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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

추억을 소환하다


사람 사는 정(情)이 그리운 사람들


글. 백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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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따사로운 햇살이 버스 유리창에 부딪히며 산산이 부서진다. 눈을 찡긋거리며 손바닥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막아보지만 역부족이다. 그러면서도 애써 창 밖 풍경을 내려다본다. 성산대교 아래로 펼쳐진 한강 역시 가을햇살에 흩뿌려진 유리알처럼 반짝인다. 너무도 빠르게 흐르는 세월 속에서, 가을 이 한낮의 순간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시간이 멈춘 듯 했다.

제 아무리 큰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이라도 손에 넣을 수 없고, 빗겨 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시간이다. 가는 세월 막을 수야 없겠지만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처럼, 지난 시간들을 다시 불러올 추억이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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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은 돌고 돈다
“시간아~ 멈추어다오!”
아무리 애원해도 절대로 멈추지 않는 것이 시간이다. 만약 생에 단 한 번 원하는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느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어떤 이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어떤 이들은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찾아 특정한 과거로 회귀하고 싶을 것이다. 혹여 기자에게 기적적으로 그 기회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선뜻 나서지 못할 것 같다. 지금껏 내가 알고 지내온 많은 사람들과 익숙해진 풍경들에 대한 그리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애먼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저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을 안고 가끔 그때의 나를 회상하는 것으로도 족하다. 그래도 무엇인가 허전하고 부족하게 느껴진다면 일명 ‘추억팔이’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시리즈로 제작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tvN 드라마 <응답하라(1997, 1994, 1988)>의 경우가 아마도 ‘추억팔이’의 대표적인 아이템이 아닌가 한다. ‘~팔이’라는 어감 때문에 이 드라마가 일부러 추억을 강요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드라마는 그저 웃고 즐기는 가운데, 때로는 눈물샘을 자극하며 자연스레 그 시절의 생활과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응답하라> 시리즈는 지나간 ‘유행’을 다시금 ‘유행’시킨 일등공신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몇 달만 지나도 ‘한물 간 것’으로 여기던 젊은 청년들이 20~30년 전 유행했던 패션을 따라 하고,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에 나왔던 유행가를 따라 부르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니 ‘드라마’의 힘이 참으로 대단함을 느낀다.

드라마의 영향이 없진 않겠으나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란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를 필두로 ‘7080’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드라마나 프로그램이 적잖이 만들어지고 있다. ‘추억소환’ 프로그램이 속속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버렸지만, 여기엔 무엇보다 그 시절의 향수 즉 사람 냄새 나는 삶을 그리워하는 현대인들의 바람이 반영된 이유가 클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졌다. 작년에 입던 옷을 입으려고 꺼내 보니 어딘가 모르게 ‘올드’해 보여 입기 망설여진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 ‘유행’이라는 녀석이 관여한 탓이다. 이 녀석은 소리 소문 없이 자연스럽게 한 시대 혹은 한 시절 사람들의 삶 속을 파고든다. 유행에 민감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그 시절을 풍미하는 것에 자연스레 젖어든다. 문화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다. 유행은 오랜 옛날부터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유행은 변화의 속도에 따라 때로는 ‘전통’이라는 옷을 입기도 하고, 때로는 ‘한때’라는 옷을 입기도 한다. 유행이 오랜 시간 지속되면 전통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통이란,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해 내려오는 사상·관습·행동 따위의 양식을 말한다. 그 사회 구성원들이 널리 인정하는 것, 그것이 모이고 모여 전통이 됐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어느 한 시대, 그 시절 널리 유행했던 옷이나 언어, 주거 형태 등이 오랜 시간이 흘러 전통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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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드라마 <응답하라1988>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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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 호돌이는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사랑받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적인 캐릭터다.
 


