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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봉화
소수서원·청량산을 거닐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했던가. 학문은 지식으로 그치지 않고 깨달
음으로 승화됐을 때 그 빛을 발한다. 이를 위해 선비들은 심신을 수양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
고 서원과 산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 글 김지윤 사진 김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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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구열 품은 소수서원

먼저 소수서원이다. 쭉쭉 뻗은 소나무 수백 그루가 숲을 이룬다. ‘쏴~’ 하고 퍼지는 죽계천의 소리를 들으며 울창한 소나무 숲인 학자수(學者樹)를 걸으면 소수서원의 정문, 홍정문이 나온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유생들이 학문을 열심히 닦았을 강학당인 명륜당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유생 4천여 명이 배출됐다고 하니 조선시대 ‘학문의 중심지’라는 게 느껴진다. 명륜당에서 학문을 논하는 유생들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소수서원(紹修書院, 사적 제55호)은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세운 교육의 장이다. 국내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1542년 풍기군수로 부임해온 주세붕은 순흥이 고려 말 원나라에서 주자학을 들여온 안향(1243~1306)의 고향임을 알고, 안향을 모신 사당 회헌사(晦軒祠)를 세웠다. 1543년에는 유생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고 안향을 배향했다. 주세붕은 자주 서원에 나가서 유생들과 강론하는 등 교육에 큰 열성을 보였다. 그 결과 불과 4~5년 만에 백운동서원 출신 과거급제자가 많아졌다. 명종 3년(1548) 퇴계 이황(1501~1570)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1550년 조정에 건의해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이라는 친필 사액을 받게 되었다. 소수서원은 여느 서원과 달리 건물이 자유롭게 배치됐다. 이는 규모나 배치구조가 완성되기 전인 초기 서원의 건축이기 때문이다.

명륜당 오른편에 선비들이 머물며 공부하는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가, 왼편에 서원장과 교수의 집무실인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가 있다. 안향을 모신 문성공 사당은 명륜당 왼편에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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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書院)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리학이 나라를 다스리는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은 성리학을 보급하기 위해
군·현마다 향교와 4부학당을, 한양에는 국립대학 격인 성균관을 세우는 등 교육기관을 장려했다. 이후
서당과 같은 소규모 사설 교육기관뿐만 아니라 민간 교육기관인 서원이 등장하게 됐다. 이로 인해 성리
학에 정통한 학자가 많아졌으며, 새로운 학문의 저변화가 이뤄졌다. 서원은 학문의 장이기도 하지만 안
향, 안축, 안보, 주세붕 등 대성리학자를 모시는 사당도 있다.
 
소수서원이 있는 순흥, 알고 보면학문의 고장
순흥 지방은 고려 말 충렬왕과 충목왕의 태(胎)를 보관한 고을이다. 이러한 이유로 도호부로 승격됐으며, 조선 태종 때에는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 일부까지 관할하는 대도호부였다. 그러나 이 지역의 많은 선비들이 영월 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을 추종하며,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고, 세조는 도호부를 철폐했다. 그래도 주민들은 순흥에 대한 자부심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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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천 건너편에 퇴계 이황이 자주 찾아와서 시를 짓고 즐겼다고 하는 정자 취한대(翠寒臺)가 있고, 그 아래에 주세붕이 직접 바위에 새겼다는 ‘공경할 경(敬)’자와 퇴계가 새긴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바위에 붉은 글씨로 새긴 ‘경’자에 담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주세붕이 숙수사를 헐고 서원을 건립하던 무렵에 밤만 되면 혼령들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 연유를 알아본 즉, 세조 3년(1457) 10월 단종복위 거사에 실패해 이 고을 선비들이 다수 참화를 당할 때 죽계천에 수장된 혼령들의 울음이었다고. 주세봉이 위혼제를 올리고 경(敬)자에 붉은 칠을하자, 그 뒤부터는 혼령들이 울지 않았다고 한다. 경(敬)은 주자철학에서 공경의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로써 원귀들의 원한이 위로받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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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서원에 불교 흔적 보여
홍정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숙수사 당간지주가 있다. 당간지주는 ‘당(幢)’의 깃발을 걸어 놓는 기둥으로절 입구에 세워놓는다. 소수서원은 통일신라시대에 숙수사(宿水寺)란 사찰이 있던 자리로 지금도 입구에는 숙수사 당간지주(보물 제59호)와 초석 등이 남아있다. 주세붕이 유교와 반하는 불교 사찰 터에 서원을 지으면서 당간지주 등 절의 흔적을 치우지 않았다. 이는 주세붕이나 이황 등 많은 성리학자가 유교뿐 아니라 불교를 쉽게 져버리지 못한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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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가 사랑한 청량산

