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마루 | GEULMARU

로그인 회원가입 즐겨찾기추가하기 시작페이지로
글마루 로고


 

세상을 바꾼
한 톨의 씨앗

따뜻함의 최초,
목면시배유지를 가다

글, 사진. 이지수


01.jpg
 

겨울이 왔다. 새벽녘이면 추위에 덮을 것을 찾아 허우적거릴 만큼 추워졌다. 기온이 점점 떨어지니 포근하고 따뜻한 것들을 찾게 된다. 가장 먼저 도톰한 스웨터와 솜이불을 장롱에서 꺼내본다.

누군가 그랬다. 요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걸 거저 얻는다고. 현재 우리가 당연하다 여기며 누리고 있는 이 따뜻함의 최초. 그렇다. 목화다.

고려 말 문익점 선생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목화씨가 우리나라 목화재배의 시초가 됐다. 그리고 이 한 톨의 작은 씨앗이 우리나라 의복문화의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겨울의 문턱에서 변화의 시작점, 그 따스함의 최초를 찾아 나섰다.


02.jpg
목면시배유지 기념관 입구
 

03.jpg
목면시배유지 기념관 내부
 


변화가 시작된 곳, 목면시배유지
지난달 3일 오전. 서울 용산역에서 진주역으로 향하는 KTX 열차에 몸을 실었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목면시배유지로 가기 위해서다.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 문익점 선생이 가져온 최초의 목화씨가 심겨 처음 싹을 틔운 곳이다.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변화를 몸소 느끼고 체험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그 안에 담긴 선조들의 지혜와 우리나라 전통문화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이유야 어찌 됐든 이미 발길은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출발한 지 약 3시간 20분이 지나서야 진주역에 도착했다. 목면시배유지까지는 이곳에서 택시를 타고 20분 정도를 더 들어가야 했다.

알록달록 단풍으로 물든 산과 유유히 흐르는 남강의 경치에 빠져들 때쯤, 도롯가에 드넓게 펼쳐진 목화밭이 눈에 들어왔다. 900평의 목화밭. 말로만 듣던, 목화솜 이불에서만 보던 흰 목화솜이 가지 끝에 몽글몽글 피어올라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목화재배지인 목면시배유지에 도착한 것이다. 이곳은 1963년 사적 제108호로 지정됐다. 목화밭 건너편에는 전통 한옥으로 지어진 대문이 보이는데 이곳이 기념관 입구다. 기념관 안에는 문익점 선생의 유허비와 사적비가 있으며 우리나라 목화재배 역사와 의생활의 변천사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서울에서 촬영 왔다고?” 목화솜에서 실을 뽑는 과정을 생생하게 담고 싶어 사전에 베 짜기 재현을 요청했더랬다. 서울에서 취재 왔다는 말에 바쁜 농사일도 제쳐두고 한달음에 달려오신 (사)전통문화 무명베짜기보존회 어머님들. 감사하기도 했지만 죄송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무명옷과 베틀, 베 짜기는 좀처럼 보기도 어렵고 전통박물관에 가도 겨우 모형으로나 볼 수 있는 유물과도 같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 꼭 한번 직접 보고 취재하고 싶었다. “지금 농사 때문에 엄청 바쁠 때야. 그래도 우리 취재하러 왔다는데 안 올 수가 있나. 기자님, 예쁘게 찍어줘요.” 오자마자 무명옷으로 갈아입은 어머님들이 베 짜기 재현을 시작했다. 베짜기 재현은 기념관 옆 문익점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부민각(富民閣) 대청마루에서 진행됐다. 고즈넉한 한옥 마루에서 진행된 베 짜기 재현을 보고 있자니 마치 수백 년 전 과거로 돌아간 듯 기분이 묘했다.
   

04.jpg
부민각에 걸려있는 문익점 영정, 기념관에 전시된 삼우당 일기
 



재현이 진행될수록 보존회 어머님들의 손놀림이 점점 분주해졌다. 그래도 힘든 기색 없이 이야기 꽃을 피우고 중간중간 노래도 부르신다. ‘물레야 빼 뺑뺑 네 잘 돌아라/ 대밭에 김도령 밤이슬 맞네/ 밤이실 맞는 거 둘째나 두고/ 깔따구 등쌀에 내 못 살 것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구성진 노랫가락이다. 그 옛날 힘겨운 노동을 노래로 달래며 웃음을 잃지 않았던 아낙들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물레는 돌고 노래는 계속 흘렀다. 무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이렇다. 목화솜을 수확하면 씨아기-활타기-고치 말기-실뽑기-무명날기-무명매기-베짜기의 모든 순서를 차근차근 거쳐야 한다.