상모 쓴 아기호랑이‘ 호돌이’
응답하라 시리즈 중 지난해 방영돼 많은 사랑을 받은 <응답하라 1988>은 그 시대의 향수를 더듬을 수 있는 중장년층뿐 아니라 어린 학생들에게도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물론 ‘응칠(응답하라 1997)’ ‘응사(응답하라 1994)’ ‘응팔(1988)’ 중 무엇이 더 재미있고 유행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는 체감하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우선 1988년 하면 호돌이가 상모를 쓰고 웃고 있는 모습이 먼저 떠오를 정도로 88서울올림픽에 대한 추억은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의 한 조각이다. 올림픽 이후 태어난 이들에게도 올림픽의 마스코트 ‘호돌이’는 누가 알려준 기억이 없는데도 자연스레 ‘알고 있는’ 대표적인 캐릭터다. 드라마 <응팔>도 매 회 새로운 에피소드를 시작할 때마다 올림픽의 한 장면이 여러 장면들과 어우러져 지나간다. 굴렁쇠를 굴리며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을 뛰어다녀 일명 ‘굴렁쇠 소년’으로 불렸던 윤태웅 군. 1981년 9월 30일 독일 바덴바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서울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날 태어난 인연으로 굴렁쇠 소년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드라마의 소재가 된 서울올림픽은 아직까지도 대한민국 올림픽 출전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둔 올림픽으로 기록된다. 호랑이 ‘호돌이’의 기운을 받아서인가. 서울올림픽 개최를 필두로 ‘2002한일월드컵’까지 개최하면서 대한민국은 세계 속에 그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키게 됐다. 서울올림픽 당시 개최국의 이점을 감안하더라도 금 12개, 은 10개, 동 11개 합계 33개의 메달을 획득하며 4위라는 성적을 거머쥔 것은 대단한 성과였다. 과연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표어에 맞는 결과였다.

서울올림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올림픽의 마스코트 호돌이다. 이제 호돌이도 우리 나이로 서른, 아니 공모를 통해 1983년 탄생한 것으로 따지면 벌써 서른다섯이 됐다. 문구용품부터 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호돌이. 그런 호돌이가 이젠 “호돌이~ 호돌이”로 부르기엔 너무 큰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부터는 “호돌이 님”이나 “호돌이 씨 혹은 호돌씨”로 불러야 하나? 대한민국은 동방예의지국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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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돌이의 탄생

호돌이(HODORI)는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후 서울올림픽위원회의 상징물 현상공모, 디자인 지명공모, 마지막으로 애칭 공모를 통해 탄생하게 됐다.

김현이 디자인한 상모를 쓴 아기호랑이는 처음 출품했을 때와 최종적으로 공개된 모습에서 차이를 보인다. 심사위원단, 자문위원단 등등의 의견을 반영, 여러 번의 수정작업을 거쳐 우리가 알고 있는 호돌이가 된 것이다. 상모의 긴 끈은 개최지인 서울의 영문 첫 글자를 딴‘ S’자 모양을 그리고 있고, 잘 보면 번쩍 치켜든 오른 손은 앙증맞게 승리의‘ V’를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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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9월 외국인들이 한복을 입고 창경궁을 관람하는 모습 2. 도심 속 한복 패션쇼 3. 해미읍성을 찾은 여학생들이 예쁘게 한복을 차려 입은 모습
 



청청패션 그리고 한복열풍
‘복고의 열풍으로 요즘 뜨는 패션 중 하나가 바로 ‘청청패션’이다. 청바지에 청재킷 등을 매치해서 입는 청청패션은 70년대 후반 절정을 이뤘다. 청바지는 크게 유행을 타지 않아 시대를 초월해 사랑받고 있는 아이템이지만 위, 아래를 모두 청으로 맞춰 입을 경우 잘못하다간 ‘워스트 드레서(Worst
Dresser)’에 등극하는 영광을 맛볼 수 있다.