쉬이 오르고 어렵사리 내려온다. 어느 코스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등산 난이도가 다르겠으나, 청량산 제2코스가 그랬다. 봉우리가 36개나 있지만 연결됐다기보다 제각각 솟아 있어 기암괴석을 이루는 청량산(870m)에서 옛 선비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퇴계 이황이 자주 오르기를 즐겼다는 청량산은 이곳저곳에 역사의 자취가 있고 저 멀리 내다보면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이 있다. 산은 청송 주왕산과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두 산 모두 수성암으로 이뤄져서인지 부드럽게 봉긋 솟은 봉우리들이다. 바라보면 볼수록 마음이 포근해진다. 청량산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봉우리들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청량산에 들어와 축융봉 산성(청량산성)에서 생활했다. 그때 새긴 바둑판이 아직까지 있다고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또 응진전에서 공민왕과 관련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응진전에는 공민왕이 사랑한 노국공주의 상이 놓여있다. 이처럼 이곳 주민들은 공민왕을 지극히 생각한다. 그래서 축융봉 산성 안에 공민왕 사당을 지어놓고 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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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기슭에는 663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청량사와 퇴계 이황이 공부했던 곳에 청량정사가 있다.
 
응진사에 가는 길목에 김생굴로 오르는 길이 갈래나 있다. 신라 명필 김생이 10년간 수도했다는 곳이다. 이곳에 김생과 봉녀(縫女, 베 짜는 여인)의 전설이 있다. 김생은 이곳에서 9년을 수도하고 내려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여인이 나타나 자신은 길쌈을 할 테니 김생에게 글을 써보라고 했다. 솜씨 겨루기였다. 둘은 굴 안에서 불을 끄고 각자 글을 쓰고 베를 짰다. 얼마 후, 불을 켜니 김생의 글씨는 들쭉날쭉한데 여인의 베는 고르기가 올 하나도 튀어나오지 않고 맞아떨어졌다. 김생은 이것이 수도에 정진하라는 신의 계시임을 깨닫고 1년을 더 공부해 10년을 채웠다. 마침내 그는 당나라까지 이름을 알린 명필가가 됐다. 굴은 그리 깊지는 않지만 김생 한 사람이 자리 잡아 수도할 만큼의 규모다.

청량산 육육봉(12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驅)
백구야 날 속이랴 못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물 따라가지 말고 어주자(漁舟子) 알까 하노라.

청량산 입구 큰 돌에 새긴 ‘청량산가’는 퇴계가 이곳에 머물며 지은 노래다. 퇴계 이황은 ‘청량산인’이라는 호를 지을 만큼 청량산을 좋아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청량산을 드나들며 공부했고, 이곳에서 후학들과 함께 강론도 했다. 도산서당을 지을 때, 도산서당과 이곳을 두고 끝까지 망설였다. 그는 청량산의 절경을 자기만 알고 간직하고 싶다는 욕심까지 내비쳤다. 그가 정작 거처로 삼은 곳은 청량산이 아니지만, 청량산을 멀리서 올려다 볼 수 있는 도산의 자락을 택했다. 그 정도로 청량산을 흠모했다. 퇴계가 공부하던 곳에 후세의 문인들이 건물을 짓고 오산당(吾山堂)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청량산의 으뜸은 해발 870m로 장인봉이지만 자소봉에서 내려다본 경관이 제일 좋다. 아울러 하늘다리를 건너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금강대(철계단 길)는 고된 길이지만 조용히 흐르는 낙동강을 볼 수 있어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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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의 으뜸은 해발 870m로 장인봉이지만 자소봉에서 내려다본 경관이 제일 좋다. 아울러 하늘다리를 건너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금강대(철계단 길)는 고된 길이지만 조용히 흐르는 낙동강을 볼 수 있어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선인들의 발자취가 곳곳에 있는 청량산은 거칠지도, 웅장하지도 않다. 호젓한 산길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옛사람들은 ‘등산(登山)’보다 ‘유산(遊山)’을 했다. 산을 수직적인 관계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바라봤다. 남명 조식이 지리산을 열두 번 찾고, 퇴계 이황이 청량을 수없이 찾은 이유도 그러하다. 정복의 개념이었다면 한번으로 족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두고두고 찾은 이유는 산을 사랑하고 자연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
이 달콤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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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의 또 다른 곳 부석사

사찰 건물들의 배치가 자연스럽다. 어느 사찰은 일주문부터 건물들이 일자로 놓여있다고 하는데 영주 부석사는 여기저기에 자리했다.
그런데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럽기만 하다. 부석사만의 매력이다.