한 필의 무명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참으로 길고도 지루한 과정을 지나야 한다. 재현하는 어머님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지금 태어나는 사람들이 거저 얻는다는 어르신의 지당하신 말씀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지금은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옷을 사서 입기만 하면 되지만 우리 선조들은 옷을 하나 해서 입는 것도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나라에 목화가 들어오기 전, 조상들의 옷 재료는 주로 삼베였다. 천이 질기고 값이 싸서 서민들이 애용했지만 보온에 있어 매우 취약해 한 겨울에는 추위에 벌벌 떨며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추운 겨울 얼어 죽는 일도 다반사였다. 조금 낡아졌거나 지겨워졌다고 몇 번 입지도 않고 넣어둔 옷장 안에 옷들이 떠올라 순간 부끄러워졌다. 자신의 개성을 표출하는 방법 중 하나로 멋과 개성을 위해 옷을 입는 현재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 선조들에게 옷은 곧 생존과 직결됐다. 그러다 더 이상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는, 겨울에 얼어 죽는 사람이 없는 그런 날이 왔다. 어떤 한 사람이 먼 나라에서 가져온 씨앗이 그야말로 의류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그 사람이 고려 말 문신이자 학자인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이다.

씨앗이 가져온 혁명
‘꽃이 떨군 자리에 아프게 익어 다시 피는 목화는/ 일 년에 두 번 꽃이 핀다네/ 봄날 피는 꽃만이 꽃이랴/ 눈부신 꽃만이 꽃이랴/ 꽃 시절 다 바치고 다시 한 번/ 앙상히 말라가는 온몸으로 최후의 생을 바쳐 피워낸 꽃…(중략) 슬프도록 아름다운 흰 목화 꽃이여/ 이 목숨의 꽃 바쳐 그대 따뜻하다면/ 그대 마음도 하얀 솜 꽃처럼 깨끗하고 포근하다면/ 나 기꺼이 밭둑에 쓰러지겠네.’


박노해 시인의 시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 중 일부이다. 목화는 예쁜 꽃으로 한 번, 솜 꽃으로 또 한 번 꽃을 피워 흔히 두 번 꽃핀다고 한다. 조선 시대 과거시험에는 목화를 두고 두 번꽃피는 나무가 뭔지 묻는 문제가 출제됐다고도 전해진다. 정순왕후와 목화꽃에 관한 일화도 있다. 영조는 왕비 후보들에게 꽃 중에 어떤 것이 제일 좋으냐고 물었다. 왕비 후보들은 저마다 모란꽃, 연꽃, 매화꽃이라 대답했지만 정순왕후 만은 목화라고 답했다. 왕이 이유를 묻자 다른 꽃들은 한 시절만 좋은 데 불과하지만 오직 목화는 천하 사람들의 옷이 돼 사람들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공이 있기 때문이라 했다. 목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의복에 상당한 변화를 끌어내는 계기가 됐음을 의미한다.


05.jpg
부민각
 


그 계기를 마련한 사람이 바로 문익점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문익점 하면 목화씨를 붓통에 숨겨 들여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한 인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행보속에는 ‘애민정신’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문익점이 활동한 시기는 14세기로 고려 말 공민왕 집권기였다. 문익점은 공민왕 9년인 1360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 문익점의 관직은 좌정언(左正言)이었다. 좌정언은 고려시대 국가 행정을 총관하는 중서 문하성(中書門下省)에서 조칙(詔勅)을 심의하고 왕에게 간하여 잘못을 바로잡게 하는 간쟁을 맡아보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좌정언으로 활동 하던 문익점이 우리나라 의복혁명의 효시가 되는 목화씨를 가져오게 된 계기는 원나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차출되면서부터이다. 문익점은 원나라 사절단에 서장관(書狀官)이라는 직책으로 참여했는데, 서장관은 원나라 방문 과정 내용을 기록하는 외교적으로 실무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직책이었다.



06.jpg
문익점 효자비
 

통상적으로 해외 사절단에 포함된 대부분의 신하는 귀국 길에 가져올 물건으로 임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진귀한 물건이나 값비싼 것에 관심을 두기 마련이다. 하지만 문익점의 눈에 들어온 것은 목화 씨앗이었다. 당시 목화 씨앗은 원나라에선 해외 반출금지 품목이었기 때문에 고려 때 우리가 면으로 만든 무명옷을 입으려면 전량을 수입해야만 했다. 목화는 원나라가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기에 원나라는 목화 씨앗이 해외에 반출되지 못하도록 엄격히 관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익점은 목화씨를 붓 통에 담아 우리나라로 가져왔다. 당시 문익점이 국내로 들여온 목화 씨앗은 총 10개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목면 종자를 얻어 싸가지고 와서 이를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반으로 나눠 각각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홉 톨은 실패의 쓴맛을 봐야 했다. 장인이 심은 씨앗 중 단 하나의 씨에서만 싹을 틔우는 데 성공한 것이다.