기자는 본래 청청패션을 선호하는 편이 아니라 그렇게 입어본 역사가 없지만 친언니들이 학창시절 청청패션을 소화하는 것을 보고 자란 터라 거부감은 없다. 특별히 유행에 민감한 언니들은 아니었지만 청재킷을 즐겨 입었던 것을 보면, 청재킷이 그 시절 ‘머스트 해브 아이템’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

청청패션에 무스를 바르거나 스프레이를 뿌려 잔뜩 세운 앞머리, 목에 두른 짧은 스카프, 목이 시린 겨울이 되면 스웨터 속에 받쳐 입었던 공갈 목 폴라(이 아이템은 원색의 색깔별로 구비해 놓는 게 유행일 정도였다), 셔츠를 바지 속에 집어넣어 입는 일명 ‘배바지’ 패션 등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요즘’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었던 ‘촌스러운’ 패션이 지금 다시 유행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청청패션의 경우 인터넷에서 해당 단어를 검색하면 “청청패션 어울리나요?” “청청패션으로 입고 싶은데 조언 좀 해주세요.”라는 등의 질문이 많이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청재킷이나 청치마 등을 아이템으로 하는 쇼핑몰이 예년에 비해 많아졌음을 알 수 있다.

청청패션으로 거리를 누벼봤을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는 향수를, 돌고 돌아 다시금 청청패션이 유행하는 이때의 젊은이들에게는 패션리더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게 해 줄 ‘머스트 해브 아이템’ 청청패션.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한번 도전해보는 것은 어떨까.

패션은 시즌이라는 말이 있다. 딱, 유행하는 그때만 즐길 수 있다는 말일 게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한국 사회에 유행하고 있는 패션이 ‘청청’ 말고 하나가 더 있다. 바로 ‘한복’이다.

한복이라고 하면 명절 같은 특별한 날에 한두 번 입고 마는 것으로 여기던 분위기에서, 지금은 입고 싶을 때면 언제든 입을 수 있는 평상복 대열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상태다. 광화문이나 인사동, 경복궁 같은 곳에 가면 개량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한복을 입으면 할인을 해준다거나 고궁 같은 곳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이벤트도 열린다. 몇 년 전만해도 한복 또한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문화 체험의 하나로 입는 게 전부였다면, 지금은 우리네 젊은이들이 더 열광하는 패션으로 거듭났다.

특히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 한복이 인기를 끌게 된 것은 무엇보다 입기 편하게 간소화되고 아기자기해진 디자인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선의 아름다움과 고운 빛깔의 옷감에서 풍기는 전통한복의 고풍스러움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비교적 가벼워진 가격과 대여점, 인터넷 등을 통해 한복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것도 한복 열풍에 한 몫했다. 비록 전통한복과는 차이가 있지만 젊은이들이 한복을 찾는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네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유행이 때로는 문화의 순기능 역할도 하는 것이다. 한복 열풍은 시즌을 타지 않고 쭉~ 계속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추억을 부르는 노래
복고 열풍과 함께 빛을 보고 있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음악이다. 맛과 멋 그리고 풍류를 아는 우리네 민족이 그 시절의 유행을 논할 때 노래를 빠뜨리면 되겠는가. 좋은 노래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좋다는 말처럼, 그 시절의 노래들은 지금 들어도 여전히 좋다. 발라드가 주를 이뤘던 80~90년대 노래의 특징 중 하나는 서정적인 가사가 많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사랑과 이별을 노래한 것이 유독 많았는데, 모든 노래가 다 내얘기 같은, 그래서 공감가고 따라 부르게 되는 묘한 매력을 지녔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듣기 어려운 노래보다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지난 시절의 노래가 원곡 그대로 혹은 리메이크를 통해 유행하게 된 것도 추억을 소환하는 복고 드라마의 열풍 덕분이다. 여기서도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크게 한몫했다. 결정적인 장면에서, 안성맞춤으로 흐르는 음악은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비타민 같았고, 단비와도 같았다.

녹록치 않은 세상에서 살아가다보니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던 이들에게, 절망적인 뉴스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고’는 어쩌면 돌아가고 싶은 세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밥 때가 되면 밥 먹고 가는 게 예의처럼 느껴지던 시절, 동네 어르신의 훈계가 감사하던 그 시절, 붐비는 버스 안에서도 서로 자리를 양보하며 무거운 짐이 있으면 건네받아 무릎 위에 올려놓는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던 시절…….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눈물 나도록 그리워지기에 유행처럼 복고 열풍이 부는 것은 아닐까. 사람 사는 냄새가 그리운 이들에게 지금의 이 유행은 어쩌면 마음의 안식처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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