 예정이다. 문제의 해당 금송은 ‘현충사 성역화 작업’이 진행 중이던 지난 1970년 12월 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던 것을 직접 헌수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이 금송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자리를 이어 사용한 청와대에 남겨져 있던 일제의 잔재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와 관련, 문화재청은 ‘시대성과 역사성’을 근거로 현상 유지를 강행해왔다.

현충사 내 금송 이전과 관련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나무인 금송은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다. 이 기회에 현충사 경내에서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본격적인 나무 이전 작업은 올 봄부터 시작될 예정이다.

가장 대표적인 일제 잔재 청산은 아마도 1995년 시행한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일 것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1926년 세워져 일제 패망 직전까지 36년 동안 우리 민족을 수탈하고 핍박한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일제는 식민통치의 위엄을 과시하고 우리 민족의 정기를 누르기 위해 역대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가 거행되던 경복궁 근정전 바로 앞에 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를 경복궁 앞에 떡하니 세운 것이다. 이 일로 경복궁 안의 여러 건물들이 해체됐으며, 광화문도 제자리에서 옮겨지게 됐다.

수탈의 상징인 이 건물은 광복 이후에도 중앙청,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사용되면서 시나브로 대한민국 역사 속에 숨어들었다. 1986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중 1990년대 초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관광코스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1993년 4월 9일 중알일보 보도에 따르면 ‘일본에게는 반성의 상징이 아닌 그들 선대가 우수했다는 자부심을 살려주는 못된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슬슬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해야 한다는 각계각층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1995년 철거를 작해 1996년 완전히 철거하게 된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에 대한 의견 역시 분분했다. ‘네거티브 문화재(치욕적이고 부정적인 역사와 관련된 문화재)’라도 보존하거나 이전해 후대의 교훈으로 전해야 한다는 주장과 식민지 잔재이니 철거하자는 목소리가 팽팽하게 맞섰다. 물론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치욕의 역사를 잊지 말고 언제나 경계와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지만 왜곡된 역사와 잘못 심겨진 문화는 우리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바로잡을 수 있다. 아직 우리 안에 청산되지 못한 일제의 잔재가 있다면 그것은 또한 우리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방증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마음과 뜻이 하나로 모아져 하루속히 진정한 광복을 이루는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