이 사찰에서 유명한 건물은 본당인 무량수전이다. 배흘림기둥과 더불어 곡선의 멋을 살린 무량수전에서 앞을 내다보면 저 멀리 소백산맥의 장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구름을 걸치고, 병풍처럼 펼쳐진 수많은 봉우리를 보니 ‘무량(無量, 셀 수 없이 많음)’이란 단어가 마음에 와 닿는다. 배흘림기둥에서 달리는 소백산맥을 본 방랑시인 김삿갓은 “인간 백세에 몇 번이나 이런 경관을 볼 수 있을까”라는 시를 읊었다.

신라 문무왕 16년(676)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을 당시 부석사가 창건됐다. 670년 의상대사가 5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찾고 찾은 터가 봉황산 자락, 지금의 부석사 자리다. 1300년 이상 제 자리를 지켜오면서 처음보다 규모가 커졌다. 그 건물들 가운데 일주문을 시작으로 범종루, 안양루, 무량수전이 부석사의 중심축이다. 부석사는 ‘불교 교리를 건축으로 구현한 사찰’이라고 평가받는다. 특히 범종루와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까지 108계단을 올라야 극락의 세계에 들 수 있는데, 이는 경사가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쉬는 것을 반복하면 고통과 번뇌는 사라지고 마침내 극락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자랑이다. 한국 전통건축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목조건축물이다. 균형미가 돋보이는 법당은 위풍당당하면서도 아담한 규모다. 하늘 아래 살짝 들린 팔작지붕의 처마선은 가볍지 않고 단아하다. 여느 사찰의 법당이 풍기는 웅장함이 아닌 우아함이 무량수전의 매력이다. 배흘림기둥에서는 넉넉한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과하게 부르지 않고 적당히 불룩해 안정감이 든 부석사에서 마음이 맑은 사람만이 볼 수 있다는 다섯 부처가 있다. 범종루 근처에 있는 커다란 나무 곁에서 해 뜰 때와 저물녘에 안양루를 향하면 비껴든 햇살로 황금빛 부처의 형상을 볼 수 있다. 바로안양루 지붕 밑 공포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부석사에는 여러 가지 설화가 있으나 그중 뜨인 돌이 된 선묘 낭자와 의상대사의 살아있는 지팡이 이야기가 유명하다. 먼저 사찰의 이름이 된 ‘부석(浮石, 뜨인 돌)’은 의상대사를 흠모한 선묘 낭자의 애틋한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의상대사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이룰수 없었던 선묘는 용이 되어 의상대사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구해준다. 특히 대사가 부석사를 세울 때 크게 도와준다. 당시 이교도들이 부석사 창건을 반대했는데 용이 된 선묘 낭자가 거대한 돌을 띄어 그 무리를 물리친다. 이후 용이 된 선묘는 절이 완성된 후 절을 지키기 위해 법당(무량수전) 아래 잠들어 있다. 이원창 문화관광해설사는 “무량수전 앞 석등 밑에는 선묘룡의 꼬리가 묻혀 있다고 한다”고 전했다. 무량수전 왼편에 있는 부석(浮石)이 바로 선묘 낭자가 띄운 돌이다. 자연석 서너 개가 서로 뒤엉켜 판판한 큰 돌을 받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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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오른편에 난 산길을 오르면 조사당이 나타난다. 의상대사를 모신 곳으로 바로 앞에 선비화(禪扉花)라고 불리는 가녀린 나무가 있다.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나무가 돼 자란다는 전설을 간직한 관목으로 해마다 싹이 돋고 꽃이 피어난다.

부석사는 자연과 불법(佛法)의 조화가 이뤄지는 곳이다. 속세에서 잠시 벗어나 가람 이름의 의미를 하나하나 되뇌면서 극락에 다다른다. 그 극락에서 자연경관을 바라볼 때 비로소 마음의 평안함이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