문익점은 어렵사리 싹을 틔운 목화를 대량으로 재배하여 많은 백성에게 보급할 방법을 모색한다. 두 사람은 싹을 틔운 1개의 소중한 목화를 정성껏 키워 그해 가을 목화를 수확해 3년 동안 해마다 양을 늘려 심었다. 전국 각지의 유지들에게 목화 씨앗을 나눠주면서 이를 “동네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한다”며 권유했다. 당시 문익점으로부터 목화 씨앗을 받아간 사람은 대표적인 세도 가문이었던 남평문씨, 진주정씨, 진양하씨, 상주주씨, 성주이씨 등이었다. 이러한 문익점의 노력 덕분에 당시 변변한 물류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았음에도 목화씨앗은 10년 만에 급속히 전국적으로 퍼져갔다. 문익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단순히 목화씨를 재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서 실을 뽑아내는 기술까지도 연구했다. 그러던 중 때마침 장인 정천익 집에 기거했던 원나라의 ‘홍원’이란 승려에게 목화에서 실을 뽑는 법을 배웠고 목화씨를 심기 시작한 지 5년쯤 되던 때부터 백성들이 무명에 솜을 넣어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게 되므로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게 됐다. 이를 계기로 문익점은 목화뿐만 아니라 거기서 실을 뽑는 기술까지 함께 보급할 수 있게 됐다.

목화와 무명은 들판의 불처럼 번져나갔다. 포근한 솜과 질긴 무명은 옷감의 개조와 향상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태종 1년 윤3월 1일자(1401년 4월 14일) <태종실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이미 무명은 온 국민의 대표 의류가 됐다. 고려 말에 들어온 무명이 조선 초에 ‘국민 의류’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 의류문화 생활에 일대 혁명이었다. 씨아나 물레, 가락, 날틀 같은 면직기구의 제작은 생산도구제작의 단초를 열었다. 탈지면은 지혈이나 치료용으로 쓰이고 솜은 초나 화약의 심지로 유용됐다. 내구성이 강한 무명실로 만든 바느실이나 노끈, 낚싯줄, 그물은 일상용품을 일신시켰다. 그런가 하면 무명은 물물교환에서 통화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고 일본이나 중국에 주요 수출품의 하나이기도 했다.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의 생산물인 목면은 많은 사람의 생활영역을 넓히고 삶을 풍부하게 했다. 이렇게 온 나라를 따스하게 만들었는데도, 정작 주인공인 문익점과 그 가족은 여전히 가난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익점(益漸)이란 이름에는 ‘더해지고 늘어난다’는 의미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이익보다 세상의 이익이 더해지고 늘어나는 데만 관심을 가졌던 것일까. 문익점이 지은 자신의 호인 ‘삼우당(三憂堂)’은 국가의 어려움을 걱정하며 성리학이 보급되지 않음을 안타까워하고 자신의 도가 부족함을 걱정한다는 뜻이다. 백성이 헐벗은 것을 실로 걱정했던 선비 문익점의 마음이 담겨 있다.

문익점의 진심은 결국 통했다. 이러한 공을 세운 문익점에 대한 조선 왕들의 예우를 보면 알 수 있다. 문익점이 70세 되던 해에 사망하자 정종은 그의 공과 덕을 기리기 위해 예장할 것을 명했다. 태종은 조선왕조에서 관직을 지내지 않았음에도 예문관제학을 하사하고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하면서 시호를 충선(忠宣)이라 했으며 부조묘(不祧廟)도 세우게 했다. 세종대왕은 그를 영의정으로 증직하고 그가 백성의 살림을 넉넉하게 했다고 해서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해 ‘부민후(富民侯, 백성을 풍요롭게 만든 이)’라는 이름을 내려 추증(追贈, 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품계를 높여 주던 일)하기도 했다. 이 뜻을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7칸으로 된 집을 지었으니 그곳이 지금의 목면시배유지 기념관 옆에 자리한 부민각이다. 문익점은 지극한 효자로도 알려졌다. 부민각 옆에 세워진 ‘효자비’가 이를 방증한다. 이곳 사월리는 문익점이 살던 곳으로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모친이 돌아가시자 묘 곁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다. 당시는 왜적의 침입이 잦아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살생과 노략질을 일삼아 모두 피난을 가고 있었는데, 문익점만이 홀로 평상시와 같이 곡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왜적도 그의 이러한 효성에 감동해 나무를 다듬어 ‘물해효자(勿害孝子, 효자를 해치지 말라)’라고 써서 세워 놓도록 하니 그때부터 이 지역이 평안하였다고 한다. 그 뒤 1383년(고려 우왕 9)에 이성계가 이 사실을 알게 돼 효자비 내려줄 것을 우왕에게 청하여 고려 조정에서 비를 세우고 이 마을을 ‘효자리’라고 불렀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그 옛날 몇 알의 목화씨를 들여다가 우리나라 생활문화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목면공’ 문익점. 그가 가지고 온 목화 씨앗이 혹독한 추위에서 백성들의 생명을 구했으니 이는 단순한 씨앗이 아닌 생명의 씨앗이었다. 한 사람이 가져온 이 생명의 씨앗은 세상을 바꿨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나 우리는 그 수혜를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